“처음 시작할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뿌듯합니다.” 노인과 지역사회 복지를 위해 번듯한 복지관 하나를 짓고 싶다는 꿈을 안고 평생을 살아온 전남 순천 풍덕복지회관 설립자 남궁흥하 관장(66). 그는 지난 75년 노인들을 위해 복지관 건립을 시작, 2000년 4층 규모의 복지관을 완공했고 부인 이문자씨(66)와 함께 복지관을 운영하며 봉사의 삶을 살고 있다.
남궁 관장이 봉사하는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조선대 재학 시절인 62년, 평생을 황무지 개간과 농민 교육에 헌신했던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교장의 강연을 듣고부터라고 한다. 김 교장은 당시 강연에서 “한쪽에선 굶어 죽는데 다른 한쪽에서 남아도는 건 죄악”이라며 나눔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했다고 한다.
“강의를 듣고 나서 막연히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졸업 후 체신부(지금의 정보통신부)에 들어가고 결혼을 해 일상에 젖어 살면서 그 마음을 조금씩 잃어갈 즈음인 74년 순천 풍덕동으로 발령받아 이사를 했어요. 당시 풍덕동은 정말 척박한 땅이었죠. 공동 화장실조차 없어 사람들이 강가에서 볼일을 볼 정도였어요. 가슴속에 있던 무엇인가가 막 올라오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일단, 그는 자신의 집 작은방을 동네 노인들을 위한 공간으로 제공했다. 동네 노인들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어울리면서 그의 집은 자연스럽게 동네 경로당이 됐다.
청소년들의 쉼터 만들고 장학제도도 운영할 계획
이듬해 그는 풍덕동에 복지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집 한 채 가격인 1백만원을 내놓고, 건립 출자자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객지에서 온 사람이 그냥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겠어요? 제가 먼저 내놓아야 다른 사람들도 내놓죠. 그런데 집에서 난리가 났어요. 제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고 잘 따라주던 집사람이 그때는 바가지를 긁더라고요. 처자식은 굶어 죽어도 상관없냐면서요. 장모님한테 뺨까지 맞았고요(웃음).”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에는 부인 이씨에게 많이 미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땐 복지회관 짓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고. 그는 자신의 돈 1백만원과 후원자 10명이 내놓은 1백만원에 살던 집을 저당 잡히고 빌린 돈 등 4백50만원으로 복지관 부지를 매입했다. 건물 짓는 데 소요된 비용은 매달 자신이 받는 월급으로 충당하고 부족한 부분은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남편의 근성을 알기 때문에 그땐 이미 모든 걸 포기했어요. 제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냥 묵묵히 남편 하는 것을 지켜보았죠. 그러니까 남편이 점점 자랑스럽게 느껴지더라고요.”
“차용 금액에 대한 매월 이자 상환도 어려워지자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았죠. 매일 아침 빚쟁이가 직장 앞에 찾아와 빚 독촉을 하기도 했어요. 직장 동료들에게 부끄러웠죠.”
복지관을 찾은 노인들의 말벗이 되고 있는 남궁흥하 관장의 부인 이문자씨(위 오른쪽). 복지관을 이용하는 노인의 수가 1백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간 수차례의 고비가 있었다. 남궁 관장은 79년 태풍 주디가 건축 자재를 휩쓸고 갔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하다고.
“그때는 겁도 없었어요. 홍수가 나서 물이 가슴까지 차올랐는데 물은 안 보이더라고요. 복지관 지을 때 쓸 연장이며 벽돌이 떠내려갈까봐, 그것들 챙기느라 정신없었어요.”
어려울 때마다 늘 그에게 힘이 돼준 사람은 바로 아내이자 동지인 이씨였다. 집안의 물건을 팔아 돈을 마련해도 싫은 내색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응원해준 것. 남궁 관장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부 두 사람의 뜻이 맞아야 한다”며 “항상 함께 해준 아내가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80년 2층짜리 건물을 완성했다. 그러나 규모나 시설 면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남궁 관장은 지난 99년 증축 공사를 시작, 2000년 현재의 복지회관을 완공했다. 당시의 가슴 벅참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부부는 입을 모은다.
이들 부부는 1남 2녀를 두고 있다. ‘왜 고생을 하느냐’며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던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를 이해하고 돕게 됐다고.
“복지관을 지을 때 아이들이 직접 벽돌을 나르고 쌓았어요. 그러면서도 공부도 곧잘 했고 지금은 모두 취직을 해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으니 기특할 따름이죠.”
복지관을 이용하는 노인의 수는 1백여 명. 건물 2, 3층은 노인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경로당으로 운영되고 있고 4층에는 배드민턴·탁구 등을 할 수 있는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다. 1층은 상가로 임대해 그 수익으로 복지관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다. 97년 정년퇴임해 복지관 운영과 봉사활동에만 매달리고 있는 남궁 관장의 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을 하려면 끝까지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그는, 앞으로 노인복지뿐 아니라 청소년 복지를 위해서도 힘쓸 계획이라고 귀띔한다. 3·4층을 개조해서 지역 청소년들의 건전한 쉼터도 만들고 싶고, 청소년 장학제도도 운영하고 싶다는 것.
“인간이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안보이는 끈으로 연결돼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 내게는 더 큰 기쁨과 보람이 돌아오죠. 또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할 수도 있고요.”
환갑을 훌쩍 넘어서도 봉사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한 남궁흥하·이문자씨 부부. 편안한 삶을 버리고 ‘나 하나’보다는 ‘우리 모두’를 위하는 삶을 살아온 이들 부부의 마음이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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