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발레리나를 꿈꾸었고 배우가 된 이후에는 한 번도 주연 자리를 놓친 적이 없던 탤런트 선우용녀(61). 중년에 이르러서는 ‘아줌마~’라고 외치면 만사가 해결되는 ‘팔자 좋은’ 부잣집 사모님 역을 주로 맡았다. MBC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 촬영장에서 만난 그는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옆집 아줌마 같은 모습이었다.
“제 목소리 톤이 다른 사람보다 좀 높고 연기생활을 오래 해서 겉보기에는 화려해도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아요. 화장 안 하고 청바지 입고 외출하면 영락없는 동네 아줌마지 뭐~. 그리고 그렇게 화려하게 살지도 못했어요. 돈이 없어서 먹고 싶은 걸 못 먹은 적도 있었거든요(웃음).”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신문기자였고 집안 형편도 넉넉해 학창시절 당시로서는 드물게 발레를 배웠다고.
“중·고등학교 때 발레를 했는데 그때는 제가 최고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한극장에서 외국 무용수들이 와서 하는 ‘백조의 호수’ 공연을 보고 나서 마음이 바뀌었죠. 저는 발끝을 세우려면 말도 못하게 고생했는데 외국 무용수들은 식은 죽 먹기처럼 잘하더라고요. 그들의 다리를 보고나니 제 다리는 무같아 보이고… 고3 때 무용을 포기하고 외교관으로 진로를 정했는데 대학에 떨어지면서 연기와 인연을 맺게 됐죠.”
그가 연기자의 길로 접어든 데는 큰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6남매 중 장녀인 언니는 당시 중학교 교사였는데 부모처럼 엄격하게 동생들을 보살폈다고.
“그 학교에서도 누구 선생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서운 선생님이었으니 동생들한테는 얼마나 엄했겠어요. 말하는 태도, 몸가짐도 다 언니가 가르쳤죠. 동생들이 몰래 라디오를 듣거나 이상한 책을 읽고 있으면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야단을 쳤는데 오죽하면 ‘저건 귀신인가’ 하는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웃음).”
시련 속에서 얻은 지혜와 욕심내지 않는 소박한 삶의 태도로 나이에 걸맞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선우용녀.
한창 사춘기 때는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셋째인 그를 비롯한 동생들은 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크다고 한다.
“맏딸이 살림 밑천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부모님이 맏이한테 힘을 실어주니까 자연스럽게 형제간에 기강이 생기고 언니가 공부도 가르쳐주고 진로상담도 해줘 동생들이 다 잘돼서 우애도 좋아지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 배우를 하면 좋겠다”는 언니의 권유로 서라벌예대에 입학한 그는 1학년인 65년 탤런트로 데뷔했고 곧바로 드라마 ‘상궁나인’에 주연으로 발탁돼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다. 그는 “다 지난 얘기라 쑥스럽다”면서도 당시 자신의 인기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60년대 중반 국산 자동차가 나오기 전 현대에서 포드와 기술제휴를 맺고 생산한 자동차가 있었는데 제가 그 모델로 발탁되면서 자동차를 한 대 선물받았어요. 금방 운전을 배워 차를 몰고 나갔더니 난리가 난 거예요. 당시만 해도 여자가 운전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시절이라 신기했던 거죠. 차를 타고 가다가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느라 사고가 난 적도 있어요. 그럼 또 제가 내려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사고가 났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라며 대신 용서를 빌기도 했죠(웃음).”
빚을 모두 갚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예식 치르고 시작한 결혼생활
그는 데뷔 2년 만인 67년 당시 사업을 하고 있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과는 열한 살 차이가 났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반해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부터 그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예식장소가 반도호텔이었는데 시간이 됐는데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무슨 영화에 나오는 얘기도 아니고, 속이 얼마나 바짝바짝 타들어가던지…. 시간이 얼마 지나고 신랑이 나타나긴 했는데 다른 사람 빚을 대신 떠안고 채권자들한테 몰려 때 맞춰 식에 나타날 수 없는 처지였다고 하더군요. 결국 빚을 다 갚겠다는 약속을 하고 결혼식은 겨우 치를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인 ‘빚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채권자들은 집이든 촬영장이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빚이 2천만원 정도 됐는데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죠.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고 출연료 차압이 들어오는데 참 서럽더라고요. 누가 결혼식에 안 오면 섭섭해할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닌지 한번 헤아려 봐야 해요. 전 정말 축의금 낼 돈이 없어 결혼식에 못 간 적도 있어요. 결혼 전 아무리 인기가 많았어도, 결혼하고 나서는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어요.”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 ‘구미호 가족’과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의 한 장면. 젊은 시절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기를 했지만 돌이켜 보면 몸을 움직여 일할 수 있었던 게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결혼 전 작품 선정에 까다롭기로 유명했고 더군다나 “영화는 포옹 장면이 있어 싫다”며 무조건 고사하던 그는 빚에 시달리면서부터는 “그저 일이 계속 들어오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고 말했다. 산후조리마저도 그에게는 사치였다.
“잠을 못 잘 만큼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바람에 촬영장에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고 제 대사 외우기 바빠 상대방 대사는 볼 시간도 없었어요. 결혼 3년 만에 딸 아들을 연년생으로 낳았는데 계속 일을 하느라 산후조리도 못했어요. 큰 딸 연제를 낳고 나서는 바로 ‘아씨’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아이 낳고 사흘 만에 강릉 경포대에 빠지는 장면을 촬영했고 아들을 가졌을 때는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죠. 한복을 입어서 임신하고 출산한 게 화면상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그때는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죠.”
남편은 8남매 중 장남이었는데 시집 식구를 보살피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고 한다. 넉넉한 친정에 기댈 수도 있었지만 A형에 처녀자리, 소심하고 자존심 강한 그는 “그건 꿈도 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결혼하니까 아래로 시동생 둘만 결혼하고 다른 동생들은 다 우리가 보살펴야 하는 처지였는데 맏며느리니 어쩔 수 없었죠. 부모님이 억지로 떼밀어 결혼한 게 아니니 수중에 십원 한 장 없어도 친정에 힘들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리고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받는 사람 따로 있고 베푸는 사람 따로 있는데 베푸는 편이 행복한 거예요. 받는 쪽은 늘 모자라고 주눅들지만 베푸는 쪽은 부지런히 움직여 일하니 몸 건강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악착스럽게 일해 결혼생활 10여 년 만에 빚을 청산한 그는 83년 연기를 그만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국 이민을 떠났다.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곁에 있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짐을 싸게 됐다고 한다.
“초등학생이던 연제가 하루는 집에 돌아오더니 ‘엄마, 다른 집 엄마들은 왜 집에 있어?’라고 묻는데 정신이 번쩍 났어요. 그동안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키워주셨는데 제가 아이들한테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든 거죠. 그때부터 이민을 준비하게 됐죠. 제가 한국에 계속 있다보면 아무래도 일을 거절하지 못할 것 같아 이민을 결심했어요.”
하지만 이민생활 역시 쉽지 않았다. 식당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린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파출부를 하면 한 달에 2백만원 정도 벌 수 있는데 못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이들을 키워야 하니까. 그런데 비전이 없어 보여 대신 미용기술을 배워 미용실에 취직했죠.”
미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이민생활 6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았지만 89년 드라마 ‘역사는 흐른다’ 제작팀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자 그는 제작 단계부터 자신이 캐스팅 1순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컴백을 결심했다. 부부는 아이들을 미국에 남겨둔 채 89년 귀국했다.
넉넉함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선우용녀. 그의 마음 씀씀이는 친정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딱 한번 친정어머니에게 “힘들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따끔한 충고로 딸을 보듬었다고 한다.
“친정어머니는 제가 일하는 걸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셨지만 제가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해서 남편이나 시집식구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그러면 그동안 고생한 것마저 빛을 못 보고 도로아미타불이 된다고 하셨어요. 이를테면 ‘참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인데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바보 같다’ 생각할지 몰라도 인생살이에는 그만한 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이 들면 모든 게 짐이 된다며 간소하게 사는 친정어머니 보며 배우는 점이 많아요”
아흔넷, 지금도 정정한 친정어머니는 그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거울 같은 존재. 소탈하고 욕심이 없는 점도 친정어머니를 닮았다고 한다.
“10여 년 전인데 어머니가 하루는 방 한 칸과 거실을 빼고 집을 모두 세주고 살림살이도 간소하게 정리하더니 그동안 자식들이 해드린 패물을 다 나눠주시더라고요. ‘나이 들면 이런 것도 다 짐이 된다’고 하시면서. 5년 전 어머니가 이사를 하실 때 보니까 정말 짐이 간소해서 좋더라고요. 자식들도 편하고…. 우리 나이 때가 되면 뭐든 넘치는 것보다 조금 부족한 듯, 모자란 듯한 게 좋아요. 운동도 나이에 맞게 적당하게 하고 먹는 것도 담백하게 먹고.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봐야 사는 건 잠깐인데 사람들은 인생을 무한대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한때 가수활동을 했던 딸 연제씨(36)는 현재 결혼해서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아들 우영씨(35)는 부동산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
“연제는 재혼해서 잘 살고 있어요. 처음엔 좀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잘 살고 있고 아들도 자기 일 잘하고 있으니 별 걱정 없고, 그거면 됐지 더 바랄 게 있나요. 제가 살아온 것도 그렇고 드라마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봤는데 사람이 욕심을 내면 못써요. 내가 못 가진 걸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못 가진 걸 내가 가질 수도 있는데 그런 걸 인정하고 나면 사는 게 편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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