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버지보다 목 하나가 더 크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넘지 못할 산이었다. 사물놀이 대가 김덕수(54)와 힙합가수 수파사이즈(24·본명 김용훈) 얘기다. 김덕수는 설명이 필요 없는 장구의 명인. 78년 꽹과리·장구·징·북으로 이뤄진 타악 공연을 선보이며 ‘사물놀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뒤, 지난 30년 동안 세계에 우리 음악을 알리는 선구자로 활동해왔다.
수파사이즈는 바로 그 김덕수의 아들이다. 최근 ‘루키 오브 더 이어’라는 앨범을 낸 힙합그룹 ‘스퀘어’의 래퍼. 케이블 방송에서 2년 넘게 VJ로 활동했고,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 ‘덩치2’ 역으로 출연해 배우로도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지금껏 그의 이름 앞에 가장 많이 붙은 수식어는 ‘김덕수 아들’이다.
“저만 만나고 기사를 써도 제목은 ‘김덕수 아들, 힙합가수 되다’ ‘김덕수 아들, 영화 출연한다’더라고요. 한때는 그게 정말 싫었죠. 스물한두 살 때는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인터뷰 안 하겠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럼 오늘 이 자리에는 왜 나왔느냐”고 묻자 수파사이즈는 그저 씩 웃었다. “이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웃음). 철이 든 거죠. 제가 아버지 아들이라는 건 아무리 도망친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어릴 때는 “우리 아빠가 사물놀이 세계 대장”이라며 자랑했지만 자랄수록 부담 커져
마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을 억지로 받아들이듯 이야기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 김덕수는 수파사이즈에게 영웅이었다고 한다. 88서울올림픽 때는 TV에 나오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가 사물놀이 세계 대장”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고. 아버지의 그림자가 무겁게 느껴진 건 중학교 무렵부터였다.
“제가 들어가는 학교에는 꼭 사물놀이 특활반이 생겼어요. 음악시간에 단소만 좀 잘못 불어도 ‘김덕수 아들이 단소도 못 부네’ 하는 시선이 따라다녔죠. 저는 중학교 때부터 힙합이 하고 싶었고, 중3 때 처음 무대에도 섰는데, 어쩌다 제 인터뷰 기사가 나오면 ‘아버지 덕본 놈’이라고들 하는 거예요. 아, 이게 뭔가 싶은 게…. 정말 싫더라고요.”
김덕수도 아들이 자신을 지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안다. 아버지 도움을 받으면 조금 더 편히 갈 수 있을 길을 굳이 돌아가느라 시간도, 정열도 더 많이 쏟아부어야 했다는 것도.
“이놈이 참 고집스러워요. 같이 곡 하나 만들자 해도 한사코 거절하거든요. 저는 예전에 서태지랑 ‘하여가’ 만든 것처럼(김덕수 사물놀이패는 지난 93년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아들 앨범에 내가 참여하고, 또 내 음악작업에 아들이 참여하면 참 좋겠다 싶은데 얘가 싫다네요(웃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는데도, 김덕수의 목소리에선 올곧은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수파사이즈가 힙합을 하겠다고 선언한 건 고1 때인 98년. 본격 활동을 위해 힙합그룹 ‘스퀘어’를 결성한 것도 지난 2002년이다. 그런데 4년 만에, 올 8월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단 첫 앨범을 냈다.
수파사이즈의 어린 시절, 김덕수는 늘 바빴지만 시간이 날 때면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 사이 수파사이즈는 ‘김덕수 덕에 떴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실력을 키웠다고 한다. 그 덕에 이번 앨범은 우리나라에 힙합을 들여온 ‘듀스’의 전 멤버 이현도와 방시혁, 주석, 이루마, 정재일 등 쟁쟁한 음악인이 두루 참여한, 음악계에서도 꽤 인정받는 작품이 됐다.
“앨범 나온 날 바로 아빠께 한 장 드렸어요. ‘제가 그동안 논 게 아니다, 이렇게 제대로 만드느라 오래 걸린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죠.”
그런 아들이 아버지는 “그저 장했다”고 한다.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고집스레 뭔가 이뤄내는 모습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파사이즈의 남다른 끼와 고집은 핏줄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김덕수는 남사당패에서 소고로 유명했던 할아버지를 따라 다섯 살 때부터 무대에 선 타고난 놀이패. 어머니 김리혜씨(48)는 중요무용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춤꾼이다. 아버지의 장구 리듬과 어머니의 춤사위를 익히며 자랐을 수파사이즈가 흥과 멋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힙합가수를 꿈꾼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수파사이즈에게는 동생이 한 명 있는데, 미국 인디애나주립대에서 유학 중인 그는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남들 공부할 때 공부한 평범한 아이”라고 한다.
“집에 무대 올라가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시끄러운데, 우린 3명이나 예술을 하니 얼마나 특이하겠어요. 그 가운데서도 꿋꿋이 자란 동생 동훈이가 신기할 뿐이죠(웃음).”
수파사이즈 형제는 어릴 때부터 부모가 집에 안 계신 걸 당연히 여기며 자랐다고 한다. 해외무대 서는 일이 잦았던 부모는 공연을 마치면 트렁크를 들고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바로 다른 트렁크를 들고 또 다른 나라로 떠날 만큼 바빴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여행하는 건 꿈도 못 꿨겠다고 했더니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식구들이 다 모여 밥을 먹은 기억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야. 그래도 종종 공연 여행할 때 데리고 다녔잖아.”
김덕수가 잠시 반박했지만 “거기서도 아빠랑 같이 논 건 아니지. 나갔다 돌아올 때만 같이 있었지, 외국에서도 공연하느라 바빴잖아”라는 수파사이즈의 반격에 바로 “그래. 그건 그렇지” 하며 쑥스러운 웃음을 짓고 말았다.
수파사이즈의 기억에 남아있는 유일한 ‘가족 나들이’는 그가 일곱 살이던 지난 88년, 어떻게 시간이 났는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일이라고 한다. 네 식구는 가족사진을 찍어 인쇄한 티셔츠를 입고 하루 종일 재밌게 놀았다고.
“우리 식구들 정말 특이하죠? 평소엔 전혀 못 보다가 한꺼번에 같은 티셔츠 입고 나들이 가고 말예요. 진짜 예측불가능한 가족이라니까요(웃음).”
“예술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아들이 힙합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 좋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그는 오늘의 자신 뒤에는 부모의 남다른 도움이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 아빠 공연에 따라다니며 우리 음악을 자장가 삼아 듣고 자란 그에게 리듬은 생활 그 자체였던 것. 게다가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장구·소고 등 전통 타악기의 기본기를 배웠다고 한다. 잘못할 때 드는 매도 회초리가 아니라 장구채였을 만큼, 수파사이즈의 일상은 음악과 밀접히 묶여 있었다.
“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과 즐기는 건 분명히 다르거든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전 공부해서 아는 것과는 다른, 태생적인 리듬 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힙합을 할 때면 제가 리듬을 타고, 갖고 놀고, 즐길 수 있다는 게 정말 행복하죠. 다 엄마 아빠 덕분이에요. 어린 시절에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엄마 아빠 친구’로 만난 것도 소중한 경험이고요. 그분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예술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어요. 제가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난 아빠 아들이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제 속에 자연스럽게 쌓여있는 이런 경험들이 오늘의 저를 만들었다는 걸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거죠.”
수파사이즈는 사춘기 시절 갑자기 힙합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네가 하고 싶다면 해보라”며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준 아버지의 교육법도 오늘의 자신을 만들어줬다고 믿는다.
“사실 제가 얘를 많이 풀어주기는 했어요(웃음). 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수성이 점점 메말라가는 이유가 어린 시절의 과보호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조금만 문제 있어 보이면 부모들이 앞장서서 ‘안 돼’ ‘못 해’ 하니 도대체 어떻게 세상을 배우겠어요. 샌님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이 되죠. 길거리에서 춤추는 아이들을 보면 옛날엔 다 ‘나쁜 친구’라고 못 사귀게 했는데, 그 아이들이 자라서 지금 국제대회 나가 우승하는 B-boy(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가 된 거잖아요. 어른들 기준으로 좋은 일, 나쁜 일 나눠도 안 되고, 나쁜 일 같아 보인다고 무조건 못 하게 해도 안 된다는 게 제 지론이에요.”
그래서 김덕수는 수파사이즈가 갑자기 힙합을 하겠다고 했을 때도, 4년씩이나 앨범 한 장 안 내고 ‘왔다 갔다만 할 때도’ 믿고 기다렸다고 한다. 선배로서, 아버지로서 하고 싶은 말들을 아들이 스스로 깨달을 때를 기다리며 참고 아꼈다.
“이제 용훈이가 정말 래퍼가 됐으니까 좀 얘기해도 될까요. 사실 예술인으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특히 ‘플레이어’라고 불리는 사람들, 기획자나 연출가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예술하는 이들은 아직도 알게 모르게 무시당하는 면이 있죠. 평생 그 길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우리 아들이 또 그 일을 한다는 게 좋지만은 않았어요. 하지만 하고 싶다면, 그리고 이미 시작했다면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힙합이나 사물놀이나 하나로 통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흥을 담아내는 예술이라는 거 아닙니까. 인생이 녹아나는, 우리 주위의 보통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음악을 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젠 진짜 나랑 같이 곡 하나 하자고,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멋진 작품 하나 만들어보자고 또 한 번 꼬시고 싶네요.”
지난 97년 김덕수가 음악인생 40년을 맞이했을 때, 신해철·김광민·정원영과 DJ DOC의 이하늘 등 쟁쟁한 후배들은 ‘미스터 장고’라는 앨범을 만들어 그에게 헌정했다. 음악계의 큰 선배 김덕수가 우리 음악 발전에 끼친 공을 기린 것이다. 그런 김덕수도 아들 앞에서는 곡 하나 같이 만들자고 ‘사정’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내년은 김덕수가 음악인생 50주년을 맞이하는 해. 이 때문에 올해 말부터 각종 프로젝트와 해외공연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이런 아버지에게 전하는 수파사이즈의 바람은 “건강 좀 챙기셨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제가 아빠 성격을 잘 알아요. 남들이 뭐라 하든 당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꼭 하는 분이죠. 하지만 전 아빠가 좀 쉬셨으면 좋겠어요. 무대에 서는 일을 줄이고, 다른 쪽 일을 하시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는 아들도 아버지도 서로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다”는 말로, 아들은 “내 음악 세계가 좀 더 분명해진 뒤에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고집을 부린 것이다.
상대방의 말에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며, 실은 둘 다 그런 대답을 기다렸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아버지가 ‘사물놀이 세계 대장’이기를, 그리고 아들이 아빠의 그늘에 기대지 않는 젊은이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했던 건 아닐까. 외모도, 성격도,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까지도 똑 닮은 두 사람의 바람이 실현되려면 앞으로도 한참 더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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