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21C 권도관에서 자신이 창시한 권도를 선보인 박현성씨.
찌는 듯한 무더위에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던 지난 8월 초,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에 자리 잡은 21C 권도관. 전신 화상을 입은 ‘불사조 파이터’로 유명한 이종격투기 선수, 박현성씨(38)가 그곳에서 기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박현성씨는 92년 분신자살을 기도해 신체의 93%에 화상을 입었지만, 재활에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 그는 2003년 선수생명으로 계산하면 환갑에 가까운 35세 때 이종격투기 대회에 출전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충남 대천이 고향인 그는 청소년 시절 아마추어 복싱계에서 촉망받는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소년체전 우승을 비롯해 많은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했고,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뽑히기도 했다.
“중학교 때 친구하고 극장에 갔다가 괜한 객기에 고등학생들의 돈을 빼앗은 사건을 계기로 권투를 시작하게 됐어요. 복싱부 코치가 운동을 하면 사건을 무마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소년원에 가는 게 겁나기도 하고, 일이 커지면 집에서도 알게 돼 아버지한테 혼날 것 같아 시작했죠. 그때까지 집에서는 저를 모범생으로 알았거든요. 그땐 공부도 잘했어요.”
하지만 그는 이내 권투에 흥미를 잃었다. 빨리, 많이 때리는 데 중점을 둔 단순반복 훈련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반대파 조직의 테러로 아킬레스건 잘린 후 분신자살 기도
훈련법에 회의를 느낄 때 즈음, 그는 이해관계에 밀려 대표선수로 출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권투만 하며 살기에는 미래가 불투명하던 차에, 이런 일까지 당하자 방황이 시작됐다. 그 즈음 ‘고교 싸움짱’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에게 “폭력조직에서 함께 일하자”는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권투와 조직생활을 병행하던 그는 스무 살이 되던 해 대학을 중퇴하고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됐다.
“돌아보면 권투를 그만둔 게 아쉽기도 해요. ‘당시 누군가 혼을 내서라도 내 마음을 잡아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조폭 보스로 살아갈 땐 그 생활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조폭생활을 하던 20대 초반, 그는 반대파에게 아킬레스건이 끊기는 부상을 당하고 병원으로 옮겨졌다.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그를 괴롭힌 것은 상처가 아니라 좌절감이었다. 결국 극단적인 감정에 북받쳐 그는 분신자살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머리부터 석유를 들이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단란한 박현성씨 가족. 박씨는 부인 정정임씨와 아들 기영, 딸 서연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고 말한다.
“지나고 나니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정말 괴로웠어요.”
분신 직후 지금의 부인인 정정임씨(38)와 박씨의 동생이 그를 병원으로 옮겼을 때, 몸의 93%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의사는 박씨의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가족은 치료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온몸을 문질러 닦고, 스트레칭을 시키고, 그 와중에 수술비를 마련하는 고달픈 여정이 3년간 계속됐다.
“제가 왜 이 남자와 이제껏 같이 사는 줄 아세요? 병원에 갔는데 그 상태에서 저를 보고 웃더라고요.”
박씨는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씨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재활 전 과정에 대해서도 그보다는 정씨가 더 자세히 기억하고 있다.
“화상을 입으면 피부가 수축되고 단단해져요. 석고처럼 굳은 피부를 정상으로 돌리려면 우선 따뜻한 물에 들어가 근육을 이완시킨 다음 운동을 해야 해요. 하루도 빠짐없이 스트레칭과 운동을 시켰어요.”
3년간 매일 스트레칭시키며 재활 도운 아내
박현성씨는 피부재생은 물론 근육을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그는 현재 비록 다리와 손이 불편하지만 선수로 뛰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의 성공적인 재활사례는 의학계에 전례 없는 성공스토리로 남아있다.
분신의 상처는 결과적으로 그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아버지의 유산을 모두 쓰고 살던 곳까지 잃었지만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의 문 앞에 섰던 그는 지금의 삶에 더없이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스물일곱 차례 수술을 받은 3년의 재활과정은 그에게 강한 삶의 의지를 심어줬다. 또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곁을 지켰던 가족의 소중함을 그는 가슴으로 깨달았다고 했다.
“살면서 가장 기뻤을 때는 재활과정 중 처음 걷던 날이었어요. 50m쯤 되는 다리를 혼자 건넜는데, 도착 지점에 엄지(그는 아내를 엄지라고 불렀다)가 있었거든요. 목발을 짚었는데, 뒤꿈치가 바닥에 닿지 않았어요. 그때만 해도 피부가 다 펴지지 않아서…. 온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결국 도착지점에 다다르자 엄지도 울고 저도 울고….”
재활을 마친 후, 그는 권투 코치가 됐다. 그는 금메달리스트 한 명만 만들겠노라며 일을 시작했지만 금메달리스트가 나온 후에도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혈기왕성해서 넘치는 힘을 어떻게 쓸 줄 모르는 아이들을 보니까 제 어린 시절이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필요로 했던 그런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짐하고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훌륭한 인재들을 제대로 만들어가는 재미가 컸다. 다행히 그의 지도방식이 통했는지 그가 맡은 선수들은 모두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 무렵 그는 결혼을 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정씨를 만나 스무 살 무렵부터 함께 살았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조폭 보스로 살던 시기에는 마음이 약해질까봐 일부러 그랬고, 조폭생활을 청산하고는 미안해서 차마 결혼해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결혼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임신이었다.
“의료진은 분신의 상처가 커서 임신이 안될 거라고 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한 거예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박현성씨는 20여년 간 자신의 곁을 말없이 지키며 재활을 도왔던 부인에게 고마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태어난 천금같은 아이가 아들 기영이(8)다. 두 사람은 97년 충남 대천의 한 웨딩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당시 신부는 임신 4주였다. “특이한 이력을 가진 남편과 지금껏 함께 살아오는 데 큰 믿음이 필요했을 것 같다”는 질문에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기영이 아빠에 대한 믿음보다는 그저 제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사는 곳을 옮겨야 하거나, 병간호를 할 때도 그것을 귀찮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그는 조폭 보스로 살던 충남 대천에 머무는 이상 그의 주먹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2002년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35세에 늦깎이 이종격투기 선수로 나서 띠동갑인 젊은 선수들 물리쳐
얼마 후 자신이 취직해 일하던 체육관을 관장이 팔려고 내놓았을 때 그는 체육관을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인수자금이 부족했던 박씨의 사정을 알게 된 팬들이 모금운동을 벌인 덕분에 그는 2003년 체육관을 인수할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여러 스타 선수를 발굴해 상당한 팬을 갖고 있었다. 영화 ‘주먹이 운다’에서 류승범의 실제 모델인 이종격투기 선수 서철, ‘한국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로 통하는 여성복서 민현미가 바로 그가 키운 대표적인 스타다.
체육관을 인수한 그는 권도를 창시했다. 권도는 서로의 몸이 떨어진 상태에서 주먹 앞부분으로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는 권투와 달리, 손날·손등·손바닥 등 손으로 하는 모든 공격이 가능하다.
그는 권도 지도자로 일하면서 2003년 9월부터 2년간 이종격투기 선수로 활약했다. 35세에 늦깎이 이종격투기 선수로 변신한 그는 스피릿MC 대회에서 띠동갑(열두 살 차이)인 젊은 선수들과 겨뤄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 그는 이종격투기 선수를 그만두고 코치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좌우명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체육관 벽면을 가리켰다. 벽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있다.
“강한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강해지려 노력하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강해진다는 것은 중의적이다. 무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강해질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비롯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노력하는 자세가 인간을 키운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인터뷰 내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까르르 웃는 아들 기영(8)과 딸 서연(5)을 가리켰다. “이 아이들과 엄지가 제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예요. 물론 제 어머니와 다른 식구들도 포함되지요.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겁니다. 한때 방황도 했고 이들을 힘들게 만들었어요. 그 미안함이 아직도 크게 남아있지요.”
최근 박현성씨의 삶을 소재로 ‘소설 박현성-불사조라 불리는 사나이’가 출간됐다. 제자와 기자들에게 조금씩 풀어놓던 이야기가 10년간 그를 지켜본 한 기자에 의해 새롭게 각색된 것이다. 책을 두고 박씨는 “조금은 발가벗겨진 기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과거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만, 지금의 나로 인해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니 미래를 지켜봐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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