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등잔 밑에서 책을 보고 나면 코밑이 까맣게 변했다’고 하던 옛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잔은 이제 이따금 복고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TV 드라마나 아니면 박물관에 가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낯선 것이 됐다. 어둠을 밝혀주는 생필품에서 지금은 그저 구닥다리로 취급되는 등잔, 그 불빛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인사동 ‘수월거’에 한번 들러보자.
서울 인사동에 자리한 등잔 전문점 ‘수월거’에서는 11월30일부터 ‘수월거 친구들 5인 등잔전’이 열리고 있다. 등잔을 만드는 작가 5명이 모여 50여 점의 등잔을 전시하고 있는 것.
소박하지만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하는 등잔
전시회 참여 작가 중 가장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변희석씨(41)는 손꼽히는 등잔 전문 작가다. 사진을 전공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등잔을 만들어보고 수집도 하다가 등잔 전문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작품은 투박함이 특징인데 매끈하고 깔끔한 느낌의 사기보다는 흙의 질감을 살린 투박한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단국대 도예과 출신인 김지선씨(30)는 차 도구를 만들다 지난해부터 등잔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모양은 비교적 전통적이지만 색감은 무척이나 현대적인 것이 특징이다.
마치 녹슨 청동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남무씨(37)의 작품은 기존 도자기 작품에서는 보지 못한 묘한 색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색상을 작업상 실수에서 얻은 것이라고 한다. 불 조절을 잘못해서 유약이 덜 녹았는데 진한 남색 계통의 특이한 컬러가 만들어졌다고.
이 외에도 뫼비우스의 띠를 응용해 모던한 느낌을 살린 김성철씨(38)와 호랑이 도예가로 유명한 고선례씨(36)의 작품도 있는데 이번 전시회의 유일한 여성 작가인 고선례씨의 경우 이번에도 ‘호랑이 등잔’을 내놓았다.
이들 등잔 작가가 말하는 등잔의 미학은 ‘소박하지만 따스한 정’이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는 밝은 전등불빛이 오히려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럴 때 전등을 끈 상태에서 그저 작은 심지에서 뿜어나오는 작은 불빛을 바라보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다고.
“늦은 밤 갑자기 친구 부부가 저희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어요. 사실 변변한 안줏거리도 없던 터라 그저 집안에 있던 등잔을 모두 꺼내 심지에 불을 붙이고 김치 한 가지에 소주를 마셨죠. 만약 밝은 전등불 아래에서 봤으면 초라했겠지만 흔들리는 등잔불 아래에서는 최고의 술상이 되었어요.”
변희석씨의 말처럼 등잔은 희미해진 추억, 이제는 빛바랜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지친 삶을 위로받고 싶다면 혹은 깊어가는 겨울밤, 깊은 사색에 잠기고 싶다면 잊고 있던 추억 속의 등잔을 만나볼 수 있는 ‘수월거 친구들 5인 등잔전’으로 가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12월15일까지. 오전 10시~오후 7시. 관람료 무료. 문의 인사동 수월거 02-734-4016
① 투박함 속에서 피어난 불빛이 원시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② 변희석씨의 낙관과도 같은 활 쏘는 사람 문양과 소나무 그림이 인상적인 등잔.③ 오리 모양 등잔으로 두 개가 하나의 작품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④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 부부 방에 간접 조명으로도 좋다.⑤ 물고기 문양에 찰흙을 덧입혀 독특한 느낌을 살린 작품.⑥ 여성의 누드를 모티프로 삼아 모던한 느낌을 준다.⑦ 벌집 문양이 등잔의 원시성을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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