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막을 내린 ‘제5공화국’에서 장세동 역을 실감나게 연기, 강한 인상을 남긴 탤런트 홍학표(44). 그는 ‘제5공화국’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드라마 이야기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한국 현대사에 사실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등장인물들이 모두 실존 인물이라 한계가 많았죠. 허화평, 장세동, 박철언 등 5공 인사들이 제작진을 상대로 수차례 대본수정과 반론 보도를 요청했으니까요.”
드라마에서 그는 5공화국의 실세 장세동 역을 맡았다. 육사 16기인 장세동은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전두환을 최측근에서 보좌했으며 5공화국 시절 안기부장을 역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87년 안기부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전두환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한 인물이다.
장세동을 연기한 소감을 묻자 그는 “가공의 인물이든, 실존 인물이든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에 대해서는 애증이 남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의리의 돌쇠’죠. 제가 역사적인 평가를 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치에 뛰어들지 말고 계속 군인으로 남았으면 좋았을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의지와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이죠. 이런 인물을 충복으로 둔 전두환 전 대통령도 대단하고요.”
그는 드라마를 준비하며 장세동 측근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장세동 역에 캐스팅되고 나서 장세동씨를 모시고 있다는 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저 역시 자료 수집이 될 것 같아 만나서 소주 한잔 같이한 적이 있는데 ‘잘 좀 그려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장세동씨의 측근뿐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제5공화국’ 촬영이 한창이던 지난 8월 골프를 치러 갔다가 골프장에서 우연히 전 전 대통령 내외를 만났어요. 제가 앞 팀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비서를 통해 만나자고 하시더라고요.”
전 전 대통령은 그에게 “(5공 인사들이) 욕을 좀 덜 먹게 연기해달라”고 특별 주문을 했다고 한다.
“제게 정종을 건네며 ‘드라마 잘 보고 있다. 다 좋은데 욕은 반만 먹게 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또 드라마에서처럼 장세동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른 적은 한번도 없다는 세세한 지적까지 하셨죠. 이순자 여사도 자신이 드라마에서 장영자와 잘 아는 사이처럼 나오는데 실제로 본인은 장영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웃음).”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난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 사실과 다른 부분 세심하게 지적
사실 그는 자신의 부친이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몸 담은 적이 있어 이번 드라마가 더욱 각별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어요.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다고 해서 그냥 그런 줄 믿었고 가정환경 조사서의 아버지 직업난에도 항상 ‘사업’이라고 썼어요. 아버지는 79년 12·12로 중앙정보부를 나오신 후에야 그런 사실을 말씀해주셨어요. 고등학교 때 가출을 해서 미아리 만화방에 숨어 있다가 3시간 만에 잡힌 적이 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아버지가 정보망을 가동하셨던 거예요(웃음).”
비록 5공 인사들이 제기한 각종 소송으로 ‘제5공화국’은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이덕화, 서인석, 임동진, 김용건 등 관록 있는 연기자들이 다수 출연한 만큼 촬영장 분위기는 항상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모처럼 선배들과 함께 작업을 했는데 촬영이 끝나면 술도 한잔씩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았어요. 젊은 연기자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 그럴 기회가 없죠. 촬영 끝나면 다들 사라져버리니까요. 이번엔 제가 연기자 중 거의 막내였어요. 정말 오랜만에 커피 심부름이며 선배들 수발 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홍학표는 94년 홍익대 미대 출신인 아홉 살 연하 아내와 결혼해 지영(12) 나영(6) 두딸을 두고 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내가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졸업할 때까지 기다렸다 바로 결혼했죠. 아내는 남편과 아이밖에 모르는 천생 ‘여자’예요. 아이들도 엄마를 닮아서 애교가 많고요.”
그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정직을 가장 강조한다고 한다. 가훈도 ‘언행일치’로 정했다고.
“제가 학교 다닐 때 거짓말로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거든요. 부모님이 연극영화과 진학을 반대하셔서 가출도 많이 했죠. 한번은 고3 때 도서관에서 공부한다고 속이고 친구들이랑 대천 해수욕장에 놀러간 적이 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그날 마침 도서관에 간식을 싸가지고 오셔서 탄로가 났었죠.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많이 죄송해요.”
그는 아이들이 현재보다 좀 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마음껏 뛰놀며 티없이 자라기를 바란다고 한다. 때문에 아이들을 내년쯤 미국에 보낼 계획이라고.
“공부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들이 주눅드는 걸 보기가 안타깝던 차에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 코스를 밟고 있는 처남이 아이들을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내년쯤 아내와 아이들을 미국으로 보낼 생각이에요. 기러기 아빠가 되는 거죠.”
87년 MBC 특채로 데뷔, 연기생활 18년째를 맞는 그는 좀처럼 늙지 않는 배우다. 그를 아직도 ‘우리들의 천국’의 하이틴 스타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최민수가 절더러 ‘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들 놀라요. 늙지 않는 장애라도 있는 건지(웃음). 사람이 제 나이로 보이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데….”
돈 때문에 원치 않는 배역 맡기 싫어 사업에 매진
‘제5공화국’에 함께 출연한 차광수, 이덕화(왼쪽부터)와는 동국대 선후배 사이.
‘우리들의 천국’에서 함께 연기했던 최진실, 박철 등 후배들도 1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어엿한 중견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는 자신과 함께 했던 연기자들이 늘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최진실은 마냥 어린아이 같은데 그 친구도 벌써 두 아이를 둔 엄마가 됐네요. 요즘 출연하는 드라마 ‘장밋빛 인생’은 바쁜 가운데도 빼놓지 않고 보는데 연기 잘 하더라고요. 개인적인 아픔은 다 떨쳐버리고 좋은 연기자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로 골프와 등산을 꼽았다.
“사실 어머니가 97년 고혈압으로 돌아가셨고 저도 혈압이 좀 높은 편이라 운동을 열심히 해요. 골프는 싱글 수준이고 요즘에는 등산을 자주 하죠. 일산 집 근처에 왕복 두 시간 코스인 심악산이 있는데 일주일에 3~5회 정도 오르니까 다이어트가 되더라고요. 1년 정도 등산을 했는데 6kg 감량에 성공했어요.”
홍학표는 동국대 시절 자주 드나들던 장충동 족발집의 향수를 잊지 못해 최근 족발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다작을 하지 않는 배우다. 1~2년에 한 번씩 드라마에 출연해 강한 인상을 남기고는 훌쩍 사라진다. 대신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 사업을 벌인다. 섬유 원단 사업체와 방산업체 등을 경영했던 그는 최근 건설사업에 이어 ‘돈자당’이라는 브랜드로 음식 체인사업을 시작했다. 족발, 보쌈, 순대 등 토속적인 먹을거리들을 주 메뉴로 하여 현재 서울시내 유명 백화점 푸드코트에 9개의 매장이 있다.
“저는 현실과 타협을 하지 않기 위해 사업을 해요. 돈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배역을 맡기는 싫거든요. 물론 한때 사업이 힘든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여러 음식 중 특히 족발을 메뉴로 택한 데 대해 그는 “대학시절 추억이 담긴 먹을거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제가 동국대 출신인데 학교가 위치한 장충동이 족발로 유명한 곳이에요. 수업이 끝나면 족발집에 몰려가서 술 한잔 걸치며 인생과 연기에 대해 토론하던 대학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잊지 못해 족발사업을 시작하게 됐죠.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홍학표’라는 제 이름에 기댈 생각은 없어요. 음식 장사는 음식으로 승부를 해야죠.”
홍학표는 당분간은 사업에 매진할 생각이지만 향후에도 좋은 배역이 들어온다면 연기를 계속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에는 시트콤이나 정통 멜로에 도전하고 싶다고 한다.
“시트콤의 코믹한 연기나 정통 멜로물의 남자 주인공 역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최근 드라마 중엔 ‘장밋빛 인생’의 맹순이 남편 손현주씨 역할이 재미있더라고요. 바람피우다 걸려서 아내에게 두들겨 맞는, 그런 역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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