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분한목소리로 ‘9시 뉴스데스크’ ‘출동 6mm 현장 속으로’ 등을 진행해온 MBC의 대표적인 아나운서 정혜정씨(39)가 지난 5월 명예퇴직을 해 방송가에 화제를 모았다.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퇴근길에 MBC 정문을 나서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라 저 자신도 그 정도로 서운할 줄 몰랐어요. MBC는 제 젊은 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막상 그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더라고요. 애정이 많았던 것 같아요. 좋은 분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솟더라고요.”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4학년이던 87년 MBC에 입사해 18년 동안 한우물을 판 정씨는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한 노력형 인물이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평이다. 입사 4년 째인 90년 결혼한 그는 95년엔 변호사인 남편과 세 살 난 아이와 함께 미국유학길에 올라 1년 6개월 동안 공부에 열정을 쏟기도 했다.
“줄곧 바쁘게 살았어요. 쉴 틈 없이 일했죠. 제 삶에 잠시 ‘쉼표’를 찍고 싶었어요. 좀 더 나은 제2의 인생을 위해 재충전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어요. MBC에서 활동한 기간이 제 삶의 전반기였다면 인생의 후반기를 준비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죠. 이 상태로 일하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될 것 같았어요.”
그는 명예퇴직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열심히 하면 세상에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일을 놓기로 결정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어요. 주위 분들이 ‘그렇게 좋아한 일을 왜 그만두냐’고 안타까워했고, ‘너무 무모하게 (회사를) 그만두는 것 아니냐’면서 말렸어요. 하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문제는 몇 년 전부터 고민을 해왔고 마침 명예퇴직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결심을 굳힌 거예요.”
그는 “지금의 선택이 계획성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MBC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살던 때와는 달리 가시밭길이 펼쳐진다 해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내린 결정이었다”고 했다.
“MBC에서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되는 것, 물론 시켜줄지 모르는 일이지만(웃음), 그것은 제 꿈이 아닌 것 같았어요. 그렇게 된다고 해서 과연 행복할까 싶었죠. 잘할 자신도 없었고요. 나이 먹을수록 현장보다는 후배들을 챙겨야 하는 관리자의 자리에 앉게 될 텐데 그건 제게 맞는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방송활동 중 몸 관리하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아나운서는 여대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 하나다. 아나운서의 인기는 방송사 신입사원 입사 경쟁률에서 증명된다. 방송 3사의 아나운서 모집에 수천 명씩 지원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외적인 아름다움과 지적인 능력까지 갖췄다고 평가받는 ‘앵커’는 아나운서의 ‘꽃’으로 불린다.
18년 동안 꾸준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그에게 “방송활동 중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프지 않도록 몸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뉴스를 진행할 때 감기라도 걸리면 참 난감했어요. 일을 즐기면서 사는 편에 속했지만 늘 긴장한 채 하루하루 방송에 임해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죠. 겉으로 드러난 제 모습은 화려한 백조와 같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여느 직업 못지않게 적잖은 고통이 뒤따랐어요. 1년 중 주어지는 휴가는 일주일뿐이고 그것도 맘 편하게 놀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죠.”
현재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그는 “회사를 그만둔 후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게 계획한 일은 없지만 우선 박사과정 논문 준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면서 “항간에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명예퇴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회사를 그만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6)은 회사 그만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중학교 1학년인 큰아이는 제가 계속 일하기를 원했어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퇴직한 것은 아니에요. 뭔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고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에 아이들 문제가 포함되었을 뿐이죠. 늘 바쁘게 방송 일에 파묻혀 사느라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거든요. 큰아이가 여섯 살 때부터 아홉 살 때까지 평일 ‘뉴스데스크’를 진행해 저녁에 아이와 함께 하지 못했어요. 그게 지금도 미안하고요.”
그가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정 어머니는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며 정씨의 퇴직 결정을 만류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정씨는 어려서부터 전업주부로 살아온 친정 어머니에게 “여성도 자신의 일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면서 “결혼한 여성으로서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늘 최선을 다하려고 애썼다”고 털어놓았다.
“여느 직장여성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아플 때, 일하는 아줌마가 그만둔다고 할 때 참 난감했죠. 그럴 때는 그만두고 싶기도 했어요. 사실 지금의 제가 있기까지는 주변 사람들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특히 남편과 친정 어머니의 도움이 가장 컸죠. 지난 현충일에 가족과 함께 여행가는 길에 남편이 ‘당신 스케줄에 구애받지 않고 여행 떠나는 게 결혼생활 15년 만에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얘길 들으니 가족과 남편에게 참 미안하데요.”
자의에 의해 회사를 그만뒀지만 ‘앞으로 잘돼야 할 텐데’ 하는 부담감 또한 적지 않다고 한다. 지난해 ‘연세언론인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씨는 후배들로부터 “선배가 우리들의 모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고.
“어느 순간부터 저도 모르게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된다는 점이 어깨를 짓누르더라고요. 그런 관심이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지만 자극제가 되기도 하죠. 후배들에게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자의든 타의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그는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의식하면서 생활했지만 이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매사에 노력하고 싶다”고 고백했다.
“방송을 떠난 것이 아니라 회사를 떠났을 뿐”이라고 표현한 정씨는 “나에게 맞는 프로그램의 출연요청이 있을 경우 마다할 이유가 없다”면서 프리랜서로 일을 계속할 생각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맡은 분야가 뉴스와 시사·교양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오락물보다는 그쪽을 선호하겠죠. 자기 계발을 하면서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일할 생각을 갖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공부와 방송현장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일도 하고 싶고요. 딱히 정해놓은 계획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은 많아요.”
”기회가 주어지면 프리랜서로 일할 거예요”
MBC를 명예퇴직한 정혜정 아나운서는 방송을 떠난 게 아니라 회사를 떠났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정계에 진출한 선배 방송인들의 뒤를 이어 정치에 입문할 생각이 없냐”고 묻자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런 생각은 예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정치 쪽에 눈길 한번 안 주고 지금껏 살아왔거든요. 방송국에 있는 동안 정치입문을 제의받은 적도 없었고요.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사람은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명예퇴직은 내 인생에 있어 결혼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였다”는 정씨는 자신의 명예퇴직이 많은 사람에게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줄은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명예퇴직’이라는 어감이 주는 서글픈 현실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어요. ‘아,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저는 처지가 조금 다르지만, 어쩔 수 없이 명예퇴직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직장인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릿해지더라고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어요.”
방송사를 그만뒀다는 소식에 많은 네티즌이 섭섭함을 토로하는 인터넷 게시판의 글을 읽으면서 “나를 지켜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뭉클했다는 그는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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