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송강호(38)가 ‘효자동 이발사’ 이후 1년 만에 ‘남극일기’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지난 5월19일 개봉한 ‘남극일기’는 ‘도달불능점’이라 불리는 남극 극지 정복에 도전하는 탐험대원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고 미쳐가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밀도 있게 그린 영화로 2년 6개월의 긴 제작기간, 90여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제작비, 뉴질랜드 현지 촬영, 최첨단 컴퓨터그래픽 사용 등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탐험대장 최도형 역을 맡은 송강호는 대본을 읽자마자 출연을 결정하고 2년 6개월 동안 영화와 동고동락했다. 한때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영화 제작이 중단되자 앞장서서 투자자들을 설득하는 등 강한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영화 개봉을 앞둔 그는 무척 밝은 표정이었다.
“‘남극일기’는 단순히 모험영화나 스릴러물이 아니에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출연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사람에겐 누구나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잖아요. 전 그게 그 사람의 도달불능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거기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지나쳐 남들에게 피해를 주면 지옥처럼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영화죠.”
영화는 지난해 6월부터 석 달 동안 뉴질랜드의 해발 1700m 고지대에서 촬영을 한 데 이어 양수리 세트장과 수원 세트장, 대관령 등에서 보충 촬영을 해 촬영 기간만 9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영하 80℃를 밑도는 혹한지인 남극이다 보니 촬영하는 내내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언제 제일 힘들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뉴질랜드에서의 촬영은 다 힘들었어요. 100kg이 넘는 짐을 끌고 끝없이 걸어야 했으니까요. 더구나 그곳은 겨울이어서 금방 해가 지는데, 눈밭이라 한 컷에서 다른 컷으로 넘어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리고…. 정말 시간과 눈과의 싸움이었죠. 배우고 스태프고 할 것 없이 한 컷 끝나면 다음 컷을 위해 장비 들고 뛰는 게 일이었어요.”
그를 비롯한 스태프와 배우들은 매일 새벽 네다섯 시에 기상해 차로 1시간 30분 동안 촬영장으로 이동해서 해가 지는 오후 5시30분까지 쉬지 않고 촬영을 했다고 한다. 날씨도 변덕스러워 갑자기 폭설과 폭풍이 한꺼번에 몰려오는가 하면 한치 앞이 안 보이게 새하얀 안개가 껴 땅과 허공이 분간이 안되는 상황을 겪기도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고.
남극 탐험을 하는 영화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특수체력훈련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정작 그는 동네 뒷동산에 오르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게 없었다며 웃었다. 2003년 겨울 산악인 박영석씨의 지도로 3박4일 동안 썰매를 끄는 훈련을 한 게 전부였다고.
“극점 탐험대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박영석 대장에게 썰매를 끄는 자세를 배웠어요. 몸무게가 100kg이 넘는 임필성 감독(‘남극일기’ 감독)을 썰매 짐칸에 태우고 스키장 꼭대기까지 오르느라 고생을 했죠(웃음).”
그는 체력강화 훈련보다 촬영을 하는 중에 살을 빼기 위해 운동하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장인물들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매일 촬영이 끝나면 운동을 해 몸무게를 10kg까지 감량했다고.
“내내 금욕적인 생활을 했어요. 술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운동만 했으니까요. 그땐 살이 빠져 홀쭉했는데 올 1월 촬영을 마친 후에 아무 일도 안 하다 보니 다시 늘었어요. 워낙 움직이는 걸 싫어하거든요(웃음).”
그가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놓은 건 뜻밖에도 체중감량이나 열악한 촬영조건이 아닌 연기. 화려한 배경이나 새로운 등장인물 없이 온통 하얗기만 한 설원에서 여섯 명의 배우가 두 시간 내내 스크린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 내내 관객들을 긴장시킬 수 있는 밀도 있는 연기가 이 영화의 생명이었어요. 그래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배우끼리 3박4일 동안 합숙을 하면서 대본연습까지 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산악그랜드슬램(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 세계 3극점을 모두 등반하는 일)을 달성한 박영석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탐험대장으로서의 고독과 도전정신을 이해하고 이를 연기로 표현하려 했다는 송강호는 죽음보다 깊은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는 캐릭터에서 방금 빠져나온 배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과 실없어 보이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저는 일상에서 캐릭터의 잔상에 빠지는 일도 없어요. ‘복수는 나의 것’도 웃고 떠들면서 얼마나 즐겁게 찍었는데요. 전 현실주의자예요. 저 스스로 삶의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배우를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할 겁니다.”
그 말을 들으며 캐릭터와의 사이에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바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송강호식 카리스마’의 비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03년 이후 그는 최민식, 설경구와 함께 남자배우 트로이카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최민식, 설경구와는 두루두루 친한 사이인데 특히 동갑인 설경구와는 10년 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할 때부터 끈끈한 관계였다고 한다.
“제가 ‘비언소’를 하고, 경구는 ‘지하철 1호선’을 했어요. 서로 극단이 달랐는데도 밤만 되면 소주집에서 꼭 만나게 되더라고요.”
7년여 동안 연극배우로 생활하고 영화 조·단역 시절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 그는 집에선 ‘천원 아빠’로 통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에게 일주일 용돈으로 1천원씩 주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6백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최근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조금 부족한 듯이 키워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무명 시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고 각박해 연애도 참 재미없게 하고 신혼여행조차 못 갔다는 그는 어떤 남편이냐는 질문에 “전형적인 경상도 남편”이라고 대답한다.
“무뚝뚝의 화신이죠. 표현 못하는 0점짜리 남편입니다. 그래서 촬영 끝내고 쉴 땐 가족들과 낚시를 다니며 밀린 숙제를 좀 합니다.”
영화가 개봉했으니 이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자 앞으로 한 달 동안 영화 홍보 스케줄이 꽉 차 있고, 그 다음엔 곧바로 다음 작품인 ‘괴물’ 촬영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이것도 뉴질랜드에서 5개월 정도 현지 촬영을 할 예정이라고.
“가족들에겐 늘 미안하죠. ‘괴물’ 촬영이 끝나는 11월이 결혼 10주년인데 그때 가족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요.”
그의 영화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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