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나마 자일을 끊고 혼자 살 생각을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박정헌씨.
히말라야 산맥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쪽 17km 지점에 있는 촐라체봉(Cholatse·6440m).
국내 최정상급 ‘거벽(巨壁) 등반가’ 박정헌씨(34)와 고향 경남 진주 후배인 산악인 최강식씨(25·경상대 3년)가 3백65일 햇빛 한줌 들지 않는 북벽 얼음기둥을 등정한 기쁨은 불과 4시간 30분 만에 지옥 같은 고통으로 변했다.
현지시각으로 1월16일 오후 4시쯤. 정상에서 1100m쯤 내려온 해발 5300m 지점에서 후배 최씨가 갑자기 눈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썩은 얼음’(녹은 얼음을 뜻하는 등산용어) 사이로 입을 벌리고 있던 깊이 50m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등반 전문가로서 발을 헛디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급경사에서 내려와 헬멧과 스크루 등 장비를 풀고, 서로를 연결한 자일만 남긴 상태였다.
얼음벽에 최씨의 온몸이 부딪혔다. 1초나 지났을까? 길이 25m 자일이 팽팽하게 펴졌다. 지름 1.5m 크기로 하늘이 몽롱하게 보였다. 호리병 같은 구멍이었다. 크레바스 20여m 밑에서 시체처럼 매달려 멍하게 5분….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꼭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치밀어 올랐다.
크레바스 밖. 앞서 가던 선배는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몰아친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의 하중(몸무게 75kg)에 못 이겨 크레바스를 향해 끌려가던 선배(몸무게 71kg)는 경사면에 충돌해 왼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정신을 수습했을 때 후배의 생명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자일의 옥죄임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이 밀려들었다. ‘자일을 잘라 나라도 살 것인가?’ ‘꼭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크레바스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말라야에서 다리를 못 쓰는 동료 산악인과 함께 있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같았다. 침묵이 흘렀다.
“형님, 살려주이소~.”
크레바스 안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후배의 투박한 절규가 울려퍼졌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레바스를 2m 앞둔 경사면에서 벌떡 일어선 선배는 남은 힘을 열 손가락에 쏟아부어 자일을 움켜쥐었다. 후배는 감각이 사라진 다리로 필사적으로 자일에 매달렸다. 배낭 속 등강기(올라갈 때 이용하는 등반장비)를 이용해 한뼘 한뼘 크레바스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박씨의 부러진 갈비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온몸에 고통을 전했다.
그런 사투의 구조작업 1시간. 햇빛이 비치는 크레바스 바깥으로 후배 최씨의 머리가 나타났다.
“살았다!”
내내 말이 없던 선배 박씨는 후배의 몸을 바깥으로 끌어낸 뒤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강추위 속에서 만신창이 된 몸으로 얼음 깨서 먹으며 기다시피 해 하산
박씨는 1989년 초오유(8201m) 남동벽을 필두로, 남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남벽 등 8000m급 7곳을 등정했다. 그는 비교적 쉬운 등반로인 ‘노멀 루트’보다는 험한 등로로 오르기를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92년 고산 등반가들 사이에 ‘죽음의 산’으로 불리는 K2(8611m)를 산소통 없이 올라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 기록을 세웠다. 고향 후배인 최강식씨와는 2002년 인도 가로왈 히말라야를 함께 등반했다.
정상에 오르기 전 해발 4800m 베이스캠프에서 찍은 사진.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남미 안데스산맥 시울라 그란데 서벽에서 다리가 부러진 친구를 돌보다 끝내 자일을 자르고 마는 내용의 이 실화소설은 세계 산악인들에게 ‘고전 중의 고전’으로 통한다. 두 사람 모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린 ‘최후의 선택’, 너무나 가슴 아픈 결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헌씨는 자일을 끊지 않고 ‘사지’ 크레바스에서 후배를 구해냈다. 하지만 죽음과의 사투는 이제부터였다.
지옥 같은 크레바스를 빠져나왔지만 영하 15°가 넘는 살을 찢는 살인적인 추위에 1시간 동안의 사투가 끝났을 때는 두 사람 모두 한 발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천근만근의 무게에 호흡조차 곤란한 상황이었다.
후배의 두 발목은 퉁퉁 부어올랐고, 선배는 숨을 몰아쉴 때마다 왼쪽 가슴을 칼로 찢는 고통을 느꼈다. 5시간 거리의 베이스캠프를 앞두고 두 사람은 자신들이 등정했던 눈 덮인 촐라체봉을 쳐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자. 살아서 돌아가자.”
선배가 후배를 부축했다. 하지만 내 한몸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금세 한계상황에 도달했다. 선배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배는 엉덩이로 기어갔다. 양손으로 바위를 짚은 채 엉덩이를 옮겨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날 밤, 두 사람은 강추위 속에서 텐트 없이 밤을 지새워야 했다.
“미안해, 혀~엉.”
후배 최씨는 선배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괘안타, 그럴 수도 있다.”
선배도 하늘만 바라봤다. 후배는 크레바스에 빠진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선배 또한 잠시나마 줄을 끊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게 죄스러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두려움뿐이었다. ‘과연 살아서 이 산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1월17일 아침. 선배 박씨는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안경을 잃어버려 온통 시야가 흐렸다. 시력이 마이너스 0.3. 안경 없이는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던 중 70~80도의 급경사가 나타났다. 눈 벽에 피켈(얼음송곳)을 찍으며 내려왔다. 한발, 한발…. 마지막 발을 내딛는 순간 얕게 박힌 피켈 하나가 튕겨져 박씨의 이마를 깊게 긁고 지나갔다. 터져나온 붉은 피가 흰 눈 위에 잉크처럼 뿌려졌다. 얼굴엔 5cm 길이의 상처가 새겨졌다. 한없이 약해지는 마음을 ‘포기하지 말자’ ‘포기하면 죽는다’ 하며 다잡았다. 두 사람은 배낭을 버렸다. 몸뚱이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의식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사흘째 물을 마시지 못해 입이 탔다. 등정하기 전날부터 영하의 날씨로 물통이 꽝꽝 얼어버린 탓이었다. 박씨는 얼음을 피켈로 찍어서 마구 삼켰고 후배도 같이 얼음 빙수를 만들어 마셨다. 두 사람의 입 안은 거친 얼음조각에 다 헐어 버렸다. 잇몸에서 피가 나왔다.
동상 후유증으로 손가락 8개 절단한 박정헌씨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새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토해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씨는 “비명을 들으며 서로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회상했다. 이튿날 아침. 후배 최씨가 꼼짝하지 못했다. 발에 피가 공급되지 않아 물먹은 솜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형님! 먼저 가십시오. 저는 힘듭니다.”
가장 가까운 인가도 수백 미터를 더 가야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최강식씨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절단해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거부하고 있다.
망설이던 박씨는 “내가 마을 사람을 불러 곧 너를 데리러 오겠다”며 등을 돌렸다. 몇 발자국 못 가 눈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박씨의 걸음이 빨라졌다. 3시간쯤 걸었을 때 오두막 두 채가 나타났다. 벌써 눈은 발목 깊이로 쌓여 있었다. 달려가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다. 호주머니 속 피켈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마른 장작만 천장까지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 지금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 밤이 지나면 후배, 강식이의 삶의 희망은 사라진다. ‘그 녀석 부모를 무슨 낯으로 보나.’ 후배가 크레바스로 빠져들었을 때의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박씨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물어지는 몸을 이겨낼 수 없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삐~그덕.’ 문 열리는 소리에 박씨가 벌떡 일어났다. 시커먼 그림자가 성큼 들어왔다. 후배였다. “강식아!” 후배 최씨가 눈 위에 찍힌 선배의 발자국을 따라 필사적으로 오두막까지 온 것이다.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선배가 “잘 왔다, 이 자식아. 진짜 잘 왔다. 걱정돼서 죽을 뻔했다”고 소리쳤다. 후배는 “눈이 쏟아지는데,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따라왔다”며 웃어 보였다. 그뿐이었다.
이날 두 사람은 나흘 만에 처음 목으로 음식물을 넘겼다. 오두막에 남아 있던 꿀과 말라 비틀어진 초콜릿 조각을 녹여 배를 채웠다. 쌓인 장작으로 불도 쬐었다. 2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이들이 마을 사람을 만난 것은 1월19일 오전. ‘헬기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베이스캠프에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틀 뒤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왔다. ‘이제 살았구나!’ 하지만 손과 발은 온통 동상에 걸려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지난 2월15일 서울 경희의료원 2508호실. 선배 박씨는 양손과 양발에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었다. 동상 후유증 때문이었다. 그는 2월18일 양손 엄지를 제외한 손가락 8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크레바스 위에서 후배의 자일을 쥔 손가락이다. 후배를 살린 대신 산악인으로서의 생명을 잃은 것이다. 이날 박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농담을 했다.
“지난 20년 동안 마음껏 산 타면서 손가락을 잘 썼으니, 이제 돌려줘야 하나 보다. 하늘나라에서 원정 갈 일이 있겠나?(웃음)”
곁에서 동갑내기 부인 정정엽씨(34)가 “손가락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난 당신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눈을 흘겼다. 무뚝뚝한 말투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후배 최씨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잘라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고향 진주로 내려가 경상대 병원에서 손가락, 발가락이 썩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받고 있다. 후배는 선배에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고맙다”며 마음속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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