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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계 이슈

국내 첫 아내 강제성추행 유죄 판결 계기로 살펴본 ‘부부 강간’ 실태

“성관계가 애정표현이 아닌 폭력의 도구로 사용될 땐 부부강간으로 인정”

■ 글·최호열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4. 10. 04

폭력, 협박과 함께 아내를 강제로 성추행한 남편에 대해 법원에서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아내가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남편에 의해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것이 강간이냐 아니냐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사회적 파문을 일으킨 아내 성추행사건의 전모와 부부강간의 실태 및 법규 제정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국내 첫 아내 강제성추행 유죄 판결 계기로 살펴본 ‘부부 강간’ 실태

지난 8월20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역사적인 판결이 내려졌다. 성관계를 거부한 아내 박모씨(40)를 폭력적으로 강제추행하고 상처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남편 김모씨(46)에 대해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의 실형을 선고한 것. 강간보다 범죄 수위가 낮은 강제성추행에 대해 유죄가 선고됨으로써 ‘부부강간(부부 사이에 강간을 죄로 인정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종지부를 찍게 된 셈이다.
박씨의 변론을 맡은 이명숙 변호사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 2002년 9월. 중학교 교사인 박씨는 건설회사에 다니는 김씨와 15년 전 결혼해 자녀 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 김씨가 직장을 자주 옮기고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한다. 김씨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잠자리에서 김씨를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박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일 강간하다시피 성관계를 했다고 해요. 또한 음모를 면도하고, 한 달에 2~3차례 이상 항문섹스를 하는 등 너무하다 싶을 만큼 변태적으로 성적 괴롭힘을 지속적으로 당했다고 하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성적 괴롭힘의 강도가 강해지자 참다못한 박씨가 2002년 6월부터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더욱 심하게 밤마다 강간하듯 강제로 부부관계를 가졌다고. 그러다 9월17일, 술을 마신 김씨가 딸 방에서 자고 있던 박씨를 강제로 안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기고 두 시간 동안 말 못할 정도로 성적 괴롭힘을 가했다고 한다.
“박씨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박씨가 실신상태가 되니까 그제야 그만두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한 시간 뒤 다시 칼을 들이대고 옷을 강제로 벗겨 성관계를 했다고 해요. 이로 인해 출혈까지 생겼고요.”
밤새 뜬눈으로 고민을 한 끝에 박씨는 진단서를 끊어 이혼소송과 함께 강간 및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남편을 형사고소했다. 하지만 아내강간으로 남편을 기소한 전례가 없던 검찰로서는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70년 대법원에서 아내강간을 인정하지 않은 판례까지 있어 승소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년 넘게 고민을 한 검찰은 지난 2월, 결국 강간 부분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강제추행치상 등의 혐의로 남편을 기소했다.
“안타까운 부분이 박씨가 진단서를 끊기 위해 성폭력진단전문병원에 갔는데, 분명히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음에도 병원에서 정액채취를 하지 않는 어이없는 실수를 한 거예요. 결정적 증거가 없으니까 남편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잡아떼고, 검찰도 남편의 말을 믿어준 거죠. 강제추행치상 부분은 진단서가 있으니까 기소를 한 것이고요.”
김씨는 처음엔 모든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재판부(최완주 부장판사)에서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해 심리를 한 결과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 실형이 선고되었다. 김씨는 항소를 포기해 아내 강제추행치상은 유죄로 확정되었다.
부부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 확인돼
이번 판결은 부부 사이에서 일어난 강간을 포함한 강제성추행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를 인정한 판결이다. 물론 형법 297조에 의하면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를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아내는 예외’라는 단서 조항이 없기 때문에 법리상으로는 부부강간에 대해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70년 대법원에서 “부부 사이에는 혼인을 통하여 서로간에 성교를 승낙하였으므로 아내강간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린 후 지금까지 부부강간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례를 34년 만에 바꾼 이번 판결에 대해 이명숙 변호사는 “강제추행이 인정된다면 당연히 아내강간도 인정이 되는 것”이라며 “부부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고 이번 판결의 의의를 설명했다.

국내 첫 아내 강제성추행 유죄 판결 계기로 살펴본 ‘부부 강간’ 실태

지난 8월20일 법원에서는 처음으로 아내를 폭력적으로 성추행한 남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렸다.


판결을 한 최완주 부장판사도 “혼인은 부부가 서로 성적 요구에 응한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고,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성적 자기결정권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배우자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할 권리는 없다. 강제할 경우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여성계에서는 부부강간에 대한 관련 법규를 제정할 움직임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2001년 여성부가 가정폭력방지법의 개정안에 ‘부부간 강간죄’ 신설을 추진하려 했으나 법조계의 반발과 전통적인 부부간의 신뢰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는 여론에 밀려 포기한 바 있다.
하지만 여성계 내부에서도 아직까지 어느 수위까지를 부부강간으로 규정해 처벌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다. 별거 또는 이혼소송 중인 아내를 강제로 성관계할 경우 강간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부터 폭행과 협박을 동반한 강압적 성관계를 처벌하자는 입장, 배우자가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한 것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 등 다양하다.
이명숙 변호사는 “부부강간의 구체적인 기준에 대해선 사건별로 기술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준은 다른 강간사건보다 상당히 엄격한 잣대가 제시될 것”이라고 했다.
“보통사람들 누구나 ‘너무했다’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심각한 경우에 부부강간으로 인정을 받겠죠. 예를 들어 길을 가는데 모르는 사람이 옷 속에 손을 집어넣으면 그건 누가 봐도 강제추행이지만 아내가 원하지 않는데 남편이 아내 옷 속에 손을 넣었다고 강제추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부인이 싫다는데 손목 끌어당겨 성관계하는 정도로 아내가 남편을 고소하지는 않을 거예요. 대부분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니까 고소를 하지 별거 아닌 걸로 고소를 하지는 않겠죠.”
가정법률상담소 강정일 상담위원도 “부부간에 동의 없는 성관계를 모두 부부간 강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최소한 폭력을 동원한 부부싸움 후 남편이 억압적 분위기에서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 정도는 강간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여성단체에서 운영하는 쉼터를 찾아오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30% 이상이 남편에게 폭행 당한 후 강간을 당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이런 고통을 받는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쉼터에서 만난 김소희씨(가명·39)도 91년 결혼 후 끊임없이 남편의 폭력과 성폭행에 시달려온 케이스다. 남편은 평소 야한 비디오를 빌려와 김씨에게 변태적 성행위를 요구했고, 폭행을 한 후에는 상처의 정도에 상관없이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한다. 심지어 말대꾸를 한다고 몽둥이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해 다리와 입술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성관계를 요구했다고. 상처로 인한 통증 때문에 잠자리를 거부하면 협박을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한 후 욕구를 채우는가 하면, 성행위가 끝난 후에는 “몸이 평소와 다르다”며 “누구와 외도를 했느냐”고 따지는 등 폭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느낌이었다. 오럴섹스를 강요받을 때면 남편의 성기를 이빨로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에게 맞지 않기 위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최은숙씨(가명·36)는 남편으로부터 수년 동안 항문섹스를 강요당해 괄약근이 늘어나 대변이 샐 정도로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병원에서 “앞으로 평생 기저귀를 차고 생활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 정도로 심한 변태적인 행위를 남편으로부터 강요당했지만 거부하면 돌아오는 폭력과 폭언이 무서워 참아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국내 첫 아내 강제성추행 유죄 판결 계기로 살펴본 ‘부부 강간’ 실태

남편의 폭력을 피해 쉼터에 온 여성 중 30% 이상이 폭력 후 강압적인 성관계를 요구받았다고 한다.


이명숙 변호사는 “부부강간은 단순히 강압적으로 섹스를 했다는 그 자체보다는 구타와 폭력이 전제가 된다는 데 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관계도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폭력의 수단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위원은 “이혼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부부강간만 인정하자는 것은 가정을 보호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심각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부부강간의 규정을 확대해 이혼까지 가지 않고도 남편의 잘못된 생각을 미리 깨우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벼운 부부강간의 경우 사회교육 등을 통해 충분히 교정이 가능하다는 것.
일반 강간보다 부부강간은 더 심각한 고통과 후유증 안겨줘
여성계에서는 부부강간이 낯선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일반 강간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일반 강간은 일회성이지만 부부강간은 일상에서 은밀하게 반복되기 때문에 훨씬 더 심각한 고통을 안겨준다는 것. 그래서 피해 여성들은 대부분 정신질환을 앓는다고 한다.
쉼터에서 만난 김씨는 폭력의 후유증으로 수면장애·가려움증·관절통을 앓고 있고, 차 소리가 나면 남편 차일까봐 깜짝깜짝 놀란다고 했다. 또한 불안감과 세상에 나 혼자라는 고립감에 휩싸여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 충격, 강한 두려움으로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며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
더 큰 문제는 피해 여성들이 고통을 외부에 말도 못하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떨다 마침내 남편을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데 있다. 95년엔 결혼 18년 동안 알코올중독에 걸린 남편의 가학적인 성 행위와 폭력을 견디다 못한 아내가 전깃줄로 남편의 목을 졸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는가 하면 2000년엔 이혼소송 중 남편이 찾아와 주방용 가위로 위협하며 강제로 성관계를 하려고 하자 칼로 찔러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명숙 변호사는 “이번 판결을 놓고 남자들이 농담처럼 ‘이제 앞으로 성관계를 할 때 아내 허락을 받고 해야 하겠네’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그 말엔 비록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기도 아내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성관계를 한 적이 있다는 뜻이 들어 있다. 아내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번 판결을 계기로 배우자도 인격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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