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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가슴아픈 사연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 떠난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 ■ 사진·박해윤, 홍중식 기자

2004. 09. 10

지난 7월22일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MBC 정은임 아나운서가 8월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정은임의 영화음악’과 ‘출발! 비디오여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담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 떠난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

“제발 살아주세요. 라디오 안 하셔도 되니까 제발 가지 말고 살아만 주세요.” 팬들의 간절한 염원을 뒤로한 채 결국 정은임 아나운서(36)가 우리 곁을 떠났다. MBC FM 라디오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진행하면서 많은 청취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지 14일 만인 8월4일 오후 6시30분경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교통사고가 난 것은 7월22일 오후 2시40분경, 방송사로 출근하던 길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한강대교 남단 흑석동 삼거리에서 갑자기 차로를 바꾸다가(혹은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중앙선을 넘었고, 마주 오던 스타렉스 자동차와 정면충돌하면서 차량이 전복됐다고 한다. 그가 왜 갑자기 중앙선을 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인근 주민은 “사고 지점 앞에 골목이 있는데, 그곳에서 종종 차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접촉사고가 많았다. 정은임 아나운서 역시 갑자기 튀어나온 차를 피하다 그렇게 된 것 같다”고 추측했다.
사고 후 혼수상태로 여의도 성모병원에 실려간 그는 4시간여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신경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수술을 집도한 나형균 교수는 “뇌가 많이 부어 있고, 손상도 심하다. 1주일 정도 지켜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가족과 동료, 팬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가 회복하리라 믿고 기다렸다. 남편 조종수씨(38)와 가족들은 24시간 내내 그가 누워 있는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었고, 팬클럽 회원들과 동료 아나운서들도 수시로 병원을 찾았다. 특히 92년 입사 동기인 김지은 아나운서는 저녁 면회시간마다 거의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을 정도. 하지만 그는 결국 뇌부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하고말았다.
삼성서울병원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를 찾았을 때 유가족들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며 비통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빈소 앞에 앉아 아내의 영정을 응시하는 남편 조씨의 눈엔 눈물마저 말라 있어 보는 사람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그의 속울음을 하늘이 대신하는 것일까, 장대비가 쏟아졌다.
정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있던 MBC 아나운서실의 슬픔 또한 컸다. 8월4일 밤 MBC 이윤철 아나운서 국장을 비롯해 김주하, 이재용, 홍은철 등 동료 아나운서들이 속속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씨와 ‘출발! 비디오여행’을 1년간 함께 진행했던 홍은철 아나운서는 “그래도 희망을 갖고 기다렸는데 믿어지지 않는다”며 한숨을 지었다.
“그렇게 열정적인 아나운서는 없을 거예요. 그 작은 체구의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나오는지, 참 의아할 정도였죠. 아이한테도 참 잘했는데…. 영정사진을 고르려고 정 아나운서의 컴퓨터를 뒤졌더니 아들 사진만 잔뜩 있더라고요. 그만큼 아이에게 끔찍했죠.”
정씨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아들 성빈이(5)는 아직 엄마의 죽음을 모르고 있다. 정씨의 시어머니는 아이가 충격을 받을까봐 아직 말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지금 큰집에 있어요. 사촌들과 놀면서도 계속 엄마를 찾아요. 여행 가야 하는데 엄마는 왜 안 오냐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보면 가슴이 미어져요. 비행기표 끊어놓고 짐 다 싸놓고 여행 가자던 엄마가 오지 않으니까 제 깐에는 얼마나 엄마가 원망스럽겠어요.”
예정대로라면 정씨는 사고가 난 7월22일 오후에 출근해 숙직을 한 후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면 바로 남편, 아들과 함께 괌으로 휴가를 떠날 참이었다. 그래서 미리 짐도 다 싸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못 쓰게 된 비행기표와 풀지 않은 여행 가방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 떠난 고 정은임 MBC 아나운서

고인의 장례식은 최윤영 김성주 김주하 등 동료 아나운서들과 남편(왼쪽 아래), 아들과 친족들의 애도 속에 치러졌다.


장례식은 8월6일 오전 9시30분부터 여의도 MBC 사옥에서 치러졌다. 식이 시작되기 10분 전쯤 이모들의 손을 잡고 정씨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는 막내 이모 무릎 위에 앉아서 영문도 모른 채 자신에게 몰려드는 카메라 세례를 감당하고 있었다.
장례식 중에 고인이 생전에 ‘영화음악’을 진행할 때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를 듣던 동료 아나운서들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남편 조씨도 고개를 숙인 채 슬픔을 삭였다. 뒤이어 조사 낭독에 나선 김지은 아나운서는 고인을 “강철보다 강하고 때로는 여리고 순수한 언니였다”고 회고했다.
“언니, 같이 놀러 가야 할 엄마가 안 오니까 성빈이는 지금 엄마가 나쁜 공룡들과 싸우고 있는 줄 알아요. 왜 엄마 혼자 나쁜 공룡들과 싸워야 하냐고, 같이 싸우면 안 되냐고 물어요. 언니, 그러고 보니 우리 살면서 참 많이 싸워왔다. 물처럼 살 수 없다고, 역류를 탈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그가 조사를 낭독하면서 성빈이 이야기를 꺼내자 울음소리가 더욱 잦아지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옆에 있는 사촌들과 장난을 치며 웃기까지 해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헌화를 마지막으로 장례식이 끝난 후, 그의 시신은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오랫동안 몸담았던 여의도 MBC 사옥을 떠났다. 그리고 경기도 성남 화장장에서 화장을 한 후 경기도 대성리 공원묘에 안치됐다.
한편, 그가 사고를 당한 직후부터 그의 팬카페(cafe.daum.net/wjddmsdla)와 미니 홈피(cyworld.com /bastian2004)에는 쾌유를 기원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는데,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에는 더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추모 글을 남겼다.
이들은 대부분 92년 11월부터 95년 4월까지 정씨가 진행한 ‘정은임의 영화음악’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이다. 당시 그는 영화의 이면에 숨은 현실 비판적 메시지들을 감미로운 영화음악과 함께 들려줘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오프닝 멘트에서 강제철거, 노사분규 등 사회 문제에 대해 자주 언급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빈소에서 만난 연극배우 오지혜는 “공중파에서 사회문제에 대해 그렇게 진보적인 멘트를 한다는 건 목을 내걸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며 “아이에게 엄마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꼭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사회문제에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흔하지 않은 아나운서였던 그는 방송에서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피지 못하고 무성한 연기만 내는 군불이 아니었나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동료와 팬들을 통해서 그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지펴준 ‘참불’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보냈던 따뜻한 마음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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