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헤어지는 부부들이 많은데 참 안타까워요. 저희도 그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함께 살 집이 없어서 긴 시간을 헤어져 살기도 했어요. 저는 그나마 노래가 있어서 각박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지만 일반인들은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부부들이 모여 고된 삶을 하소연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지난해말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부부의 날’(5월21일) 공식 홍보대사로 임명된 가수 김종환(38). 홍보대사로 임명된 소감을 묻자 그는 부인 김금숙씨(40)의 손을 꼭 잡고 “다른 부부들이 힘들어할 때 버팀목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우연한 기회에 부부의 날 홍보대사가 되었다. 부부의 화목을 도모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자는 취지로 결성된 ‘부부의 날 위원회’ 서울지부 권재도 목사가 올봄 TV 토크쇼에 출연한 두 사람을 보고 연락을 해 온 것. 권목사는 가난한 음악다방 DJ였던 김종환과 두 살 연상의 김금숙씨가 동거생활 15년 만에 지각 결혼하기까지의 사연이 ‘참을 수 없는 시련은 주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을 듣는 듯했다고 한다. 김종환 역시 아내와 함께한 지난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너무도 소중해 ‘부부사랑 회복운동’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음악다방 DJ와 두 살 연상의 여대생으로 만나 부모 허락 없이 동거 시작
2000년 4월27일 오후 1시. 김종환 김금숙 부부는 이날을 잊지 못한다. 동거 15년 만에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날이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안 하고 사는 동안에도 사실 섭섭한 건 없었어요. 그런데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니까 새삼 ‘내가 정말 종환씨의 아내가 되었구나’ 하는 감격이 밀려와 막 눈물이 났어요.”
김종환·김금숙 부부는 아무리 힘들어도 부부가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은 있다고 말했다.
너무도 행복해서 눈물을 흘린 건 아내 김금숙씨 만이 아니었다. 김종환도 이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날이 있기까지 두 사람이 헤쳐 나가야 했던 수많은 시련들이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생이던 김종환은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밤마다 통기타 음악살롱에서 노래를 불렀고, 음악살롱에 가기 전 음악 감상실에 들러 아르바이트로 DJ를 했다. 김종환이 음악감상실에서 DJ를 한 건 학비를 벌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원하는 음악을 맘껏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한 여학생이 매일같이 찾아와 음악을 신청했는데 ‘스탠바이 유어 맨’ ‘슬로울리’ ‘마이걸’ 등 한결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들이었다고 한다.
“깨알같은 글씨로 음악을 신청하는데 너무 좋은 노래들이라 눈여겨봤죠. 1주일 동안 매일 찾아오기에 유심히 지켜보다 친구에게 다리를 좀 놓아 달라고 부탁해 결국 다른 음악 감상실에서 만날 수 있었어요.”
“종환씨는 다른 DJ와 달랐어요. 대개 DJ들이 별로 점잖아 보이지 않는데 종환씨는 상큼하면서도 푸근했죠. 시골 소년같은 순수함을 가진 청년이 유리상자 안에 앉아 있는데 뭔가 달라 보였어요. 감상실에 없는 노래를 신청하면 청계천에서 음반을 직접 구해 틀어줄 정도로 성실했어요.”
당시 김종환은 대학 1학년생이었고 그녀는 두 살 연상의 3학년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종환은 오히려 음악적 지식이 풍부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데이트 시간이 늘 짧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만날수록 서로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던 두 사람은 결국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다.
김종환이 가난했던 과거를 회상하자 부인 김금숙씨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김금숙씨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곱게 기른 딸을 가수가 꿈이라는, 장래가 불투명한 사람과 결혼시킬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했다. 김종환은 그런 반대가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부모라도 가진 건 통기타와 젊음뿐인 남자에게 선뜻 딸을 내줄 수 없을 것이라며 이해했다. 하지만 불타는 열정을 잠재우지 못한 두 사람은 결국 84년 동거를 시작했다.
비록 보증금 3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단칸방에서 냄비 하나, 숟가락 두개, 이불 한 채가 살림살이의 전부인 신혼 생활이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이 두 사람의 애정을 질투라도 하는 듯 동거를 시작한 뒤로 계속해서 시련이 닥쳤다. 가장 먼저 찾아온 슬픔은 김종환의 어머니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어머니를 제 오토바이에 태워드린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제 등에 기대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자가용을 태워줄 수 있겠니?’ 하고 물으셨어요.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지요’ 하고 대답했는데 끝내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드리지 못했어요.”
아내 병원비 마련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냉골에서 지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는 아내였다. 아내를 믿고 의지하며 열심히 일해 한푼 두푼 모으기 시작한 그는 통기타 가수만 해서는 변변한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렵다는 판단에 신발장사, 야채장사, 포장마차 등 안 해 본 장사가 없었다. 부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비 가릴 집 한 채 마련하고, 아내에게 근사한 면사포를 씌워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91년, 마침내 인천에 작은 빌라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다리를 펴고 사나보다 했는데 그만 보증 섰던 게 잘못돼 어렵게 마련한 집이 경매로 넘어갔다.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두 사람은 다시 원점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런데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내가 병석에 누워 버린 것이다.
“집주인 아주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얼굴이 노랗게 돼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는데 간암이었어요. 그런데 얼마 후 아내의 얼굴도 은행잎처럼 노랗게 변하길래 병원에 갔더니 급성간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증세가 한꺼번에 나타나 앞으로 어찌될지 장담하지 못하겠다고 했어요. 덜컥 겁이나 밤낮없이 일을 했어요. 1주일 단위로 계산되어 나오는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정말 피 말리는 생활을 했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담당 의사를 찾아가 사정했죠. 지금은 무명 가수에 불과하지만 반드시 성공해서 은혜를 갚겠으니 제발 아내를 살려달라고요.”
진심이 통했는지 담당의사는 남몰래 처방전을 써주며 종로에 가면 큰 약국이 있는데 거기서 싸고 좋은 약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을 해줬다. 의사의 조언을 얻어 병원비를 줄일 수 있었고 다행히 아내는 3개월 후 퇴원을 했다. 그러나 아내가 온전히 건강을 회복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4년 반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지금도 힘든 일을 하면 쉬 피로해지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아내가 퇴원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은 냉골이었다.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김종환은 한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지냈던 것. 아내는 가슴이 찡했지만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이불 뒤집어쓰고 자면 견딜만해. 도저히 안 되겠으면 헤어드라이어로 몸을 덥히면 되고” 하며 웃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아이를 키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한 그 이듬해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2년 뒤 둘째딸을 얻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이들이었지만 수입이 일정치 않은 데다 김금숙씨의 건강마저 좋지 않아 강원도 동해의 외가에 맡기기 일쑤였다. 같은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결국 김금숙씨는 아예 친정집 근처의 빈 농가에 아이들과 지낼 거처를 마련했고, 김종환은 자신이 일하는 업소 근처에서 하숙을 했다. 미사리나 양평 등에서 새벽에 일을 마치고 강원도의 집까지 돌아가려면 교통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내 김금숙씨는 동거생활 15년을 돌이킬 때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애틋해졌고, 마침내 김종환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히트곡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95년 겨울, 진눈깨비가 내리는 새벽이었어요. 일을 끝내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기 전 공중전화로 아내와 긴 통화를 했어요.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네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는 거야.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테니까…’ 하고요. 전화를 끊고 돌아가 만든 노래가 바로 ‘존재의 이유’ 랍니다.”
두 사람은 과거의 시련이 부부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는 힘이 됐다고 말한다.
‘알 수 없는 또 다른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네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네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겠니…’ 하는 가사 구구절절 당시 김종환의 처지와 심경이 배어있다. 그의 또 다른 히트작인 ‘사랑을 위하여’도 비슷한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야간 업소를 끝내고 새벽 4시경 집으로 가다 너무 졸음이 와서 차를 멈추고 깜빡 졸았는데 깨어보니 새벽 하늘이 파랗고, 강가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올라와있더라고요. 잠도 못 자고 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가사가 떠올랐어요.”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로 시작되는 노래 ‘사랑을 위하여’에는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그리움 담아 ‘존재의 이유’ ‘사랑을 위하여’ 등 히트곡 만들어
진솔한 감정이 담긴 곡을 만들기는 했으나 세상에 알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김종환은 음반을 내고 싶었지만 그가 가진 돈이라곤 통장에 들어있는 7백만원이 전부였다. 직접 곡을 만들고 연주도 한다지만, 녹음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는 없었다. 후배의 도움을 얻어 겨우 음반을 한 장 만들기는 했으나 음반제작자들은 한결같이 노래가 너무 느려 유행에 맞지 않는다며 음반 제작을 거부했다. 눈앞이 캄캄해진 그는 결국 자신의 곡을 CD 7장에 복사해 동대문시장으로 달려갔다. 음악다방 DJ 생활을 10년간 했던 그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의 음악을 틀면 승산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대문 시장에 있는 음악다방 DJ들에게 CD를 건넨 뒤에도 매일 귤 1개와 음료 1병을 사들고 찾아가 노래를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다 그만 몸살이 나서 앓아 눕고 말았다. 이런 걸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 매일같이 찾아오던 그가 나타나지 않자 음악다방 DJ들은 그의 안부가 궁금해져 호기심에 그의 CD를 틀었다. 그렇게 빛을 보게 된 그의 음악은 동대문 상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금세 입 소문이 났다.
“며칠동안 집에 앓아 누워있는데 호출기에 잘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혀 있었어요. 전화를 해보니 동대문 시장이라며 제 노래가 뜨고 있다는 거예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자리를 털고 동대문 시장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더니 정말 귀에 익은 제 노래가 흘러나오더군요. 순간 다리에 힘이 쫙 풀려 쓰러질 것 같았어요.”
그의 노래 ‘존재의 이유’는 그후 KBS 드라마 ‘첫사랑’의 배경음악으로 삽입돼 큰 인기를 얻었다. 김종환은 마침내 무명의 설움을 벗을 수 있었고, 온가족이 함께 모여 살 집도 마련했다. 그리고 그토록 원하던 결혼식도 올렸다. 그에게 동대문시장은 설움과 기쁨이 공존하는 추억의 장소다.
“사람이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면 당장은 힘들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지만, 지나고 나면 그 시련이 큰 힘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앞으로 험난한 일에 부딪혀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거죠.”
긴 세월 힘겨운 시간을 견뎌왔기에 두 사람은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도와주고 싶다고 한다. 2002년 9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부부 12쌍의 무료 결혼식을 올려준 것도 자신들의 과거를 보는 듯한 마음 때문이었다. 얼마 전엔 시애틀의 한 한인학교가 재정난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자선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김종환은 앞으로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건 물론 부부사랑 회복운동에 적극 동참할 계획이다.
“지난해 12월 국회본회의에서 5월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했지만 아직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달력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고, 홍보가 잘 안 돼서 ‘부부의 날’이 있다는 것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때문에 ‘부부의 날’ 홍보대사로 임명된 그는 가장 먼저 부부의 날 주제곡을 만들었다. ‘둘이 하나 되어’ 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앞으로 만들 7집에 실을 계획이라고 한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저도 누울 곳이 없어 고민하고, 미래가 불투명해 어깨가 축 처져 우울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되는 일이 없다며 숱하게 불평하기도 했죠.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은 분명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부부의 끈을 놓지 않았던 김종환 김금숙 부부. 두 사람은 어느새 세월이 훌쩍 흘러 큰딸이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며 ‘허허’ 웃었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