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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출혈로 쓰러진 후 3개월째 의식없는 탤런트 김흥기 부인 엄신순 안타까운 심경

■ 글·김순희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4. 05. 10

날마다 얼굴 부딪히며 사는 부부는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망각한 채 살아간다.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이 말없이 누워 있기를 3개월째. 김흥기의 부인 엄신순씨는 의식없는 남편의 말 한마디가 그리울 뿐이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3개월째 의식없는 탤런트 김흥기 부인 엄신순 안타까운 심경

탤런트 김흥기(57)의 아내 엄신순씨는 하루에 두 번 남편을 만난다. 엄씨가 하루에 남편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오전·오후 각각 20분씩 고작 40분. 하지만 엄씨가 건네는 말에 김흥기는 두 달이 넘도록 대답을 하기는 커녕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다. 지난 1월30일 연극 ‘에쿠우스’ 공연을 마치고 분장실에 들어서다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부터다.
발병 직후 서울 행당동 한양대병원 외과 중환자실로 이송돼 수술을 받은 그는 지난 3월 초 경기도 고양시 일산병원 외과집중치료실(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4월13일 오전 일산병원 외과집중치료실 앞. 보호자 대기석에 앉아 있던 엄씨는 환자 면회시간이 다가오자 시계를 자주 쳐다봤다. 단아한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엄씨는 면회시간이 되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먼저 중환자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말없이 누워 있는 남편의 얼굴을 만지고 손을 어루만지면서 마치 대화하듯이 많은 얘기를 하더라고요. 가족들의 일상을 남편에게 매일매일 전해주는 것 같았어요. 어깨를 주무르기도 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기도 하고. 딸하고 같이 오는 날이 많은데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참 안됐어요.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부 사이에 흐르는 깊은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달되는 느낌이었어요.”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시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열흘 남짓 이 병원의 중환자실에 드나들면서 엄씨를 곁에서 지켜봤다는 양승옥씨의 말이다.
김흥기는 한양대병원에서 1차 수술을 받은 이후 인공호흡기는 떼었지만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못한 상태. 남편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면회객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의 문을 열고 나온 엄씨는 “이 병원(일산병원)에서 뇌에 물을 빼는 2차 수술을 받았는데…” 하며 말끝을 흐렸다. 일산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뇌출혈의 경우 일주일 이내에 의식이 깨어나야 호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데 김흥기씨는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3개월째 의식을 찾지못한 채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한달에 1천여 만원에 가까운 치료비. 그래서 최근 김씨의 아들 김진원씨가 조연출을 맡고 있는 KBS 일일드라마 ‘백만송이 장미’ 출연진이 나섰다.
이에 대해 탤런트 한진희는 “큰 병이 닥치면 누구나 어려운 법이다. 연예인들이 많은 돈을 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젊은 연예인 중 일부는 큰 돈을 벌지 몰라도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은 그렇지 않다”면서 “김흥기 선배도 잘 나가는 연예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엄청난 치료비를 대기에 턱없이 부족할 것이다. 후배 연기자들이 선배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에서 십시일반으로 작은 정성을 모았지만 아직 전달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선배였다. 남들은 연출방향이 자신의 의사와 달라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지만 김흥기 선배는 그렇지 않았다”면서 “다른 연기자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에 속했는데 그게 발병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지금이라도 당장 일어나 내 등을 툭 치며 ‘어이, 잠 한번 잘 잤다’고 할 것 같은데…”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소식이 알려진 4월14일 엄씨는 전화통화에서 “(후배 연기자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 분들의 마음은 한없이 고맙고 감사할 뿐이죠. 하지만 아이들 아빠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요. 연예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도 수입이 일정한 직업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모금을 통해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게 쉽지 않아요. 수입이 들쭉날쭉하니 생활이 늘 불안정한 상태지요.”

뇌출혈로 쓰러진 후 3개월째 의식없는 탤런트 김흥기 부인 엄신순 안타까운 심경

뇌출혈로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 ‘에쿠우스’.


그는 남편이 의식이 없는 상태지만 무슨 일이든 상의를 한다고 한다.
“아이들 아빠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에요. 후배들이 도와주는 것을 원치않을 거예요. 몇십 년을 같이 살았으니 내가 이 말을 하면 남편이 뭐라고 대답할지 안 봐도 잘 알잖아요. 남편도 후배들의 사랑은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가족들이 꾸려나가려고 해요.”
엄씨는 조용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편도 그렇게 하기를 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만송이 장미’팀은 개별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상당한 금액을 모았지만 병원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자 전체 출연진이 함께 CF에 출연해 수익금을 김흥기의 가족에게 전달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탤런트 김수미는 “같은 동료로서 너무나 안타깝다”면서 “아픈 사람도 아픈 사람이지만 간병을 하는 가족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고 힘들 텐데 용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4월14일 오후 6시30분. 엄씨는 딸의 손을 꼭 잡은 채 중환자실로 향했다. 모녀에게 인사를 건네자 김흥기의 모습을 쏙 빼닮은 딸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는 듯했다. 딸과 함께 면회를 마친 엄씨는 “수술을 받았지만 다른 병원으로 또 옮겨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연예인은 일반 직장인이나 사업하는 사람들처럼 연금을 들거나 보험 등에 많이 가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돼요. 노후대책을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요. 쓰러지기 전에는 특별히 아픈데도 없이 건강했던 사람이에요.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줄 몰랐죠. 남편이 일어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KBS ‘부부클리닉-사랑과 전쟁’에서 조정위원 역할으로 출연했던 김흥기는 지난해말 서울지방법원 민사조정위원으로 위촉되자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해 마련된 KBS ‘사랑의 리퀘스트’팀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받게 될 조정위원료를 ‘사랑의 리퀘스트’에 기탁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저도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남편이 조정위원료가 입금되는 계좌번호를 아예 ‘사랑의 리퀘스트’ 팀의 것으로 했다고 해요. 쓰러지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계속 (입금)됐을텐데. 적은 금액이지만 두 번 정도 입금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열정적인 연기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김흥기의 휴대전화에서는 그가 쓰러진 이후 “전화기가 꺼져 있어…”라는 딱딱한 기계음이 흘러나온다. 가족과 연예계 선후배,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시청자들은 그가 다시 일어나 수화기 너머에서 “예, 김흥기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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