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부인 김채정씨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에요. 너무나도….”
지난 2월6일. 부산 영락공원에 차려진 고(故) 안상영 부산시장의 빈소를 지키고 있는 부인 김채정씨(65)가 눈물을 떨궜다. 곁에 앉은 아들 정훈씨(30)가 어머니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내 남편이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도 정말로 아까운 사람인데…. 이렇게 가면 안돼요.”
김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밀려오는 문상객을 맞기 바빴다. 생각지도 않은 비보를 접한 김씨와 유가족은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많이 아팠어요. 병보석을 신청했을 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지난 2월4일 새벽 1시30분경.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에 있는 부산시장 관사에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안시장의 아들 정훈씨가 수화기를 들었다. 진흥기업 박모(74) 회장으로부터 사업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1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0월 구속 기소돼 재판을 받고 부산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안시장이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었다. 비몽사몽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정훈씨는 곤히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서둘러 깨운 후 박상헌 부산시장정책특보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노모에게 안시장 죽음 알리지 않아
박상헌 특보는 “아들 정훈씨가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께서 자살을 기도했다’고 하더라고요. 황급히 차를 몰고 부산시장 관사로 갔어요. 사모님과 아들을 태우고 병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사모님은 ‘남편에게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하고 초조해하셨어요. 새벽 2시30분쯤 병원에 도착해서야 사망사실을 알았죠” 하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내의를 찢어 만든 끈으로 1.97m 높이의 선풍기 고정대에 목을 맸다’는 구치소측의 설명에 김씨는 넋을 잃었다고 한다. 안시장의 사망 소식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울부짖던 김씨는 아들과 함께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자살미수에 그친 줄로만 알았던 김씨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씨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자 옆에 있던 시누이 안영자(59)씨가 말을 거들었다.
“오빠(안시장)는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과묵한 편이었지만 잔정이 참 많았어요. 오빠가 어머니 때문에 제대로 눈이나 감았는지…. 오빠가 돌아가신 줄도 모르고 어머니는 미국에서 박사학위 잘 받고 건강하게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새벽마다 목욕재계하고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고 있어요. 가족회의 끝에 ‘어머니께 죽음을 알려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연세가 많으시니까. 자연스럽게 별세하면, 그때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저세상에 가서 만나셔야죠. 거기서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시겠죠.”
안시장의 노모(92) 이야기가 나오자 김씨의 눈에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노모는 안시장이 구속되고 자살한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안시장이 구속수감된 이후 서울 압구정동의 안시장 자택에서 생활하는 노모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봐 안시장의 여동생집으로 급히 거처를 옮겼다고.
“누구보다도 어머님이 가장 큰 걱정이에요. 아무것도 모르시는데. 아니, 가르쳐드릴 수도 없는데…. 남편이 구속수감 된 이후 TV는 드라마만 볼 수 있도록 리모컨을 고정시켜 놓았고, 신문도 못 보시게 했어요. 미국에 박사학위 받으러 가신 줄 알아요, 지금도.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아마 그날로 돌아가실지 몰라요.”
자신의 슬픔보다 시어머니를 더 걱정하는 김씨. 그는 오빠의 소개로 안시장을 만나 2년 동안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김씨는 신혼 초 사직터널의 총책임자가 된 남편이 밤에도 인부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사에 매달려도 불평불만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안시장은 신혼의 단꿈을 국내 최초로 이뤄지고 있는 ‘터널’ 공사의 책임자 자리에 반납했던 것이다.
자살 소식을 들은 직후 기자들의 질문에 눈물만 흘리는 김씨.
가정보다는 늘 자신이 맡은 일이 우선인 남편이었지만 김씨는 그런 남편을 격려했고 힘이 돼 주었다. 시부모님과 세 명의 시누이, 집안의 대소사는 언제나 김씨 몫이었다. 자녀들의 소풍이나 학예회, 운동회 등에 얼굴 한번 내밀지 못한 안시장은 생전에 가족들과 함께 외식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해 했다고 한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터널, 3·1 고가도로, 서울시 지하철, 올림픽대로 건설을 포함한 한강종합개발…. 국내 건설 토목사의 한 획을 긋는 굵직굵직한 ‘작품’에는 안시장의 땀과 열정이 담겨 있다.
“험한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지만 감성이 풍부한 분이셨어요. 올림픽대로를 달리다 보면 여름철에 소음을 막기 위해 설치된 방음벽에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게 보이죠? 그거 안시장님 아이디어였다고 해요. 직접 담쟁이 넝쿨도 심었고…. 지난해였나? 시장님과 함께 차를 타고 올림픽대로를 지나는데 (안시장이) 그 담쟁이 넝쿨을 보면서 ‘도시가 풍성해 보이고,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하고 마음 흐뭇해하던 모습이 생생하네요.”
김씨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박상헌 특보가 한마디 거들었다.
지난 65년 결혼한 안시장은 7급 말단 공무원을 시작으로 서울시 도로국장, 종합건설본부장, 부산시장(관선), 92년 해운항만청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다음날 아내와 함께 결혼 27년 만에 처음으로 여행다운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안시장은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월2일 오전, 안시장이 사망하기 이틀 전 김씨는 서울구치소에서 남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대했다.
“이제는 괜찮아. 우리 서로 몸조심하자고. 건강해야지. 늘 고마워.”
안시장이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김씨는 여느 때와 달리 밝은 표정으로 안부를 묻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것으로 생각,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틀 뒤 남편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부산장애인총연합회 부회장 조창용씨가 장애인 20여명과 함께 빈소를 찾자 김씨는 그들을 끌어안고 또다시 오열했다. 조씨는 “시장님 부부가 우리들에게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보여줬다”면서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셨다”고 안시장을 추모했다.
“유서에 어머니와 아들 딸, 그리고 생전에 가족 못지않게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던 이분들에 대해 사랑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이 있더라고요. 그렇게 할 겁니다. 생전의 남편 뜻을 잊지 않고….”
안시장은 아내에게 남긴 세장의 유서 말미에 ‘당신의 사람 상영’이라고 썼다. 40여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 대한 사랑이 절절히 묻어 있는 안시장의 유서. 김씨는 “더 많이 사랑하고 싶었습니다”고 쓴 남편의 ‘마지막 편지’를 가슴에 안고 오랫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안상영 부산시장은 7급 공무원에서 시작, 서울시 도로국장, 종합건설본부장 등을 거쳐 부산시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중 자살해 충격을 주었다.
지난해 발행할 예정이었던 고 안상영 부산시장의 자서전은 안시장이 10월 구속수감됨에 따라 발행 일정이 늦어졌다. 안시장의 자서전 발간에 참여한 부산시청의 한 관계자는 “유족들과 협의를 거쳐 발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어린 시절과 30여년의 공직생활, 민선 부산시장으로서의 공과, 도시경영과 공직자로서의 리더십, 그리고 부산시의 미래 등 총 4부에 걸쳐 있다.
·방황했던 대학시절
지금도 서울대학교 입학식 날의 감동과 자극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학교 옆에 하숙집을 구했다. 하숙생들과 어울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인생철학에 대한 토론을 자주 했다. 꿈을 키운 시기라고 생각된다. 학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부산에 가기 위해 경부선 열차에 올랐다. 기차 안에서 신문을 펼쳐 보다 나는 한 광고 문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서울시 기술직 모집, 지방 4급 공채, 토목직 환영….’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눈을 더욱 크게 떴다. “이게 웬 기회냐.” 좀처럼 기회를 잡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무원 모집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부산으로 내려간 다음날 곧장 서울로 향했다. 공무원 자리가 ‘하늘의 별 따기’ 보다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지방 4급이면 요즘의 7급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하지만 공무원 자리가 워낙 없었기에 ‘계급’ 같은 개념은 없었다. 공무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2년 열애 끝에 결혼
나는 65년 아내와 결혼했다. 서울시청 공무원을 시작한지 2년 만이었다. 아내는 당시 한국은행에 근무하던 처남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대학교 4학년 때로 기억된다. 2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아내는 4남3녀 중 막내였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 3대 독자인 나를 많이 이해해줄 것 같았다. 형제간 우애도 상당히 돈독했다. 아내를 소개받은 뒤 나는 실험을 하고 있던 의암발전소로 함께 놀러 갔다. 소주를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여자면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내에게 “결혼해달라”고 말했다. 나의 청혼을 받고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무척 수줍은 듯 미소만 지었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번 못했다. 일요일에 짬을 내 잠깐 얼굴 한번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불평 한마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에 푹 빠져 있는 나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생활은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계속됐다. 일에 파묻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늘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나는 공무원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술직 공무원 최초의 부산시장
88서울올림픽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88년 5월12일. 당시 이춘구 내무부장관이 급히 불렀다. 나는 혹시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내무부장관이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을 호출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이장관은 나를 불러놓고 도시행정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안 본부장, 도시행정은 머리로 하는 것보다 가슴으로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이 양반이 이런 이야기를 하지?” 느닷없는 이장관의 이 같은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라디오에서 부산시장 발령 소식이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귀를 의심했다. 그 당시에는 기술직 출신이 부산시장으로 임명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였다. 당연히 이런 자리는 행정고시 출신 등 ‘행정직의 몫’이라고 여겼다. 더구나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서울시 종합건설본부장으로 승진하면서까지도 나는 “장관이 되겠다” 혹은 “부산시장이 되겠다”는 등의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다. 내 주변에 공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 건설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왔다. 그런데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기술직 출신 최초의 부산시장’이라는 기록과 함께….
·30년 공직생활을 접고
92년 4월21일 나는 해운항만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30년 넘게 공직생활을 해온 나에게 이날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자연인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퇴직발령이 나던 이날 나의 첫 소감은 그렇게 홀가분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퇴직 발령을 받고 나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르지만(아마 대부분이 섭섭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홀가분하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물론 항만청 간부들이 “아이고, 청장님 후속발령이 안나 섭섭합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던졌지만 나는 이들에게 “이 사람들아, 나는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어”라고 말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그때만큼 ‘홀가분하다’는 기분을 만끽(?)해본 적이 없다. 나는 차를 타고 아무도 몰래 아버님 산소가 있는 퇴계원으로 향했다. 차안에서도 나는 지난 30여년간을 떠올렸다. 먼 길을 걸어오면서 대과(大過) 없이 보람 있게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조상님과 부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연신 되뇌었다. 아버님 산소에 도착한 나는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제가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대과 없이 마칠 수 있도록 보살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한강 상류를 바라보고 깊은 상념(想念)에 젖었다. 30년,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나의 젊음과 청춘을 다 바친 길고 긴 세월이었다. 하루도 나 자신을 위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는 길이 무엇인가만을 생각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속 한가운데는 뿌듯한 자부심이 자리를 잡았다. 그 어려운 일들, 수많은 토론과정, 남들이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만 골라서 한 지난날들, 실패 없이 거의 성공만 한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감회에 젖고 또 젖었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인생이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부도 직전의 부산경제
98년 7월1일 민선 2기 시장 취임식을 가졌다. 90년말 임명직 시장에서 물러난 뒤 8년 만에 다시 시장에 취임한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민선 2기 초 부산의 모든 여건은 정말 어려웠다. 한마디로 아사(餓死) 직전이었다. 세계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내 고향 부산을 살리고, 어떻게 하면 부정적인 도시의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돌릴 수 있을까 하고. 한편으론 “내 인생 중에 가장 잘못된 선택이 부산시장 출마였다”는 후회를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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