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서글한 인상에 베이스톤의 굵은 목소리, 건장한 체구를 지닌 중견 탤런트 송기윤(52). 언뜻 ‘임금님’이나 ‘회장님’ 역할이 어울릴 법한데, 웬일인지 드라마에서 보게 되는 그의 모습은 남자다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요즘 출연중인 KBS 일일드라마 ‘백만송이 장미’에서 맡은 독신주의자 기주 역도 그렇다. 기주라는 인물은,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아내를 괴롭히는 남자들을 증오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정의파지만 여자처럼 닭살 돋는 연기를 해야 하는 극의 설정상 그는 이번에도 망가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남자가 너무 여성스럽게 나오는 민망한 역할이라 많이 망설였는데 다른 캐릭터들이 평범하니까 웃음과 재미를 더할 감초 역할이 저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작진이 주문한 대로 닭살 돋게 연기하다가 요새는 수위를 낮췄어요. 과장된 연기는 오히려 거부감을 주잖아요. 저도 한창 때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양녕대군 역할로 상도 받고, 데뷔작인 ‘하얀 민들레’에서는 김영란씨와 임예진씨 사이에서 갈등하는 멜로 연기도 해봤어요. 그때는 지금처럼 몸이 비대하지 않았거든요. 사랑은 뚱뚱한 사람이 더 잘하는데 작가들은 그걸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좀 불이익을 당했죠(웃음).”
음식 비법 알려주지 않아도 맛의 비결 알아내는 남자 장금이
그가 말하는 ‘사랑’은 아무런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을 뜻한다. 충북 증평에서 양조장을 운영하는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방송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애주가요, 미식가인 그는 지금도 누구와 어디를 가든 먼저 돈을 내야 마음이 편하다고. 물론 사람들을 주도해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이도 그다.
“저는 좋은 음식을 먹으면 친한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요. 그들과 같이 왔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다음에 데려와서 먹여줘야지 하는 마음이 들죠. 가끔 집으로 초대해 직접 만들어주기도 해요. 음식점에서는 비법을 안 가르쳐주지만 저 스스로 맛의 비결을 터득하거든요. ‘한 숟가락 먹고 물 한컵 마시고’를 반복하다 보면 뭐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어요. 저야말로 남자 장금이라니까요. 하하하.”
더불어 산다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는 그의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일. 모처럼 한가한 주말에도 그의 집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그 때문에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속에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요즘에는 선후배 관계가 예전 같지 않아요. 빈부의 격차도 너무 심해졌고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계에 위협을 느낄 정도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거든요. 전에는 그런 동료들이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분위기였는데 날이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는 것 같아요.”
그가 최근 동료 탤런트 한진희와 함께 머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어렵게 살아가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서다.
당초 아이들을 조기 유학 보낼 생각이었으나 마음을 바꿨다는 송기윤. 왼쪽이 작은딸 우주, 오른쪽이 큰아들 우석이다.
“주부 팬들을 겨냥한 사업 아이템으로 머드만한 게 없더군요. 이번에 피부에 좋은 한약재들을 넣은 머드 분말을 만들어내기까지 1년 가까이 걸렸는데, 써본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요.”
지난 88년 서른여덟의 나이에 열살 연하의 신부를 맞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그는 슬하에 우석(13)과 우주(11) 남매를 두었다. 생김새를 보면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큰아들 우석이는 엄마를,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작은딸 우주는 그를 닮았는데 성격은 그 반대라고 한다.
“큰아이는 듬직하고, 딸아이는 그야말로 애교덩어리예요. 딸 키우는 재미가 이런 건가 보다 싶을 정도로 참 싹싹하고 예쁘게 굴어요. 가끔 오빠한테 잘해주면 샘을 내서 그렇지 나무랄 데가 없어요. 아들아이는 말수도 적도 딸아이에 비해 무뚝뚝한 편이지만 제가 집을 비워도 안심이 될 정도로 동생을 잘 챙기더라고요.”
아내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엄마 노릇까지 해야 하는 처지다. 밖에서 잘하는 남자들은 가정생활에 소홀한 경우가 많은데, 그는 좀 예외인 듯했다.
“일도 중요하지만 가족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어요. 어느 한쪽도 소홀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물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촬영이 없을 때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고 해요. 아이들 생일에는 아무리 바빠도 선물을 꼭 준비하고, 저녁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해요. 아이들도 학원 다니느라 늦게 귀가할 때가 많지만 서로 시간이 맞을 때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눠요.”
그의 교육 방침은 ‘자율 학습.’ 항상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사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가훈도 ‘자기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자’로 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에도 아이들에게 강압적으로 공부를 시키지 않고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다고.
“아이들이 잘할 때는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충분히 듣고 나서 야단을 쳐요. 또 성적이 좋거나 선행을 할 때마다 ‘이번엔 몇 점짜리’ 하고 점수를 매겨서 100점이 되면 원하는 선물을 사줘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실망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고요. 공부하라고 잔소리할 일도 없고요.”
아이들이 잘할 때는 아낌없이 칭찬하고 잘못 했을 때는 이유 물은 뒤 야단쳐
본래 그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조기 유학을 보낼 계획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데다 아내도 미국에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보낼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위에 아이들을 유학 보냈다가 도리어 낭패를 본 사람들이 많아 좀더 시간을 갖기로 했다고.
그는 어려서부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해 어디를 가든 먼저 돈을 내야 마음이 편하다고.
“유학이 능사는 아닌 것 같아요. 그곳에서도, 한국에 돌아와서도 적응을 못해서 결국은 취직도 못하고 부모 눈치보며 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점점 마음이 멀어지고 있는데 딸아이는 보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꿈이 디자이너인 딸아이가 그림도 곧잘 그리고 예능 계통에 소질을 보이거든요. 나중에라도 본인이 원하면 보내줘야죠. 바람직한 일이라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부모 역할이기도 하고요.”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나이인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엄마와 이메일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무심하게도 가끔 전화 통화하는 것으로 끝이라고.
“불안할 게 뭐 있겠어요. 아내가 나를 믿는 것처럼 나도 아내를 믿으면 그만이지. 우리 부부는 그러고 보면 참 잘 맞아요. 지금껏 큰소리 내고 싸운 적이 없거든요. 아내가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잘못을 해도 ‘나하나 보고 시집 왔는데 참자’ 하고, 아내도 잘못한 것을 잘했다고 우기지 않아요. 저는 그저 아내가 건강하게 잘 지내기만 바랄 뿐이에요.”
지난 1월초 집에 다녀간 아내의 얼굴이 전보다 야위어서 안쓰러웠다는 송기윤. 그는 ‘사랑’이라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는 데는 인색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마음을 주는 전형적인 한국남자였다.
-
추천 0
-
댓글 0
- 목차
-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