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일이었습니다. 납부금을 내지 못해 며칠째 독촉 받던 나는 어느 날 아침 최후통첩을 해버렸습니다. 오늘까지 돈을 내지 않으면 학교에 못 다니게 될 거라고. 퉁명스런 그 한마디에 어머니가 토한 한숨 소리 같은 건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점심시간, 어머니가 찾는다는 말을 듣고 학교 뒷문으로 달려갔을 때 나는 그만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흙 묻은 함지박, 낡은 몸빼 바지…. 장터에 뭔가 내다 팔고 오는 길인 게 분명한 허름한 차림이었습니다. 누가 볼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어머니가 고쟁이 속에서 꺼내주는 꼬깃꼬깃한 돈을 낚아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습니다. 서무과로 가는 길에 창 틈으로 내다본 어머니는 돌처럼 굳은 채 서 있었습니다. 너무 멀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울고 있다는 것을, 그래선 안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쟁이 속에서 꼬깃꼬깃한 돈 꺼내주던 어머니의 눈물
1914년 제주생, 열아홉에 혼인하여 자식 열둘을 낳았으나 다섯을 잃었다. 두심은 그의 다섯째 딸이다.
어머니의 주머니는 유리구슬, 알사탕, 연필과 지우개를 살 돈까지… 자식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내는 화수분이었습니다. 철부지가 자라 더는 손을 내밀지 않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주머니는 몸져누운 아버지를 위해 채워졌습니다. 약이 된다는 산나물과 해초가 그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아버지마저 떠나고 혼자 된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왔습니다. 징역살이 같다던 어머니의 서울살이에 유일한 낙은 양수리 야외촬영장에 따라나서는 일. 그런 날 아침이면 어머니는 거실 한쪽 흔들의자에 앉아 딸이 집 나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행여 놓칠까봐 길목을 지킨 것입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주머니는 늘 불룩했습니다. 아주 가끔 같이 가도 된다고 사인을 보내면 아이처럼 좋아하며 그 불룩한 주머니에서 양말을 꺼내 신던 어머니. 팔십 평생 끝자락에서야 어머니의 주머니는 당신 것이 돼 있었던 것입니다.
평생을 일에 묻혀 살고 굽은 등에 쌀 한가마를 둘러멜 만큼 기운이 장사였던 어머니가 맥을 놓은 건 아버지가 긴 투병 끝에 세상을 등진 후였습니다. 아버지를 황망히 떠나 보낸 뒤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기운을 잃어갔습니다. 모녀가 한집살이를 시작한 지 5년째 되던 해 봄날, 여느 때처럼 흔들의자에 앉아 배웅하는 어머니의 말간 볼을 쓰다듬곤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촬영장으로 동생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가 저녁 드신 게 잘못돼 기도가 막히고 심근경색이 겹쳤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먼저 도착해 구급차를 기다리는 내 머릿속에 자꾸만 나쁜 생각이 맴돌았습니다. ‘엄마, 지금 눈 감고 오시는 길이거들랑 그냥 아부지한테 가. 내가 해드릴 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는데….’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차라리 눈을 감으시라는 그 못된 생각은 현실이 돼 어머니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그 죄스러운 마음에 나는 어머니의 숨결이 밴 유품들을 2년이 넘도록 치우지 못했습니다.
엄마! 지금도 내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보고 있수? 엄마한테 내 편지는 늘 텔레비전이었지. “편지가 따로 있냐? 텔레비전이 편지지” 하시던 엄마의 말이 내가 30년 동안 쉬지 않고 연기를 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는 사실을 엄마도 아셨죠? 남들은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난 가슴 한쪽이 시려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해탈한 사람 같았거든.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인자하게 웃으시던 우리 엄마. 엄마! 우리가 죽어서 윤회할 수 있다면 엄마하고 나하고는 꼭 다시 만나야 돼. 엄마가 “난 엄마하기 정말 싫어” 하시면 그땐 내가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게.
어머니가 꽃다운 처녀였던 시절, 세월은 하 수상했습니다. 처녀들은 정신대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머리를 올리곤 했습니다. ‘유명한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에,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 마음이 급했던 외할아버지는 매파가 전한 신랑의 배경만 듣고 덜커덕 셋째딸을 내주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던 날 식장에는 어깨 딱 벌어진 남정네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하객들이 깡패니 주먹이니 하며 수군거렸지만 어머니는 깡패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나 하나만을 낳아놓고 집을 나가 명절 때나 되어야 얼굴을 비쳤습니다. 그나마 올 때보다 안 올 때가 더 많았고 온다 해도 아버지는 제상에 올린 국이 식기도 전에 다시 집을 나가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한 남자의 아내로 행복이란 걸 느껴본 건 평생을 통해 단 두해뿐이었습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어느 해 겨울, 아버지는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를 따르던 수많은 여자들이 모두 등을 돌렸지만 어머니만은 아버지를 위해 솜 꾹꾹 눌러가며 바지저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옥바라지는 결국 아버지를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아버지는 출소하자마자 집으로 들어와 마치 그날 아침에 나갔다 들어온 사람처럼 호기롭게 어머니를 불러댔습니다. 결혼 17년 만에 집에 들어온 남편이 기막힐 만도 한데 어머니는 여느 집 아낙처럼 공손히 아버지를 맞았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집을 나가기 전까지 2년간 부엌에서 달그닥거리며 작은 소리로 콧노래를 부르던 어머니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그때가 어머니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간이었습니다.
평생 아들타령 한번 하지 않던 어머니, 첫손자 품에 안고 뛸 듯이 기뻐해
1930년 서울생. 스무살에 김두한과 혼인하여 을동을 낳고 다른 부인들의 소생 넷을 호적에 입적했다.
나는 어머니의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뭐 하나 달고 나왔으면 아비를 붙잡아두었을 텐데…” 하는 수군거림을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평생 나에게 일언반구도 아들 타령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정말 아들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첫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결혼한 지 일년 만에 첫아들을 낳던 날, 어머니는 꼭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병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랑을 해댔습니다. “내 딸이 아들을 낳았다우. 고추를 낳았다우.” 훗날 어머니는 그날이 당신 평생에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천방지축이었습니다. 동네에서는 골목대장이었고 학교에서는 왈가닥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기가 모두 연극으로 쏠렸나 봅니다. 답답한 집안 사정을 잊는 데는 연극이 최고였습니다. 학교에선 연극동아리에 들어가 연극을 하고 수업이 끝나면 극장에서 공연을 봤습니다. 한번은 ‘호동왕자’라는 국극을 보기 위해 뚝섬에 있는 극장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정문에 제도용 자를 든 어머니가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길 한가운데서 어머니는 나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리고 주저앉아 통곡하며 말했습니다. “잘해야 독립운동가의 손녀란 소리를 듣지. 네 행동이 조금만 엇나가도 사람들은 너를 깡패의 딸이라 부를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은 나를 평생 담금질하는 채찍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올려다보면 베란다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모습 그대로 밤늦게까지 딸을 기다리곤 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도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아버지. 어머니에겐 내가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어머니가 그렇게 온 맘으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 이 딸내미뿐이었음을….
오빠 셋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수재가 수두룩한 집안에서 나는 유일하게 공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공부도 못하고 얼굴도 못나고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내게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을 퍼부었습니다. “세상에 우리 도순이처럼 밥 잘먹는 아이는 없을 거야.” “우리 도순이는 인사를 너무 잘해.” “도순이 목소리는 어쩜 그렇게 크고 낭랑한지 몰라.” 전교 1,2등을 하는 오빠들보다 나는 훨씬 많은 칭찬을 받으며 컸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동화책 읽기 대회가 열렸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대회에 나가라고 권했습니다. “너처럼 책을 재미있게 읽는 아이는 본 적이 없단다. 넌 정말 잘할 수 있을 거야.”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읽었던 내용은 아마도 ‘토끼와 거북의 경주’였을 겁니다. 나는 정말 토끼가 된 심정으로 팔딱거리며 온 힘을 다해 책을 읽었습니다. 결과는 대상. 개근상말고는 처음 받아본 상장이었습니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는 자신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직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 덕입니다.
사돈의 대소변 치우던 어머니 끝내 치매로 정신 잃어
1919년 황해도 연안생. 스물하나에 혼인하여 자식 다섯을 낳았다. 도순은 그의 막내딸.
나는 하반신을 못쓰고 자리 보전을 하게 된 시아버지를 9년 동안 병수발했습니다. 대소변 받아내고 씻기고 닦는 일을 아버님은 꼭 내게만 맡기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오랜만에 대청소를 마친 참이었습니다. 걸레를 빨기도 전에 아버님이 온 집안 벽이며 가구에 똥오줌을 발라놓으셨습니다. 미친 여차처럼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는데 같은 아파트 위층에 살던 어머니가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아버님의 똥오줌을 다 닦아낸 후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너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는 말씀만 반복했습니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수시로 내려와 사돈양반의 대소변 묻은 옷이며 이불 빨래를 마다않고 해주었습니다. 내가 시아버지 병수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그런 어머니의 딸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몸이 약했고 입맛이 까다로웠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하루에 세번 작은 뚝배기에 밥과 찌개를 따로 해냈습니다. 어머니는 두분이 해로하는 동안 단 하루도 그 일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벼르고 별러 친구들과 서울 근교로 온천여행을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어머니는 정오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점심때가 다가오는데 온천이고 뭐고 그저 밥 차릴 생각밖에 안 나더랍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마구 퍼부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건 병이라고. 병도 보통 병이 아니라고. 병이 너무 깊어서였을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치매가 찾아와 어머니의 정신을 앗아가버린 것입니다. 눈감고도 밥물을 맞추던 어머니가 부글부글 밥물이 끓어넘치는 가스렌지 앞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머니가 본능처럼 놓지 않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오락가락하는 정신 속에서 자꾸만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큰일났어. 니 아버지 밥해주러 가야 하는데 이 양반이 왜 날 안 불러. 지금 누가 밥해주는 거야. 나 빨리 저 세상 가야 되는데 이 양반이 왜 날 안불러.” 밥에 관한 어머니의 강박증은 지금 생각해보니 사랑이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2년 동안 딸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사실 집으로 모셔다놓기만 했지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도우미 아줌마에게 맡기다시피 했습니다. 죄송한 마음을 덜어보려고 코트며 핸드백이며 괜한 물건들만 사다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우미 아주머니 말씀이 얼마 전부터 하나둘 덜어내 생면부지 남한테 주었다고 합니다. 이 다음에 나 죽고 나서 도순이가 이거 다 치우려면 마음이 아프지 않겠냐고 그래서 없애는 거라면서…. 지금 너무너무 후회되는 일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한 이불 덮고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하며 하룻밤만 보냈다면 쓰지도 못할 선물 안겨드리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셨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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