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일어난 ‘KAL기 폭파사건’이 16년 만에 다시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최근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 의혹을 제기한 소설 ‘배후’가 출간되자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조사관 5명이 저자 서현우씨(41)와 책을 출간한 창해출판사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한 것.
조사관 5명은 서울지법에 서씨와 출판사를 상대로 각각 2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는 한편 서울지검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원고들은 “폭파범 김현희의 소지품과 현장탐문 등을 통해 그가 북한 공작원임을 확인했으며 현재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할 관련자 진술과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서현우씨와 KAL858기 사고 희생자 가족회는 “폭파범 김현희가 대통령선거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된 점 등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의혹이 많다”며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서씨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건 발생 직후부터 끊임없이 국내외에서 의혹이 제기됐다. 정부는 그동안 제기된 의혹에 대해 성실한 해명을 회피해왔다. KAL858기 폭파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며, 참여정부는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의지를 밝혔다.
이에 따라 16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이 사건기록이 공개될지 여부와 당시 남성들 사이에 ‘마유미 신드롬’을 몰고 왔던 미녀공작원 김현희가 법정에 서서 진실을 밝힐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재판을 통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며 서현우씨와 유족들이 제기하고 있는 KAL기 폭파사건의 의문점을 정리했다.
어렸을 때 ‘둥근 귀’가 커서 ‘칼귀’로 변할 수 있나?
87년 안기부는 김현희가 ‘72년 11월2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원회 2차회담에 참석한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여학생’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사진 한장이 공개됐는데, 유족들은 이 사진에 의문을 제기했다. 72년 평양을 방문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준 사진 속의 여학생 귀는 둥근 네모형인데 김현희의 귀는 역삼각형의 ‘칼귀’다. 성형외과 전문의에 따르면 귀는 90% 이상이 어릴 때 모양이 갖춰진다고 한다. 따라서 이 여학생과 김현희를 동일인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
또한 당시 KBS와 주요 일간지에 꽃다발을 들고 손을 들어 인사하는 소녀의 사진이 실렸는데 안기부는 그 소녀가 김현희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공개된 사진은 남북조절위 2차 공동위원회 당시 사진이 아니라 72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사진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개성시 유치원에 근무하던 북한 여성이 사진 속의 소녀는 김현희가 아니라 당시 개성시 만월여자중학교 학생시절 자신의 모습이라며 북한 TV에 나와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그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직접 사진을 들고 “아니, 그럼 내가 김현희란 말입니까?” 하고 강변했다.
사진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작 이 사진을 공개했던 일본인 하기와라 기자는 사진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자 결국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고, 그 소녀는 북한에 살고 있는 ‘정희선’으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국정원측은 김현희가 16년 전의 일이라 기억에 착오가 있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처음 지적되었던 화동의 뒤에 있는 소녀라는 것.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KAL기 폭파사건의 의혹이 재판을 통해 진실이 가려지게 되었다.
87년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평양의 하신초등학교와 중신중학교, 김일성종합대학 예과 1년을 수료하고, 평양외국어대학 일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80년 2월 공작원으로 선발됐다’고 밝혔다. 또한 김현희의 아버지 김원석은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KAL858기 가족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앙골라정부가 발표한 북한 외교관 명단에는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없고, 수산대표라는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KAL858기 가족회가 국회에 제출한 청원서를 보면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노동당 조사부에 들어간 지 2년 뒤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고 밝혔지만, 북한에서는 당원이 아닌 사람을 당 중앙기관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무역대표부는 외교관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북한말과 글을 사용하지 않는 ‘북한 사람’ 김현희?
87년 12월15일 국내로 압송된 김현희가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때 안기부에서 공개한 김현희의 자술서에는 김현희의 서명도 없고, 진술내용도 언뜻 보기에 북에서 사용하는 용어 같지만 북한에서 쓰지 않는 용어가 많았다는 것이다.
88년 1월15일자 중앙일보에 발표된 김현희 자필 맹세문과 다음날 1월16일자 조선일보에 발표된 김현희의 자필 맹세문은 종이가 백지에서 편지지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규율’이 ‘규률’로 바뀌는 등 단어도 다르게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이 문제는 중앙일보가 대답할 문제”라고 해명했다.
가족회에서 제기한 또 하나의 의문은 김현희의 말투다. 안기부는 기자회견 당시 김현희가 심한 평양 사투리를 썼다고 말했지만, 88년 1월18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김현희는 기자회견 내내 또박또박 서울 표준어를 썼다”고 적혀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급격히 말투가 변하는 것은 만무한 일인데, 왜 이런 차이를 보였을까 하는 점이다.
정예 공작원이라고 보기엔 어설픈 김현희
KAL858기 폭파사건은 모든 것을 김현희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김현희의 행방이 더욱 중요하다. 김현희가 쓴 진술서에 따르면, 범행 다음날인 11월30일 저녁 호텔방으로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에 대해 질문하는 전화가 오고, 김정기 주 바레인 대리대사가 호텔방을 방문, 자신이 용의선상에 올랐다는 걸 알았는데도 다음날 아침에야 그 호텔방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정예 공작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행동이라는 게 가족회의 주장이다.
또한 폭파사건 후 증거를 없앨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지만 김현희는 문서나 암호, 사진, 행적을 알려주는 항공권 같은 것들을 없애지 않았다.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의 검거 당시 유류품은 4백95종에 이른다. 7년8개월이나 훈련을 받은 공작원이 증거도 없애지 않고, 공작지에서 사진을 찍고,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는 맹세문을 가지고 다녔다는 것에 대해 가족회는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김현희는 97년 12월 자신을 경호하던 안기부직원과 결혼해 두 아이를 두었다.
안기부는 김현희가 체포될 당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그를 진단했던 바레인의 야코비안 박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음독한 흔적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KAL858기 가족회도 “독약 앰플은 깨물자마자 식도를 태우며 순간 숨을 멎게 하는 것인데, 위세척할 것도 없이 깨끗했다는 바레인 의사의 말을 들어 보면 정말 그가 죽을 결심으로 독약 앰플을 깨물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김현희가 독약 앰플을 깨물었지만 입안에 독약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렇게 무수한 의혹의 꼬리가 꼬리를 무는 상황에서 정작 입을 열어야 할 김현희는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최근 국가정보원은 KAL858기 사건과 관련해 대책위와 유족들이 ‘안기부의 조작사건’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국정원은 11월3일 보도자료를 통해 “이 사건의 수사·발표에 있어 역사와 국민 앞에 단 한점의 부끄럼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며 “유가족측에서 원한다면 언제든지 제기하고 있는 의혹 부분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나 입장을 밝힐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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