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날은 드라마 ‘완전한 사랑’의 촬영이 모두 끝나고 종방연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주말 저녁 전국의 시청자들을 눈물 젖게 하며 높은 시청률을 보인 드라마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이영범(43)은 ‘완전한 사랑’ 이야기부터 꺼냈다.
“욕심 많은 아버지의 성에 차지 않는 장남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혹독한 구박을 받고 자란 남자죠. 그렇게 차별대우를 받으면 속이 꼬일 만도 한데 타고난 천성이 착해서 편애받는 아우에 대한 질투도 없고,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도 다 자신이 못난 탓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가잖아요. 동생 부부가 죽자 기꺼이 동생의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극중 역할을 보면 그는 정말 속이 있을까 싶게 착하다. 능력 없고 유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따뜻하고 성실한 사람이 바로 그가 맡은 재우라는 인물. 그 역할을 너무나 훌륭하게 소화해내서인지 그 또한 착하고 편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바로 그것이 집사람의 불만이에요. 아내가 집 밖에 나가면 인사를 많이 받나 봐요. ‘그렇게 착한 남편과 살아서 좋겠다’고. 뭐라 말도 못하겠고 속 터진다고 엄살이에요.”
드라마 캐릭터만 보고 부인 노유정(40)에게 “댁은 좋겠수” 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사람 사는 건 이 집이나 저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사십대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집안에선 적당히 권위를 부리고 눈치껏 집안일도 돕는다며 웃었다.
중년 남자의 ‘완전한 사랑’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
그는 강원대 경영학과 재학시절 연극에 빠진 후 MBC 일요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 김혜수와 신혼부부로 출연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후 ‘여우와 솜사탕’ ‘허니 허니’ ‘색소폰과 찹쌀떡’ ‘LA아리랑’ ‘거침없는 사랑’ ‘사랑은 아무나 하나’ 등 여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데뷔 초기엔 지적인 샐러리맨 역할도 했지만, 그가 주로 해온 역할은 포근한 남자. 그래서 그에겐 조금은 허둥대고 소심하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운, 정 많은 이웃집 아저씨의 이미지가 있다.
“배역을 선택할 때 굳이 기준을 정하진 않지만, 평소 성격이나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를 고려해서 작가나 PD가 그런 역할을 맡기는 것 같아요. 비슷한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이미지가 더욱 굳어지고….”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기자는 다양한 역할을 해야 연기의 폭이 넓어지는데 이미 구축된 이미지를 헐고 다른 이미지를 쌓기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부인 노유정도 요즘 교통방송에서 진행자로 활동중이다. 며느리 아내 엄마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는 아내가 늘 고맙다고.
“연기자라는 직업이 쉬워 보여도 험한 직업이에요.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면 최선을 다해 몰두해야 하니까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모가 많죠. 그러다 보니 집에 들어가면 만사가 귀찮고 쉬고만 싶어져요. 말수도 적어지고. 집사람도 연기자 생활을 해서 그 점을 잘 이해해주지만 극중 인물과 실제 저의 모습엔 차이가 있으니까 가끔 불평을 할 때가 있어요.”
아내 노유정은 개그우먼 출신의 탤런트. 방송국에서 만난 노유정과 연애할 당시 남동생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충격으로 큰 슬픔에 빠졌는데 그때 노유정이 자신의 일처럼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주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배려와 마음 씀씀이에 끌려 결혼을 하게 됐다.
“20대의 사랑은 불 같은 사랑이죠. 자기가 가진 것을 ‘올인’하는. 그런데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자식을 키우게 되면 책임감이 포함되는 것 같아요. 특히 남자는 ‘순수한 사랑’에 ‘주변을 고려하는 책임’이 더해진다고 할까요.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이 먼저 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우유부단해지는 측면도 있고.”
그래서 아내를 따라 남편까지 죽음에 이르는 드라마의 결말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금실 좋은 부부가 어느 한쪽이 죽으면 곧 따라 죽는다는 말을 들어봤지만, 초로의 나이도 아닌 한창 나이에 그런 불 같은 사랑을 하면 남은 식구들은 어떡할까 하는 걱정이 슬그머니 앞선다는 것. “제가 나이를 먹어서 그럴까요?” 하고 되묻는다.
이번 드라마의 결말을 보며 아내가 “만약 내가 저렇게 아프면 당신도 잘 해줄 수 있어?” 하고 묻기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는 그. 하지만 결혼한 중년 남자의 ‘완전한 사랑’은 스스로 알아서 술을 절제하고,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서 건강을 챙기며,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 경제적 여유를 만들어놓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속내를 비쳤다.
올해로 결혼 10년차. 아들 성찬이는 초등학교 2학년, 딸 채린이는 네살이다. 한창 엄마 손길이 필요한 나이라서 아내가 집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일하고 싶어하는 아내를 말릴 생각은 없다고 한다. 노유정은 요즘 교통방송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아내가 사회 활동하는게 달갑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말리지도 못해요. 저도 아주 평범한 한국 남자죠. 저에 대해 생각해보면 강원도의 한 시골마을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장남 특유의 책임감, 자존심이 강한 것 같아요. 사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도 자존심 때문에 먼저 사과를 못해요. 마음이 풀리고 ‘내가 잘못했지’ 싶으면서도 그냥 버텨요. 그러면 제 성격을 아는 아내가 먼저 와서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죠. 당신 좋아하는 것 해놨다거나 슬그머니 와서 안기는 식으로. 그러면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여요. 항상 아내가 먼저 사과를 하는데 이런 틀을 깨고 싶지만,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습성은 어쩔 수 없는지 잘 안되네요.”
드라마에서 늘 착하고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온 이영범. 인터뷰 내내 그는 진짜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들 성찬이가 자신의 성격을 똑닮았다고 한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합리적으로 납득을 시켜 잘못을 깨닫게 해야지 체벌이라도 하면 마음을 크게 다쳐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기질도 닮았어요.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음악을 틀어놓고 그 음악이 끝날 때까지 스스로 안무를 만들며 놀아요. 저는 공부 열심히 시켜 뉴욕 월가의 펀드매니저를 만들고 싶은데, 벌써부터 거울 보고 춤추고 하네요. 누굴 닮아서 저러나 했더니 어머니께서 어렸을 때 제 모습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도 어렸을 때 춤추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동네에 노래를 잘 부르는 아주머니가 있어 노래를 해달라고 곧잘 졸랐다고 한다. 밭일 하기도 바쁜데 어린아이가 노래까지 불러달라니 아주머니가 얼마나 귀찮았을까마는 밭고랑 사이에 드러누워 빨리 노래를 부르라며 떼를 쓰는 아이를 이길 수 없었다고 한다. 반면 딸은 아주 야무진 것이 엄마를 쏙 빼닮았다고.
“집사람은 자기 절제가 강하고 검소한 편이에요. 쇼핑을 할 때도 리스트를 작성해 쇼핑을 나가요. 그마저도 몇번 생각을 한 후 결정을 하죠. 알뜰살뜰 아껴서 아이들 학습지 하나라도 더 시켜야 한다는 아내를 보면 믿음이 가고 고마워요.”
아내의 요리솜씨에 대해 질문을 하자, “냉정하게 보면 별로”라고 답한다. 나중에 아내가 이 기사를 보고 항의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이 부엌일을 도와주는 남편이 아니기 때문에 반찬 타박은 꿈도 못 꾼다고.
“재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고향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에게 아내가 함께 살자고 권유를 했어요. 그때 저는 아내의 진심어린 눈을 보았죠. 어머니께서 ‘평생을 여기서 살았고, 정든 사람들이 많다’며 끝까지 버티셔서 서울로 모시지 못했지만 그때 아내가 얼마나 고맙던지…. 홀로 계신 어머니께 자주 안부 전화를 드리고 불편한 건 없느냐고 세세하게 묻는 아내를 보면 사랑이 마구 샘솟는다니까요.”
촬영이 없는 날이면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도 밀어주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다고. 요즘엔 네살난 채린이의 재롱 보는 맛에 귀갓길을 재촉한다고 한다. TV에서 아빠 얼굴이 보이면 ‘아빠 나왔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고.
“방송일이 불규칙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 부족하죠. 집에 들어가면 딸아이가 제 얼굴에 찰싹 볼을 대고 기대어 오래오래 있으려고 해요. 마치 빈 시간을 채우려는 듯이. 그럴 땐 제 사랑이 부족한 것만 같아 가슴이 뭉클해져요.”
아이들이 잠든 밤에 혹시 이불을 차버리지나 않았나 방문을 열고 들여다볼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그. 드라마 속 이미지와 현실의 그 사이에선 그리 큰 틈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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