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출범을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은 교육부총리 내정에 유독 뜸을 들였다. ‘개혁성 공동체의식 경영마인드 교육주체들의 호감도 등을 고루 갖춘 인사’라는 까다로운 조건을 고집한 끝에 선택한 인물이 지금의 윤덕홍 교육부총리 겸 인적자원부 장관(56)이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파문, 교단과 전교조의 갈등 등 교육계를 둘러싼 문제들이 속속 불거졌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윤부총리는 오히려 잦은 말 바꾸기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화여고 교사로 교육계에 발을 담근 뒤 대학 교수와 대구대학교 총장까지 지내는 등 교육분야를 두루 거치고, 적극적인 NGO 활동으로 명망을 쌓아온 그가 자신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전에 비난의 화살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 한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교육을 관장하면서도 결코 신뢰받지 못한 그의 심중에 어떤 생각들이 들어 있는지 들어보기 위해 그를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과 관련해 국무위원들이 제출한 사표가 반려된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가자 그가 막 퇴근하고 돌아와 있었다. 웃옷을 벗어놓을 새도 없었던 그는 웃는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아내 장순애씨(53)는 “우리 집이 좁아서” 하며 쑥스러워했다. 25평형 아파트인 그의 집에는 아내와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부총리로 임명된 후 사비 1억4천만원을 들여 마련한 전셋집이라고 한다.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 윤부총리는 줄곧 어색해 하는 아내에게 농담을 던지며 긴장을 풀게 했다. 공개석상에서만 보아오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내는 “원래 유머가 있는 데다 술 한잔 드시면 더 재미있어진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허허’ 하며 소탈하게 잘 웃었는데 그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인터뷰 내내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아내는 “대학에 있을 때는 새벽 2∼3시까지 술 마셔도 힘들어하거나 아팠던 적이 없던 사람이 서울 와서는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그는 워낙 타고난 체력이 좋은 사람인데 감기에 걸려 골골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서울살이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대한민국 국민 치고 교육에 관심 없는 사람이 없어요. 반 전문가예요. 그러다 보니 다들 한마디씩하고, 쌓인 게 많죠.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가 너무 높다 보니 공교육이 학부모들의 기대와 열기에 못 미쳐서 그렇지 그렇게 무지막지하지는 않아요.”
그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수준이 읽기 쓰기 수학 과학 등을 중심으로 OECD 가입 국가 중 월등히 우수하다”며 “우리 교육이 가진 장점도 많은데 지나치게 비하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교육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는 취임하자마자 말과 행보가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언론에 비춰지면서 교육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더욱 떨어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게 사실은 이렇습니다. ‘수고를 해주십사’ 하는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을 하고 난 저녁부터 휴대전화가 빗발쳤어요. 받아 보니 서울의 신문 기자들이라고 하면서 ‘서울대학 공익 법인화’와 ‘NEIS’에 대해 묻길래 아직 정식으로 임명장도 받지 않았는데 무슨 정책을 발표하겠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평소 지론은 있을 것 아니냐’ 하길래 ‘그런 것은 있다’ 하고 사견을 이야기했어요. NEIS만 해도 사실 나는 그때 그걸 잘 몰랐는데 기자가 ‘NEIS가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어 ‘인권 침해 소지가 있으면 유보해야죠’ 했어요. 원론적으로 대답을 했는데 아침에 비행기로 서울에 오니까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윤교육 NEIS 유보’ 하면서 기사가 난 거예요. 그러니 국민들 눈에는 제가 경솔한 사람으로 보였겠죠. 그런데 전 지금껏 왔다갔다한 일도 없고, 늘 초지일관 인권에 유린되는 부분이 있으면 삭제하고, 교육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검토하고, 해킹 등 보안에 문제가 있으면 보완하겠다고 말했어요. 지금도 늘 같은 논리예요. 근데 신문에는 내가 왔다갔다하는 사람으로 나오니까 힘들었죠.”
그는 자신이 대학 교수를 지냈기 때문에 말과 행동이 퍽 자유스러워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대해서 별 부담을 안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결과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나타나자 아무리 사견이라도 공인으로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되겠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고. 그로서는 호된 신고식을 치른 셈이다. 집에서 그를 지켜보는 아내의 마음고생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내는 씩 웃기만 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때는 아침에 눈만 뜨면 교육부 어쩌고 나오니까 정말 힘들었어요. 나중에 해임안 이야기까지 나올 때는 사람 만나기도 싫고, 완전히 왕따당하는 기분이었어요. 혼자 생각이지만 빨리 그만 때려치우고 이판에 내려가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어요.”
더욱이 아내는 처음부터 교육부총리 자리를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교육 분야에 오래 몸담고 있는 남편을 30년 가까이 내조해온 터라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든 자리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욕심만 챙길 수는 없는 일이라 마음을 바꾼 뒤로도 ‘이제 걱정길로 들어서는구나’ 생각했다고. 각오는 했지만 뭔가 해보기도 전에 이렇듯 집중 포화를 받을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내는 그러나 혼자 가슴앓이를 하다가도 남편이 퇴근해 돌아오면 “그래도 어쩌겠냐”며 위로했다.
“혼자 힘들어하다가도 저녁에 들어오시면 ‘그래도 어떡하냐’고, ‘여까지 왔는데 이겨나가자’ 그러기도 하고, 그 심정 오죽하겠나 싶어서 저녁에 파김치 다 되어 오시면 일찍 주무시게 하고 그랬어요.”
평소 끼니를 거르는 일이 없던 윤부총리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이런 남편을 위해 아내는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며 죽을 끓여 내놓았다. 아내의 위로가 그에겐 적지 않은 힘이 됐다. 윤부총리는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는 건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우리 마누라 힘이 컸어요. 왜냐면 저는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대해 신경을 안 써요. 집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도 우리 마누라가 다 챙겨주니까 제가 안심하고 밖으로 돌아다닐 수 있어요. 사실 우리 마누라가 도와준 게 많죠.”
남편이 갑작스럽게 비행기를 태우자 아내는 쑥스러워하면서도 남편이 “가장으로서는 빵점”이라고 말한다.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시한 윤부총리로서는 인색한 화답을 받은 셈이다.
윤부총리는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데는 아내의 도움이 컸다고 말했다.
“제가 원래는 여행을 참 좋아해요. 대학에 있을 때는 주말에 연휴가 끼고 하면 우리 마누라랑 차 몰고 전라도로 서해안으로 잘 돌아다녔는데 요새 그걸 못하니까(허허) 답답하긴 답답하죠. 여기 와서는 둘이 같이 하는 일이 산에 올라가고, 산책하는 정도가 다예요.”
대학에 있을 때는 부부가 함께 모임에 나가는 일도 많았다. 꼭 모임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은 함께 다니는 걸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윤부총리가 주말에도 집에 있는 시간이 없다 보니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다.
“여고생의 동정심 자극하는 가난한 총각선생이 교육부총리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두 사람은 윤부총리가 이화여고 교사이던 시절,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윤부총리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화여고 교사가 됐는데 그의 꿈이 처음부터 교사였던 건 아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며칠 안돼서 교수님이 부르더니 이화여고에 가서 수업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좀 하다 신문사에 들어가야지 생각했는데 완전히 자리잡게 됐어요. 수업하는 것도 재미있고, 아이들도 예쁘고(웃음). 교육 현장에 내가 빠져버린 거예요.”
그때 그의 나이 스물 여덟, 대학을 갓 졸업한 총각 선생인 그는 여고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신사복이 없던 그는 동대문 시장에서 파는 헌옷을 사 입고, 넥타이 매는 게 어색해 점퍼를 입고 다녔는데 학생들 눈에는 그의 그런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중에 졸업생들한테 들으니까 그때 아이들은 ‘윤덕홍 선생은 똑똑하고, 상당히 꿈이 있는 사람인데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꿈을 못 펴고 학교에 와 있는 거다’ 생각했대요. 전 스승의 날에도 먹을 것을 선물로 받고 그랬어요. 못 먹고 다니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지(웃음).”
아내가 기억하는 교사 시절의 윤부총리의 모습은 좀 다르다. 자그마한 키에 검은 안경을 쓴 모습이 그렇게 당차 보일 수 없었다는 것.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남편이 교육부장관은커녕 대학 교수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평생 교사로 살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원 공부를 계속한 윤부총리는 전공을 제대로 살리고 싶다는 생각에 교사 생활 8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그 이듬해 영남전문대 교양과 교수가 됐다. 동경대학에서 4년간 유학하고 돌아와서는 대구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노대통령이 그를 교육부총리로 선택할 때 교육계의 각 분야를 고루 거쳤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명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그에게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전문대학, 대학에서 일하고, 총장 경력까지 가진 사람은 많지 않지 않습니까. 잘 해주시리라고 기대합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더욱이 시민단체 운동을 활발히 했으니 개혁적인 마인드가 있고, 학내 분규가 있던 (대구)대학교에서 직선 총장까지 지냈으니 갈등이 빚어지면 중재역할을 잘 하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갖게 한 것. 재미있는 건 그가 대구대학 총장 시절, 지방대학육성 특별법을 만들려고 국회에 와서 국회의원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당시 노무현 의원을 만나 “교육부장관 자주 바꾸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물론 자신이 교육부장관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한 말이다.
그는 임기중에 사교육비 경감과 지방대학 육성, 단위학교의 민주화를 통한 교단 갈등 해소, 경쟁력 있는 대학 만들기 등 네 가지 사안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사교육비 경감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은 만큼 그 열화와 같은 욕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야 하지 않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윤부총리는 “장기적으로는 학부를 없애자, 대학입시 제도를 완화시키자, 학교 성적을 내는 방법을 다양하게 하자 등 여러가지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그중 방과후 교실에 대해 큰 의욕을 보였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나면 거의 유휴시설이나 다름없는 학교 공간을 활용해서 축구나 무용, 글쓰기나 그림, 영어회화 등을 가르치는 제2의 학교를 만들자는 것.
“학교장들이 다양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학교 운영위원회와 지역주민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외국에 오래 살다가 돌아온 가정주부나 미술대학 교수였다가 정년퇴임한 사람 등 지역의 인재가 교사로 참여하면 사교육비 경감에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그는 전국의 80∼90개 학교를 선정해 시범적으로 실시를 해본 뒤 평가 결과가 괜찮으면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관건은 학부모들이 얼마나 참여해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학부모들이 사교육의 효용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한다고 했다.
“여러가지 조사에 의하면 선행학습이 결코 그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결과가 나와요. 더군다나 과외로 자란 아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없어 어른이 되면 힘든 삶을 살 수 있어요. 우리 아이들의 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지 걸핏하면 학원 보내고, 과외 시키는 건 제발 안했으면 좋겠어요.”
그에 따르면 사교육비 경감대책은 현재 어느 정도 골격이 잡힌 상태이고, 그 실효성을 검토한 뒤 연말쯤 구체적인 대책이 나올 전망이다.
그는 교육부총리가 되고 보니까 남다른 인내심이 필요하더라고 이야기했다. 시대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10년 앞, 1백년 앞을 내다보는 정책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러나 교육부총리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부 한사람 한사람에게 ‘내가 열심히 해서 우리 교육이 바뀐다’는 사명감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그는 직원들에게 뭘 지시하기 전에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도록 설득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그는 다음날 일정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교육부 직원들과 과별로, 팀별로 술자리를 마련해 가볍게 한잔씩 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눈다고 한다.
“우리 직원들 이야기 들어 보면 내가 소탈하대요. 제 성품이나 성격이 적극적이고 밝아서 며칠 같이 지내다 보면 금방 좋아하게 된대요(웃음).”
그러나 사람이 좋다고 좋은 정책이 나오는 건 아니라는 걸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빈틈없는 업무 추진과 함께 공무원들을 독려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자신의 성격에 녹여볼까 생각중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곳인 만큼 ‘함께 사는 사람, 사회 일부로서 공헌하는 사람’을 키워내는 교육제도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번 사람, 스포츠로 성공한 사람,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 정치권에서 이름난 사람들 보면 모두 공통점이 있어요. 열심히 산다는 것과 수단과 방법이 합리적이라는 거죠. 이승엽 선수가 연습하는 걸 보세요. 남들보다 훨씬 많이 해요. 성공한 기업가들도 보면 남들보다 잠을 훨씬 적게 자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연구하죠. 요즘은 어떤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에 대해 살아온 과정은 생략하고 결과만 이야기하는데 실은 그 수단과 방법이 잘못된 경우 오래 못 갑니다.”
그의 이러한 지론은 교육정책을 마련하는 데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두 아들의 아버지인 그의 자녀교육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과 대구에서 혼자 지내며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작은아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 성실할 것’ 그리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하지 말 것’을 늘 강조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아이들이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허황한 꿈을 꾸지 않고 착실하게 자기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성인으로 잘 자라줬다며 흐뭇해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교육을 움직이는 건 주부들”이라며 “교육정책은 멀리 내다보고 마련해야 하니까 긴 호흡으로 천천히 가되 또박또박 갈 수 있도록 기다려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윤덕홍의 교육정책’, 긴 안목으로 할 테니까 예쁘게 보고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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