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스키숍을 운영하는 사업가 김정우씨(31)와 4년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 모델계에 입성하기 위해 신혼의 단꿈마저 포기했던 홍진경(26)이 최근 귀국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귀국 사실을 알리고 서울 청담동 신혼집에서 모처럼 한가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홍대 근처에서 만났다.
전보다 많이 자란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전보다 많이 야윈 모습이었다. 귀국한 지 며칠 안돼 시차 적응이 덜 된 데다 병원 신세를 질 만큼 독한 감기 몸살에 시달린 탓이다. 그럼에도 인터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려운 걸음을 한 그는 2,3년 뒤에나 돌아오겠다던 당초 계획보다 빨리 미국에서 돌아온 이유를 밝히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몇년 전 파리에서 모델활동을 할 때도 컬렉션이 열리는 시즌 동안에만 파리에 있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뉴욕 컬렉션 기간이 10월초부터 10월 중순까지인데 제가 출연하는 쇼가 이미 끝난 데다 다음 컬렉션은 2월에나 열리기 때문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었어요. 거기 있으면 집세만 나갈 테고, 무엇보다 신혼인데도 혼자 지내는 오빠(홍진경이 남편을 부르는 호칭)에게 미안해 서둘러 귀국했어요.”
햇반과 우메보시로 ‘연명’한 뉴욕생활
홍진경이 뉴욕으로 건너간 것은 지난 8월초. 일을 위해 신혼의 단꿈마저 접어두고 과감히 미국행을 선택한 그는 프랑스에 본사를 둔 유럽의 모델 에이전시 비전(VISION)과 계약을 맺었다. 비전은 뉴욕에 진출한 지는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백50여개의 에이전시 가운데 5위권 안에 들 정도로 최근 급부상한 에이전시. 이름만 대면 알만한 톱모델들이 즐비한 비전에서 그는 유일한 동양인 모델이라고 한다.
“모델 에이전시에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워요. 세계 각국의 모델들이 같은 꿈을 가지고 찾아오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하거든요. 그들과 함께 오디션을 봐서 들어갔는데 일단 저는 외국에서 선호하는, 키가 크고 동양적인 얼굴을 갖고 있어서 유리했어요. 뉴욕에도 동양인 모델이 많지만 대개 서구적으로 생겼거든요. 프랑스에서 베네통 모델을 한 경력도 많은 도움이 됐어요.”
그는 처음 경험하는 뉴욕생활이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평소 영어공부를 꾸준히 해온 덕분에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었고, 워낙 사교적인 성격이라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지낸 것.
“그야말로 ‘에브리데이’ 오디션이었어요. 아침 일찍 에이전시측에서 오디션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면 그리로 가서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모델들과 함께 줄을 서서 오디션을 치르죠. 거기서 토미나가 아이, 오마이 같은 톱모델들과 많은 얘기를 많이 했어요. 한국 모델 백윤혜도 만났고요. 하지만 외로운 사람들끼리 수다떠는 정도지, 매일 전화통화하고 집까지 오가는 친구는 못 사귀었어요. 오디션을 보다 보면 하루가 다 가버리거든요.”
그는 이번 뉴욕 컬렉션에서 주목 받은 브랜드인 ‘드레스’와 ‘빈티지라인’, 두개의 쇼에 참가했다. 파리에서 활동할 때는 네 개의 쇼를 했는데 이번에는 늦게 가서 오디션을 많이 놓치고, 그를 관리해주는 에이전시 담당자와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돼 많은 무대에 서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데다 뉴욕 컬렉션이 끝난 뒤에도 LA에서 열린 한인 1백주년 행사의 사회를 보고, 캐나다 밴쿠버, 몬트리올 등지로 쇼를 하러 다니느라 몸을 혹사해 많이 지치고 힘들었다고.
그런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드는 것은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고국에 대한 향수였다. 본래 씩씩하게 잘 돌아다니는 편인데도 한인타운에 나가거나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때면 왠지 한국이 그리워졌던 것. 특히 뉴욕 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박경림을 만났을 때와 한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패션기자를 쇼장에서 만났을 때는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한 적은 없어요. 한국에서 햇반과 우메보시를 가져갔거든요. 우메보시는 제가 즐겨 먹는 매실로 만든 일본 장아찌예요.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미국음식은 기름지니까 밥과 우메보시로 연명했죠. 덕분에 살이 4~5kg 정도 빠졌는데, 한국에 와서 다시 불었어요. 계속 아프다 보니 밥 먹고, 약 먹고, 잠만 잤거든요.”
외롭고 힘든 뉴욕 생활을 그가 꿋꿋하게 견뎌낸 데는 남편의 외조가 한몫했다. 집에 컴퓨터가 없어 메일을 보내려면 한인타운까지 나가야 했기에 남편과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전화통화만 했는데, 힘들고 지칠 때 하소연을 늘어놓으면 따뜻한 위로의 말 대신 따끔한 충고로 그를 자극했다고 한다.
“그때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저에게는 많은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제 말을 듣고 당장 들어오라고 했다면 당시에는 의지가 됐겠지만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제 일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얘기잖아요. 돌아올 생각말고 거기서 최선을 다하라는 오빠의 말이 저를 더욱 강하게 단련시킨 것 같아요.”
서로 간섭하지 않고 싸워도 금방 풀어지는 ‘쿨한’ 부부
지난 5월 스키숍을 운영하는 김정우씨와 4년 열애 끝에 결혼식을 올린 홍진경.
남편 김씨는 타국에서 힘들어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던지 LA에서 한인 1백주년 행사가 열렸을 때 그곳에 사는 누나 집에 들러 그를 만나고 갔다. 미국에서의 만남은 그때뿐이었다. 그가 귀국해서도 두 사람은 회포를 풀기는커녕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고 한다.
“오빠가 사업상 굉장히 바빠요. 외국에서 손님들이 계속 찾아오고, 스키숍도 운영해야 하니까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해요. 거기다 대고 뭐라 하겠어요. 그저 안쓰러울 뿐이에요. 저희 부부는 결혼 전이나 후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요. 오빠는 제가 일 때문에 몇달씩 집을 비워도, 밤늦게 친구를 만나러 나가도 별로 상관하지 않아요. 룸메이트처럼 서로 간섭하지 않고 각자 일을 하니까 결혼 전후의 차이를 느끼지 못해요.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한 집안의 며느리라는 의무감이 생긴 거예요. 이제는 사람들이 저 하나만을 놓고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누구의 아내, 며느리로서도 바라보겠구나 하는 부담감이 있죠.”
그의 시어머니는 학교 운영과 건설업을 하는 커리어우먼. 외국에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가 많아 해외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시어머니는 지금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귀국해서는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미국에 있을 때는 가끔 전화통화를 하며 안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마침 그때는 어머니도 미국에 계셨어요. 제가 LA에 있을 때는 뉴욕, 뉴욕에 있을 때는 LA에서 지내셨는데 저를 딸처럼 여기며 무척 잘 대해주세요. 남편의 내조에만 매달리기를 바라는 시어머니들도 많다던데 제가 일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시고, 어디서든 소리 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시죠. 존경스럽고 배울 점이 많은 분이세요. 그런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편은 제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요. 오히려 집에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집안 분위기가 참 자율적이고, 개방적이에요.”
그는 좀더 신혼을 즐기면서 원없이 일하다 아이를 키울 자신이 생겼을 때 2세를 갖겠다고 말했다.
지난 5월17일 결혼식을 올린 후 남편과 같이 산 날이 며칠 되지 않아 이렇다할 추억거리를 만들지 못했다는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두번의 신혼여행. 결혼식을 올리기 전 남편과 둘이서 열흘 동안 몰디브로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결혼식을 마친 후에는 신혼여행과 일을 겸해 뉴욕에 다녀온 것.
“신혼여행인데 일하러 갔으니 오빠한테 무척 미안했어요. 그런데도 오빠가 기꺼이 동행해줘서 고맙기도 했고요. 저의 옛 매니저이기도 한 오빠 친구가 동행해서 셋이 같은 룸을 썼죠. 침대에서 셋이 같이 자기도 하고요. 비록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쉽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잊지 못할 여행이 됐죠.”
연애시절부터 지금껏 싸운 적이 거의 없고, 싸워도 금방 풀어질 정도로 그와 호흡이 잘 맞는다는 남편 김정우씨. 그에게 남편은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주는 단짝친구 같은 존재다. 그런 남편과 함께하는 결혼생활에 그는 무척 만족해했다.
“오빠와 결혼하기를 정말 잘했어요. 오빠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좋아해주는 따뜻하고 현명한 남자예요. 배울 점도 많고 매력도 많아요. 저는 외모보다 말이 잘 통하고 느낌이 오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오빠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연애시절 오빠와 대화하다 보면 존경할 만한 점이 많아 저도 모르게 끌리곤 했거든요. 그런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저로서는 즐겁고 감사한 일이죠.”
오누이처럼, 친구처럼 다정하게 사는 두 사람. 이들 부부에게는 아직 2세 계획이 없다. 홍진경이나 남편 모두 아무리 예쁜 아이를 봐도 10분이면 싫증을 낼 정도로 아이에 연연하지 않아 당분간 신혼을 즐기며 둘만의 시간을 만끽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 또래 친구들이 아이 때문에 놀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걸 보면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빠랑 얼마 전에도 얘기했지만 아이를 꼭 낳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언젠가 낳긴 낳아야겠지만 아직은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더 놀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좀더 즐기다가 정말 잘 키울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낳을 생각이에요.”
한 남자의 아내가 된 후에도 긴장감을 잃지 않고 톱모델로 해외 진출까지 시도하며 살아가는 그의 당당한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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