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펴고 있는 소프라노 신영옥(42)이 묵고 있는 호텔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커다란 CD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특급 호텔 객실과 CD 플레이어가 영 어울리지 않아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세계를 누비며 수준 높은 음악팬들을 사로잡은 프리마돈나가 호텔 방에까지 저걸 들여놓고, 듣고 부르기를 반복했을 것을 상상하니 얼른 웃음을 주워담게 됐다. 한국 공연을 앞두고 몇달 전부터 코칭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떠올랐다.
9월28일부터 10월4일까지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신영옥이 공연하는 오페라 ‘리골레토’는 91년, 그를 처음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서게 한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제 ‘신영옥 하면 질다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의 대표적인 레퍼토리가 됐지만 좋은 공연을 위한 그의 악기 손질은 멈출 줄 모르는 모양이다.
“공연을 할 때마다 항상 코칭을 받아요. 주위에서는 ‘이제 그런 거 안해도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누가 들어주는 게 중요하거든요. 공연하다 보면 저도 실수를 꽤 해요. 늘 뭔가 미숙한 점이 있어요. 예전엔 완벽하려고 아등바등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미숙함이 조금씩 나아지는 게 참 좋아요.”
팔에는 링거를 꽂은 흔적이 검붉은 멍으로 남아 있고, 발에는 온통 물집이 잡혀 있지만 그는 마냥 즐겁고 신이 난다고 한다. 더욱이 이번 공연은 지난해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공연 당시 연회 장면에 발가벗은 사람들을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연출로 화제가 된 데이비드 맥비커가 연출을 맡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출연을 결정하기 전에 DVD로 지난해 공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그는 “처음엔 걱정이 돼서 출연 결정을 계속 미뤘는데 생각해보니 다방면으로 시도해보는 시대가 온 것 같아 출연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몸을 꽁꽁 싸매고 나온다”며 까르르 웃는다. 이번 공연을 주최한 예술의 전당은 이 문제의 장면을 위해 오페라 가수가 아닌 배우들을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도 ‘이쁜이’라고 불러주는 아버지와 연애하듯 애틋하게 지내
신영옥의 이번 고국 방문은 오페라 공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10월15일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세계 테너 빅3’로 불리는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2003 빅 콘서트’를 갖고, 11월1일부터 23일까지는 지난 8월에 발매된 크로스오버 음반 ‘마이 송즈’ 발매 기념으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을 돌며 투어 콘서트를 할 예정이다. 처음부터 줄줄이 공연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월드컵 경기장 공연이 최근에야 확정되는 바람에 외국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제가 외국에서 지내고 있으니까 외국 공연은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더군다나 늘 ‘깍쟁이처럼’ 공연만 하고 떠나야 해 아쉬움이 남았는데 이번엔 오래 머물며 아버지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돼 너무너무 좋아요.”
8월 발매된 새 앨범 ‘마이 송즈’.
추석을 앞두고 귀국한 신영옥은 추석 연휴를 아버지와 단둘이 오붓하게 지냈다고 한다.
“추석 연휴 내내 아버님하고 있었어요. 아휴∼, 연애를 했죠(웃음). 무릎 맞대고 앉아서 얼마나 웃었나 몰라요. 지금도 식사할 때면 아버지께서 생선뼈를 다 발라서 밥에 얹어주세요.”
그가 명절을 아버지와 단둘이 보낸 건 어머니가 93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방송국 합창단에 들여보내기 위해 직접 풍금을 연주하면서 함께 노래 연습을 하고, 18세 때 유학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줬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는 어김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고, 금세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새 앨범 ‘마이 송즈’에도 어머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담겼다. ‘어머니’ ‘삶과 추억’ ‘사랑’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대중가요와 가곡, 외국민요 등 15곡을 직접 선곡했는데 외국곡 ‘Mother of mine’을 부를 때는 목이 메었다고 한다.
“리틀엔젤스 단원일 때 해외에 나가서도 많이 불렀던 곡이에요. 어려서는 잘 몰랐는데 나이 들어 노래하니까 가사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넘겨지지 않더라고요. 저처럼 엄마가 곁에 계시지 않은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가을밤’을 듣고 울었다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저 또한 노래를 부르면서 많이 울먹였어요. 자꾸만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풍금 치시고, 저는 바깥을 내다보며 노래하던 기억이 나서요.”
어머니 생각으로 울컥할 때마다 그를 다독이는 건 언제나 아버지다. 신영옥은 아버지하고 매일 통화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이북 말투를 닮아가고 있다고 얘기하며 웃는다. 칠순을 넘긴 아버지는 이미 불혹을 넘긴 딸을 아직도 ‘이쁜아’ 하고 부른다고 한다. 더욱이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무리하게 운동을 하는 바람에 허리 통증이 생겨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의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했다고 한다. 미국에 오실 때마다 냉장고가 채워져 있지 않으면 안쓰러워하던 아버지는 딸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비치된 냉장고 속을 갖가지 음료수로 가득 채워놓았다.
2000년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수잔나 역으로 출연했을 당시의 모습.
“직접 장을 봐오셨어요. 저기 어딘가에 강정도 있어요. 부침개도 갖다놓으셨고요. 정말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세요.”
이렇듯 아버지와의 관계가 애틋한데 한국에 들어와 정착할 생각은 없는지 궁금했다. 더욱이 그가 한국에 돌아와 여기저기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릴 때면 아버지는 늘 “다 관두라우!” 하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는 “(정착하고 싶은 생각이) 왜 없어요, 있어요”하고 말문을 열어놓고는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생각인 것 같지는 않고, 집에서 하도 그러니까요” 하며 웃는다. 그러고는 “바보스러울 지 모르지만 한국에 머무는 동안 되도록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능하면 오랫동안 못만난 동창들을 만나 편안하게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다”고 했다.
지금으로선 그에게 음악과 아버지에게 투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자람이나 부족함도 느껴지지 않는 안정된 모습이 그의 노랫소리만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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