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부터 작가 한수산씨(57)가 자리를 잡고 글을 쓰던 양평 집필실로 가는 길. 장마를 앞둔 6월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남한강의 풍광은 그야말로 자연이 주는 선물이었다. 그동안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떠나 한동안 비어 있어 썰렁할 줄 알았는데, 주인을 다시 만난 그의 집은 어느새 따뜻한 온기를 되찾고 있었다.
“지금 버클리대 동아시아센터 한국학연구소에서 방문학자로 있어요. 1년간 한국의 이민사에 대한 책도 좀 보고 연구도 할 계획으로 갔는데, 꼭 논문을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백수나 다름없죠(웃음).”
그가 아시아인의 이민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멕시코나 쿠바, 연해주 쪽은 기회가 닿는 대로 찾았고 이를 통해 몇편의 산문과 중·단편을 쓰기도 했다. 이번 연구는 이런 관심의 한 끝자락일 뿐이라고 한다.
“그분들을 만나보면 우리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아주 잘 알 수 있어요. 마치 판박이처럼요. 또 그분들 삶이 우리 국력과 아주 정확하게 결부된다는 걸 알 수 있죠.”
1년 일정으로 미국으로 떠났던 그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잠깐 돌아온 것은 15년 동안이나 ‘꼭 쓰겠다’고 마음을 품고 있었던 소설 ‘까마귀’(전 5권)가 최근 발간됐기 때문이다.
“누가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면 흔히 ‘소설 쓰고 있네’ 그러거든요. 그럴 때 소설은 참 쉬운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그런 의미예요. 그런데 그런 쉬운 소설을 한 작가가 10년 넘게 매달렸다? 어찌 보면 내 재주 없음의 반영이지만 좋은 의미로 받아들였으면 해요. 아! 소설도 10년 넘게 걸렸다더라. 그러니 나도 내 일 좀 잘 해보자. 그런 정신으로 집도 짓고, 길도 닦고….”
‘까마귀’는 44년말 태평양전쟁의 광기가 절정에 달하던 시절 일본 하시마탄광으로 징집되었다가 이듬해 원폭투하 속에서 주검으로 사라져간 조선인들의 처절한 삶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인 화가의 그림을 보고 떠올렸다는 제목 ‘까마귀’에 얽힌 사연을 들으면 그 역사의 비정함이 더 절절하게 다가온다. 원폭피해 이후 ‘어머니…’ ‘물…’ 하며 우리말로 신음하던 사람들은 일본인 구조대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고 그렇게 방치된 조선인 시체는 까마귀 떼에 쪼이고 찢기며 바다로 흘러갔다고.
최근 일제시대 때 원폭투하로 죽은 조선인들을 그린 소설 펴내
그가 이 작품을 위해 일본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89년부터다. 나가사키에 간 것만 해도 무려 일곱번이니 그동안 무수한 자료를 수집하고 읽어내려 갔다. 한번은 손바닥만한 일본 호텔방에서 여기저기 자료를 펼쳐놓은 채 잠이 든 그는 신음소리를 듣고 악몽에서 깨어나 운 적도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야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왜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써야 하나’하는 심정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한다. 하지만 결국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작품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방금 전에 ‘까마귀’ 다섯권을 다 읽었다는 사람이 전화를 했어요. 만감이 교차된다고 하더라고요. 또 읽다 보면 주인공들이 하는 얘기나 행동이 마치 지금의 얘기 같더래요. 참 고마운 얘기죠. 과거사를 그저 과거로만 그리는 건 쉬워요. 지금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어떻게 감동을 전하는가, 그게 고민이었죠.”
또 하나의 고민은 일본과 일본인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의 문제였다. 우리가 볼 때는 그들이 가해자지만 일본인들도 전쟁에 미쳐간 나라의 민중으로서 살아야 했던 피해자라고 그는 생각한다. 작품 중에 당시 쌀값이 얼마인지까지 기록한 것은 바로 그들 민중의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결국 그가 그리고 싶은 것은 사람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솜털같이 따뜻한 거예요. 아무리 슬픈 중에도 거기에는 웃음도 있고, 눈물도 있고, 사랑도 우정도 있죠.”
한수산씨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한국의 이민사를 연구하고 있다.
좀 성급한 감이 없진 않지만 지난 4월초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난 터라 그와 가족의 미국생활이 궁금해졌다.
“어려서 춘천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고등학교와 미군부대가 바로 옆에 붙어 있었어요. 그래서 미군들도 많이 봤죠. 자연히 미군부대 옆에 있는 기지촌과 양색시도 볼 수 있었고요. 그런데서 자라다 보니까 미국이나 미군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가 없어요. 그동안 어디서 미국 취재를 부탁해도 안 갔어요.”
지금 그가 머물고 있는 버클리대 근처는 한국인이 많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거의 없다고 한다. 60년대 히피의 천국이었고 미국 여성학의 본거지인 버클리대학은 그야말로 자유스러운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고. 또 학생 중 유색인종이 반이 넘다보니 캠퍼스에 서 있으면 한국말 하면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타지 사람에게는 잠시 머물러도 그곳의 문화가 보이는 법.
“지금 사는 데가 주택가인데 거기선 흑인을 볼 수가 없어요.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하는 건 아닌데 정확하게 구역을 나눠 사니까 그 이상의 차별이 어디 있어요. 어느 한계 이상의 진입은 허용하지 않는 사회라는 느낌이 들었죠.”
반면 장애인이나 노인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장치는 역시 배울 점이 많다고. 특히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우리가 보기엔 극진한 수준인데, 그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만 해도 몇 퍼센트 이상은 장애인을 위해서 세를 주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이라크전이 한창이던 4월 미국 언론이 한국을 보는 시각은 우리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시내 슈퍼마켓에 쌓여있는 수많은 잡지와 신문에는 ‘다음은 북한인가?’ 하는 식의 제목을 단 기사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전 참 전쟁영화를 싫어해요. 주인공이 총탄을 피해서 나가는 것을 그리기 위해서 옆에서 막 죽잖아요. 그런데 죽어가는 엑스트라의 인생을 보면 그 삶에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부모도 있잖아요. 그런 식의 묘사가 싫어서 전쟁영화는 거의 안 봤어요.”
설거지를 하며 시름을 잊는 즐거움 느껴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열사람 죽는 대신 두 사람이 죽는 게 더 평화로운 것’이라는 논리는 인류애, 휴머니즘도 아니라는 게 그의 신념이다.
이번 미국 일정에는 아내 이성순씨(57)는 물론, 대학 졸업반인 딸과 일본에서 공부 하는 아들까지 모두 휴학을 하고 함께 떠났다. 다들 올 한해 다양한 공부를 하는 기회로 삼을 계획인데 아내 이씨도 버클리대에서 여는 강좌 몇개를 들으려는 눈치라고 한다.
이성순씨의 전력도 독특한 점이 많다. 얼마전까지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공부를 했다는 것. 지금은 석사논문만을 남겨 놓은 상태인데 같은 학교 철학과에 다니는 딸과 동시에 공부를 한 셈이다.
한수산씨와 아내는 춘천교대 1학년 때 만난 동갑내기 부부다. 교대 졸업 후 남매를 키우며 평범한 주부로 지내던 아내 이씨는 80년대말 일본에 있을 때 일본대에서 문예공부를 하고, 이후 다시 선택한 것이 바로 여성학이라고. “아마 웬만한 교수들보다 나이가 많을 거예요. 남들은 다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왜 그리 열심히 하는지…” 하고 슬며시 던지는 말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믿음이 묻어 나온다.
여성학 하는 사람의 남편이기도 한 그는 집안에서 얼마나 평등하게 지낼까. “집안일이요? 그런 쪽은 자유로운 편이죠. 제가 교대 졸업하고 다시 경희대 들어가느라 재수하던 시절부터 아는 사이니까요. 일본에서 살 때 집사람은 대학 다니고 저야 집에서 글만 쓰고 있었으니까 많이 했죠. 저 집안일 잘해요.”
한수산씨는 최근 15년 동안 구상한 ‘까마귀’를 탈고, 출간했다.
오히려 요즘은 게으른 탓에 아내가 거의 다 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설거지를 하면서 시름을 잊는다’는 나름의 가사노동에 대한 느낌들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제가 잡기에 능하질 못해요. 실은 맘이 약한 사람이라 잡기에 한번 빠지게 되면 헤어나질 못할까 겁나서 안하는 것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항상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온통 검정색으로 꾸민 서재를 둘러보면 다양한 그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적잖은 엘피음반과 CD들, 책장 사이에 기대어 있는 거문고 하며 곳곳에 걸려 있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사진 등이 그것.
특히 그가 한때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90년대 중반 지금의 기독교방송이 개국했을 때 일이란다. “제 평생 가장 큰 ‘외도’였죠. 한 열달을 진행했는데, 그것도 하루 두시간씩 생방송을요. 그때 재미있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브람스를 틀면서는 브람스의 어머니하고 아버지의 나이 차이가 18년이 나는데 어머니가 18년 연상이죠,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의 음악이 어찌 우울하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었어요. 당시 청취율 2위까지 올려놓고 그만뒀죠.” 그러고 보니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클래식 음악 진행자로서 제격이었을 것 같다.
미국에서는 동네 교육센터에서 소묘를 배울까 생각중이란다. 사실 그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글짓기 대회가 아닌 사생대회에 자주 대표로 뽑혀 나갔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의 불량스러운 분위기가 싫어서 미술을 떠났지만 그의 곁에는 아직도 좋은 화가와 조각가 친구들이 남아 있다.
앞으로 그가 쓰고 싶은 글은 두 가지다. 남한산성을 무대로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청나라에게 치욕적으로 항복한 효종대왕 이야기와 숱한 순교자를 낳으면서도 우리나라에 뿌리내린 천주교회사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를 통해 고결한 영혼을 소유한 우리 선조들을 찾아내고자 한다.
가볍고 재미난 것만 찾는 시대인데 무거운 역사소설이 잘 팔리겠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명쾌하다.
“믿어야죠. 그래도 열심히 쓴 소설에 대해서 읽고 감동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라는 걸요. 그동안 저는 꼭 노력한 만큼만 책이 팔렸는데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1년 후 그가 담아올 이야기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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