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전세계적으로 굵직한 시합이 있을 때마다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저마다 손에 땀을 쥔 채 긴장감을 느끼며 환호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탁구공에 울고, 탁구공에 웃는 시합장 한가운데는 오똑한 콧날의 예쁘장한 얼굴로 유독 눈에 띄는 여자선수가 있었다. 작은 탁구공 하나로 한반도뿐 아니라 전세계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집념의 승부사’ 현정화(34).
86년부터 한국 여자탁구의 대들보로 부상한 그는 91년 북한의 이분희 선수와 함께 남북 단일팀으로 세계탁구대회에 출전해 세계 최강으로 알려진 중국 선수의 무릎을 꿇게 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 인기를 몰아 화장품 모델로 변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것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 현씨가 이제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 양성에 정성을 쏟고 있다.
“올 7월에 둘째아이를 출산할 예정이에요. 이렇게 운동복을 입고 있으면 배가 불렀는지 사람들이 잘 몰라요. 그래도 사진은 배가 안 나와 보이게 잘 찍어주세요. 아셨죠? (웃음)”
평소 가냘픈 몸집,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매서운 눈빛을 지닌 현정화. 그러나 출산을 앞둔 엄마로서의 모습은 여느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국가대표 코치 맡아 부담감도 많아
아내와 마찬가지로 현재 기업체 탁구팀 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 김석만씨, 세살배기 딸 서연이와 함께.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경기상업고등학교 체육관. 한국마사회 소속 선수들이 한창 연습중이었다. 체육관에 들어서자 탁구대 위를 현란하게 오가는 탁구공 소리와 공의 움직임에 맞춰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들의 발소리만 들려왔다. 그 사이를 뚫고 “그렇지, 바로 치지 말고 공을 잡아서 보내고 싶은 곳으로 보내” 하며 당차게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바로 한국 여자탁구의 신화를 일궈낸 주인공 현정화였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현씨의 모습은 현역 선수 시절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 그의 시선이 탁구공이 아닌 훈련받는 선수를 향하고 있다는 것뿐.
“운동은 결국 본인 스스로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도자의 역할은 20%정도에 불과하지요. 지도자는 선수에게 자극을 주고 바람직한 조언을 하는 사람이에요. 선수들도 지도자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운동을 열심히 하다 보면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하는 감이 오거든요. 그때가 되면 지도자가 손을 놓고 있어도 본인이 알아서 하게 되죠. 그렇게 되기까지,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선수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7년째 한국마사회 코치 생활을 하고 있는 현씨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이미 인정받은 상태. 지난해 부산 아시안게임에 이어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 여자탁구팀을 이끌게 됐기 때문이다. 태극 마크를 달고 국가대표 선수로 10여년 동안 뛰었던 그가 이제는 ‘국가를 대표하는 코치’라는 명예까지 안게 된 셈이다. 특히 지난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는 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때 ‘현정화 홍차옥’ 조가 중국을 꺾고 정상에 오른 이후 12년 만에 복식 우승을 일궈내면서 국가대표 코치 데뷔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런 만큼 올림픽을 대비해 또다시 코치로 임명된 것에 부담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현씨는 현재 둘째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가족들의 만류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현씨는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탁구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여자탁구가 지금 많이 어려워요. 좋은 선수가 없기 때문이죠. 선수 부재예요, 부재…. 부산 아시안게임 때 금메달을 따서 다행이었지만 썩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어요. 그래서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서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죠. 내년 올림픽에서도 다른 대안은 없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선수, 강한 선수들만 끌고 갈 생각이에요. 의지가 약하고 마음이 약한 선수들을 어떻게 데리고 가겠어요.”
사뭇 비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가 선수로 뛰던 화려했던 시절의 여자탁구 부활을 꿈꾸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독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현재 여자탁구의 두 기둥인 석은미와 이은실 선수는 나이가 많아 내년 올림픽 무대에서 선전을 기대하기에는 사실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현정화의 뒤를 이어 90년대를 지탱해온 류미혜와 김무교 선수까지 은퇴한 상태. 여자탁구의 크나큰 공백기를 메워나가려면 앞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현씨는 말한다.
매서운 눈빛으로 후배들을 꼼꼼하게 지도하는 현정화 코치.
요즘도 무거워진 몸으로 새벽에 어학원에 들러 1시간씩 공부하는 ‘독한 여자’
“강한 선수로 만들려면 먼저 아프게 만들어야 해요. 제가 운동하던 시절만 해도 배고파서 했던 경우가 많아 어려운 만큼 이겨내려는 의지도 강했어요.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환경은 좋아졌는데 상대적으로 의지가 약해요. 극복하려는 힘과 동기가 부족하면 시합에서 이길 수 없어요. 그래서 게임에서 지면 가슴이 찢어지게, 뼈가 시리도록 패배에 대한 아픔을 만들어주지요. 그렇게 아파야 가슴에 사무쳐서 의지가 꺾일 때마다 다시 일어날 힘이 돼주거든요. 저요? 아주 ‘독한 코치’예요(웃음).”
그랬다. 현씨는 지금은 독한 코치로 통하지만 과거에도 누구 못지않게 독한 선수였다. 연습을 할 때면 탁구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떨어진 공을 주우러 갈 때도 공에만 집중했다. 몸을 풀기 위한 비교적 느긋한 연습 시간조차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악착을 떨었을 정도였다. 또한 승부욕도 남달리 강해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국내 경기에서 한번 졌던 선수와는 다음 번 시합에서 반드시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현씨의 ‘독한’ 면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국제대회에 나가면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주일 동안 지속되는 시합 내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까지 설칠 정도로 예민했다. 그런 상태에서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티며 금메달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렇기에 탁구 강국 중국의 덩야핑도 이루지 못했던 탁구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바로 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위장병으로 인해 배를 움켜쥐고 나갔던 시합에서 개인전(단식)을 비롯해 복식, 혼합복식, 단체전까지 휩쓸어 전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기록을 달성해낸 것이다.
“탁구가 재밌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탁구실 앞을 지나가다가 선생님의 권유로 하게 됐는데 하면 할수록 점점 재미가 생겼어요. 특히 볼이 들어갈 때 묘한 매력이랄까, 재미를 느끼죠. 시합 중 받아내기 어려운 볼을 받아쳤을 때, 상대 선수가 상상도 못한 볼을 찔러 공격에 성공했을 때, 심리싸움에서 상대의 심리를 간파했을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 못하죠. 바로 그런 맛에 계속 탁구를 하는 거죠.”
이처럼 탁구를 사랑했지만 어린 나이부터 시달린 거듭된 훈련의 고통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승부욕이 강한 만큼 정신적 스트레스 또한 심했기 때문에 24세의 이른 나이에 은퇴를 했던 그. 하지만 ‘탁구 인생’을 ‘은퇴’할 생각은 없었다. 현씨에게 탁구와의 인연을 끊으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현씨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 현지호씨도 탁구선수였고, 남편 김석만씨(33)도 98년 전 주니어 국가대표 탁구선수 출신으로 현 포스데이타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언제나 일관된 표정과 말투로 냉정함을 잃지 않으며 살아왔던 그가 아주 잠깐 외도를 했다면 아마 93년 한국화장품 광고 모델로 나섰을 때였을 것이다.
91년 남북단일팀을 이뤄 세계탁구대회에 출전, 우승했을 때의 모습(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현정화).
“그것도 외도라고 할 수 없어요. 제가 한국화장품 소속 선수였으니까 탁구를 하듯이 일한 거죠. 하지만 제게 새로운 경험이긴 했어요. 그렇게 화장을 많이 한 것도 처음이었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것도 처음이었으니까요. 화장한 제 모습이 싫지는 않더라고요. 표정이 어색했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지금 다시 한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사실은 꼼꼼하고 섬세한 여성적인 면이 많거든요.”
내로라하는 여자 탤런트들 사이에서도 ‘이제 정말 인기스타가 됐구나’ 하며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화장품 모델이라는 얘기가 나도는 걸 감안하면 스스로도 영광스러운 경험을 한 것 같다는 현씨. 그러나 그는 화장품 모델 경험을 너무나 무심하게 말했다. 더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훈련중인 선수에게 “볼이 약하잖아, 계속 밀고 들어와야지” 하고 소리치며 불호령을 내린다. 정말이지 그의 인생에서 ‘탁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비비고 들어갈 자리가 없어 보인다.
탁구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의 정열은 끝이 없어 보인다. 그는 요즘도 무거워진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영어학원에 들러 1시간씩 공부를 한다. 그러면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체육학(운동생리학) 박사과정을 마친 정말 ‘독한 여자’다. 지금은 임신 때문에 논문만 남겨놓은 상태.
“현역 시절에 아무리 뛰어난 선수들도 은퇴를 하면 대개 묻혀버리잖아요. 사회에 나가서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선수시절의 화려함이 끝까지 지속되지 않죠. 그래서 여자가 예뻐지려고 몸치장을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가꾼다는 생각에서 공부를 시작했어요. 영양학, 생리학, 심리학 등을 공부하면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선수들이 부상을 당했을 때 빨리 조치를 취할 수도 있고, 뭘 먹어야 힘이 나서 잘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됐고, 어떤 선수가 꾀병을 부리는지도 알게 됐죠. 선수들 보는 눈만큼은 ‘도사’가 다된 거죠(웃음).”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시선만큼은 훈련중인 선수들에게서 떼지 않는 그에게서 ‘아줌마’의 모습을 엿보기는 힘들었다. 그만큼 말을 아끼고 자신의 본분에만 충실하며 한눈 팔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현씨라 하더라도 어엿한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이기에 ‘여자’로서의 생활은 어떨지 사뭇 궁금해졌다.
93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뒤 가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잘생긴 남자, 그리고 나만 위해주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밝혔던 현씨. 그후 탁구 동기이자 친구였던 남편을 탁구 파트너뿐 아니라 인생의 파트너로 삼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온 이상형 그대로인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두 사람은 10년간의 오랜 열애 끝에 98년 결혼에 골인했다.
“남편이 제게 항상 무엇이든지 양보하고 배려해주기 때문에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라서 부부싸움 할 일도 별로 없어요. 결혼은 연애와 달라서 생활이니까 서로 도와가면서 꾸려나가고 있어요. 살림이요? 요리는 곧잘 하는데 살림은 거의 못하고 있어요. 딸아이는 친정어머니가 함께 살면서 돌봐주시고요. 그래서 남편과 아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이에요. 둘째가 태어나면 아기 돌봐주는 사람을 둘 생각이에요. 둘째아이까지 맡아 키우시려면 어머니가 너무 힘드실 테니까요.”
합숙훈련이 많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은 현씨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딸 서연이(3)의 한마디 한마디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고. 그리고 틈만 나면 지갑 속에서 보물 1호인 아이의 사진을 꺼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을 늘어놓는다.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많은 딸아이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둘째아이를 가졌다는 그. 둘째아이가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지만 현씨는 기왕이면 딸이면 더 좋겠다고 한다.
“서연이가 유약한 아이로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처럼 독한 구석도 있고, 고집도 부릴 줄 알아야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고집을 부리면 아빠가 매를 들곤 하죠.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려면 어떤 상황이든 적응도 할 줄 알아야 하니까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해요. 둘째아이는 제가 워낙 바쁘기 때문에 태교도 제대로 못했어요. 조용한 음악을 듣거나 좋은 생각만 하려 해도 탁구만 떠오르니…. 임신을 하나 안하나 똑같이 생활하고 있거든요.”
별다른 태몽을 꾸지 않았던 서연이와는 달리 둘째아이는 강에서 여러 마리의 대어가 헤엄치는 꿈을 꿨기에 인생의 고비마다 월척을 낚을 것 같다며 슬그머니 웃는 현씨. 부모의 피를 받아 탁구에 대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을 법도 한 서연이는 나이가 어려서인지 아직 탁구에 대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탁구를 시킬 것이라고 한다. 다만 “탁구를 진정으로 재미있어하고, 잘한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 어느 것이든 마찬가지이겠지만 탁구에 대한 애정 없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다.
93년 화장품 광고 모델로 나섰을 때의 모습.
“선수로 뛸 때보다 지도자 역할이 훨씬 어려워요. 내 마음처럼 선수들이 움직여주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지도할 수도 없잖아요. 처음엔 ‘나는 선수생활할 때 저렇지 않았는데 쟤는 왜 저렇지?’ 하는 생각에 후배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제 기준에 맞춰서 선수들을 봤으니까요. 코치를 해보니까 예전에 선생님들의 입장도 이해가 가고 선수들의 마음도 읽을 수 있어서 도움이 돼요. 그래서 훈련이 끝나면 언니처럼 선수들과 다정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요.”
골프 하면 박세리가 있고, 야구 하면 박찬호가 있듯이 탁구하면 현정화가 있었다. 그는 스포츠 스타가 스포츠 종목의 인기를 좌우하는 시대이기에 더욱 자신의 기록을 깰 만큼 ‘독한 후배’가 나왔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울러 현씨는 “탁구 하나에 국한하지 말고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이 갈 길을 열어준 사람,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 성실한 사람으로 오래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며 자신의 바람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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