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라꼬예? 우리 아이들만 귀찮게 안한다고 약속하믄 괜찮심더.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아이들 팔아서 지가 유명해질 생각은 없기 때문임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김금옥씨(51)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여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하는 어머니의 보호본능. 그래서 인터뷰 장소도 아이들과 상관없는 장소로 하자고 아예 단단히 못박는다.
대구시 수성구 지산동에 위치한 한 작은 영구임대아파트. 병마와 싸우며 오갈 데 없는 그녀를 위해 정부가 마련해준 집이다. 10여평 남짓한 작은 공간. 침대 머리맡에 걸려 있는 봉사활동 대통령표창장이며 갖가지 불교경전, 그리고 베란다엔 아이들의 옷들이 가득 널려 있다.
“요즘엔 밤낮으로 연꽃을 접느라 좁은 집이 더 어수선하네예. 그래도 말임더, 열네살 때 집을 나와 지금껏 이곳저곳 떠돌며 살았던 지한테는 얼마나 과분하고 행복한 곳인지 몰라예.”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깡마른 체구에 작은 얼굴. ‘젊은 시절엔 참 고왔겠다’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도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그의 거친 손을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보는 이의 마음이 애잔해진다.
커다란 약봉지를 내보이면서 “하루 세 끼 먹는 밥보다 약의 양이 훨씬 더 많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김씨. 20년 전, 암으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후 지금까지 몸속 장기를 6개나 떼어내야만 했다. 게다가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자궁까지 들어냈으니 그의 표현대로 웃을 기운조차도 없는 게 사실인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금세 얼굴이 환해지며 이것저것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느라고 정신이 없다. “우리 하영이는 성장 호르몬 때문에 체구가 좀 작아예. 그리고 네살짜리 막내 선우는 요즘 재롱부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고….” 그가 지체장애아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99년. 췌장암을 앓으면서 인연을 맺은 남도스님과 함께 의기투합해 보림사에 ‘룸비니동산’을 만들면서다.
기차에서 앵벌이 생활하다 강간당한 후 밑바닥 인생 전전
처음엔 뇌성마비에 자폐, 간질환을 앓고 있는 민국이를 데려다 키웠는데 어느새 식구가 8명으로 늘어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어떤 이는 절 입구에 갓난아기를 몰래 버리고 가기도 했다. 매일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 하루 종일 말도 못하고 표정도 없는 아이들을 어르고, 먹여주고, 씻겨주며 같이 시간을 보내는 김씨. 집으로 돌아올 때면 이미 몸은 물먹은 솜마냥 천근만근. 그래도 요즘엔 오후에 아이들이 재활교육을 받기 때문에 조금은 손을 덜게 돼 그나마 낫다.
“서른살이 될 때까지 참말로 못된 짓 많이 하고 살았지예. 술 먹고, 몸 팔고… 그란데 요즘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예.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극락이 따로 없심더. 도와주는 분들도 많고,… 덕분에 오히려 지가 늙어서 호강이지예.”
시한부 밑바닥 인생에서 장애아들의 어머니로 거듭난 삶을 살고 있는 김금옥씨. 수원에서 태어난 그는 1남4녀 중 막내. 네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열세살 되던 해에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린시절의 아버지를 기억하면 늘 아파하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이 차이가 스무살이 넘는 오빠. 그녀에게 오빠는 아버지보다 더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오빠 역시 이미 처자식이 달린 몸이라 동생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중학교 진학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형편. 한창 예민한 사춘기 소녀에게 가난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 무렵 올케와 마음이 맞지 않았던 언니들이 수원역 근처에 따로 방을 얻어 독립하면서 그도 따라나왔다. 말이 독립이지 생활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언니들이 방직공장에 다니며 생활비를 벌기는 했지만, 어쩌다 쌀이 떨어지면 다시 오빠네에 손을 벌려야 했다. 쌀 한되 퍼주며 온갖 눈치와 구박을 주는 올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난이 죄인 탓에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
김씨가 지체장애아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99년 췌장암을 앓을 당시 남도스님과 함께 아이들을 위한 ‘룸비니동산’을 만들면서부터다.
“친구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모습이 제일 부러웠지예. 올케언니한테 당하고 오는 날이면 괜한 반항심에 무조건 돈 벌 궁리만 했심더.”
정말 돈을 벌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수원역 앞에서의 구두닦이. 그러나 그것도 둘째언니한테 들켜서 죽도록 매만 맞고 그만두어야 했다. 성이 풀리지 않은 언니는 아예 그의 머리카락까지 잘라버렸다. 맞아서 아픈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언니들이 더 야속했던 나날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결국 화장실 가는 척하며 나와 그 길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부터 김씨의 험난한 타향살이가 시작되었다. 역 대합실에서 노숙을 하며 앵벌이패에 이끌려 낮에는 기차에서 껌을 팔고, 밤에는 역 앞 사창가에서 손님을 유인하는 일명 ‘삐끼’ 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예기치 못한 시련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기차에서 껌을 팔고 있는데 재수없게도 공안요원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빌었지만 소용없었다. 막무가내로 열차 빈칸으로 끌려간 그는 반항할 틈도 없이 그만 그곳에서 순결을 잃고 말았다.
“너무 어려서 충격이 컸지예. 그전까지 삐끼 생활을 하면서도 언니들한테 손님을 끌어다주면 그냥 잠만 자는 줄 알았는데, 내가 일을 당하고부터는 언니들이 정말 힘들게 산다는 것도 알았고…. 정말 세상이 원망스럽더예”.
철모르던 시절, 힘겨운 나날이었지만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러운 때가 묻은 자신을 누가 반겨주겠는가 싶은 자괴감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쩔 수 없이 1년 정도 앵벌이 생활을 더 하면서 나름대로 요령도 터득했다. 공안요원에게 들키면 기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그러다 걸리면 경찰서 철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앵벌이를 그만두면서는 회충약·파리약을 파는 약장수를 따라 장터를 떠돌며 가수생활도 했다.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쳐주면 그게 좋아서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말이 가수지 그야말로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역마살 때문인지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젊은 나이에 장터를 떠돌며 앵무새처럼 노래나 부르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무작정 다시 대구행 기차에 오른게 18세 무렵.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인생이었기에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노래였기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술집생활’을 시작했다. 술로 매상을 올리던 시절. 초저녁부터 손님을 받기 시작하면 보통 새벽 3시, 4시까진 정신없이 술을 마셔야 했다. 술이 차오르면, 토하고 다시 마시고, 다음날 아침엔 어김없이 속이 뒤집혔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를 팔고, 웃음을 팔다보니 잦은 병치레에 벌어놓은 돈은 온데간데 없이 빚만 늘어났다.
젊었을 때는 그나마 자신을 찾는 곳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시골로 팔려다니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이곳저곳 술집을 떠돌다 개중엔 제 짝을 만나 살림을 차리는 이도 있었지만, 돈에 너무나 치이며 살아온 그에겐 사랑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에게 사랑은 사치나 다름없고, 어린 시절에 불미스럽게 당한 기억은 남자라는 존재를 불신하게끔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 26세 되던 무렵부터 시름시름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용하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녔지만 딱히 병명이 나오지도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바로 무속인. 그런데 그곳의 무당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더니 뜬금없이 무당팔자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정말 기가 막히데예. 죽어도 무당되기는 싫었고, 이러다 덜컥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억울해서 우짜노 싶어 몇날 며칠을 눈물로 새웠지예.”
그때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이 ‘어차피 막 나간 인생, 죽기 전에 좋은 일이나 하며 살아라’고 했던 누군가의 한마디였다. 그때부터 그는 일단 불경부터 사서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게 많아 처음엔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자꾸 읽다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보시 바라밀’이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러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이라 많은 돈으로 보시할 수도 없는 노릇. 궁리 끝에 뜨개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추운 겨울, 마음도 추운데 몸까지 떨고 있는 고아들에게 따뜻한 옷이라도 입혀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다행히 어린시절부터 언니들이 뜨개질하는 모습을 곁에서 종종 지켜본 터라 생각보다 뜨는 것이 쉬웠다. 그렇게 1년 동안 뜨개질한 스웨터가 무려 60여장.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고아원에 몰래 갖다줬다.
“그때 심정이야말로 표현할 수가 없심더.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으로 봉사라는 걸 해봤으니까예. 뜨개질 보시를 하면서 마음도 차분해지고 진짜 즐거워지데예. 결과적으로 남을 도운 게 아니라 나를 도운 셈이지예.”
그렇게 벅차오르는 마음과는 달리, 술집 주인들에게 그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손님 상대는 뒷전이고, 매일 털실 보따리만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있으니 술집에서 쫓겨나는 일이 다반사. 서러운 마음 대신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다. 4백원짜리 속옷에 잡곡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실값만 벌 수 있다면 다행인 시절. 그렇게 3년 동안 뜨개질을 하다보니 어느샌가 주변에 “술 파는 아가씨가 뜨개질해서 고아원에 갖다준다더라” 하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알음알음 김씨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85년, 경북도지사로부터 표창장을 받는 경사까지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췌장암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은 지난 87년. 서른세살 때 일이다. 급성황달로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흰옷을 입으면 옷이 노랗게 물들 만큼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당장 돈이 없으니 수술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때 문득 ‘어려울 때 꼭 연락하라’던 도지사가 생각나 염치불구하고 편지를 썼다.
처음엔 병명이 뭔지도 몰랐다. 수술 후에야 췌장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그의 몸속은 텅 빈 상태나 다름없었다. 췌장 주위로 암세포가 번져 쓸개, 위장, 췌장, 대장, 맹장에 이르기까지 여섯개의 장기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그것까진 좋았다. 의사가 수술 후 사흘을 넘기지 못한다고 시한부 인생을 선언했을 때는 머리마저 텅 빈 느낌이었다. 죄 많은 불쌍한 인생, 제발 살려달라고 부처님 앞에 빌고 또 빌었다. 아이들에게 줄 스웨터도 아직 덜 떴는데 벌써 날 데려가면 어떻게 하냐고 악을 쓰고 또 썼다.
그즈음 그의 뜨개질 보시와 함께 안타까운 사연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대구시민들이 발벗고 나서주었다. 연일 전달되는 성금과 가족처럼 병실을 지켜주는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다행히 수술 9일 만에 일반병실로 옮겨 그때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며 운문사 법춘스님의 도움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평생을 보시하며 살 테니, 더도 덜도 말고 딱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며 쓰러지면서까지 매일 3천배를 올렸다. 기도가 받아들여진 걸까? 사흘간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가 자신의 염원대로 10년 동안 삶을 이어가자 다들 기적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그의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기에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자신을 돕고 있는 셈이라고 하는 김씨.
그러나 다시 난소와 자궁 적출술이라는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위기가 닥쳐왔다. 공교롭게도 자궁을 들어내던 날은 10년 전 췌장암 수술을 받던 날과 같은 날,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 비록 여자로서의 인생은 끝이 났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담담했다. ‘이젠 몸뚱어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오직 나보다 못한 이들을 위해 보시하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비록 몸은 나보다 더 불편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맑은지 몰라예. 내가 아픈 것보다 아이들이 아픈 게 더 가슴 아픕니더. 사람들은 지체장애아라고 손가락질하지만도 몸이 성하믄 뭐 합니꺼. 마음이 장애인 사람들이 더 많은데…. 내사 다른 욕심은 없어예. 그저 지금 이대로 더 아프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만 있으면 좋겠심더.”
아이들이 모두 지체장애아들이기 때문에 조금만 아파도 항상 마음을 졸이게 된다는 김씨. 넉넉한 살림이 아니기에 병원비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힘들다. 하지만 1만원, 2만원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마음만은 부자인 그.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안다는 오십 인생. 어쩌면 김금옥씨야말로 정말 깨달음을 얻어 세상의 이치를 아는 살아있는 부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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