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정씨는 지금도 노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경기도 분당 율동공원 앞에 있는 5층짜리 대형 샤브샤브 전문점 ‘길조성’에 들어서면 30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귀에 익은 노래 한곡이 흘러나온다. “마주 잡은 손길로 같이 있게 해주세요∼.” 80년대 초반 인기를 모았던 부부 듀오 ‘동그라미’의 ‘같이 있게 해주세요’란 노래다.
웬만한 중소기업을 능가하는 연매출(50억원)을 올리고 있는 이곳 길조성의 사장이 바로 ‘동그라미’의 멤버였던 윤해정씨(47)인 것. 그런데 부부 듀오라는 이력과 달리 윤씨는 혼자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얼굴에 깊게 새겨진 흉터가 그의 지난 20년의 세월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음을 직감하게 했다.
“일어서려고 하면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려 하면 쓰러지는 좌절의 연속이었죠. 한때는 한강에 빠져죽으려고 간 적도 있어요. 하지만 자식을 두고 갈 수가 없더라고요.”
스무살에 우연히 만난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어느날 아기를 재우기 위해 부르는 노래 소리를 퇴근하던 남편이 들은 게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남편은 결혼 전에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던 가수지망생이었어요. 결혼 후 맞춤수선집을 운영했는데,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제 노래를 듣곤 부부 듀오로 노래를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전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반대했죠.”
윤씨가 완강하게 반대하자 남편은 “환갑 때 들을 수 있게 기념앨범을 하나 만들자”고 했다. 그리곤 그의 손을 끌고 자신이 알고 지내던 작곡가 사무실로 갔다. 그렇게 해서 한달 정도 연습한 끝에 만들어진 것이 “그대가 내 곁에 있어주면 슬픔도 사라지고∼”로 시작하는 ‘그대여’란 노래가 실린 데뷔 앨범이다.
“처음엔 그저 우리끼리만 듣는 기념음반인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라디오를 켰는데, 저희가 부른 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대여’의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방송활동을 전혀 안했는데도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에서 인기순위 상위에 오르는 것은 물론 텔레비전 프로에서도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해서 얼떨결에 가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첫 앨범이 성공을 거두자 남편은 두번째 앨범을 내면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설득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방송출연만으로는 돈이 안되었기 때문에 밤무대를 뛰어야 했다. 하지만 통기타풍의 ‘그대여’는 밤무대에 적합한 노래가 아니었다.
달동네 이웃에게 1천원씩 빌려가며 하루하루 살기도
“이미 남편은 맞춤수선집을 정리했고, 저 역시 가수활동을 하느라 직장을 그만둔 상태였어요.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이왕 시작한 것,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친정집을 담보로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2집 <같이 있게 해주세요>를 만들었죠.”
2집은 발매 3개월 만에 3만장이 팔리는 등 당시로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각종 인기차트 1위를 휩쓰는 것은 물론, 부부 듀오라 시청자들의 인식도 좋아서 각종 프로그램에서 출연섭외가 이어졌다. 밤무대에서도 높은 출연료를 제시하며 앞다투어 모셔갔다. 82년말엔 KBS 가요대상 중창부문 후보에까지 올랐다. 이대로라면 빚을 청산하는 것은 물론 큰돈이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았다. 그러나 83년 초,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돈에 여유가 생기니까 딴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노름과 여자에 빠진 것이죠.”
부부 듀오였기 때문에 남편이 가출한 상태에서 윤씨 혼자 텔레비전에 나와 노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송 스케줄을 줄줄이 펑크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남편이 노름에 빠져 가출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변명도 못한 채 방송에서 퇴출당하고 말았다.
말썽을 부리다 지금은 제자리를 찾은 딸 민지와 티타임을 즐기는 윤해정씨.
고생하며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눈앞에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래를 하기 위해 진 빚 때문에 빚쟁이에게 시달려야 했고, 남은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남편을 찾기 위해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여관이란 여관은 샅샅이 뒤졌다. 그러는 사이 몸무게는 무려 10kg 이상 빠져 38kg까지 내려갔다.
“그렇게 몇달을 보내다 체념하고 있을 때 남편이 돌아왔어요. 가출을 한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집을 나간 후 몇천만원의 빚까지 안고 들어오니 어처구니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하는데,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더라고요. 더구나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가 너무 못 먹어서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라 당장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남편은 자기는 더는 노래를 하고 싶지 않다며 윤씨 혼자 무대에 설 것을 권유했다. 자신은 매니저 역할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돌아온 지 두달 만에 또다시 종적을 감췄다.
“제 밤무대 출연료뿐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출연료까지 모두 챙겨 달아났어요. 너무 힘들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한강에 갔어요. 그런데 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 차마 죽을 수가 없었어요.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밤새도록 강변에 앉아 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고 일어섰죠.”
남편에게 출연료를 떼인 밤무대 가수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그나마 나가던 밤업소 일마저 끊겼다. 그렇다고 남편에게 자기도 속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모든 오해와 망신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당시 달동네에서 살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웃들에게 하루에 1천원씩 꾸어가며 살았어요. 정말 비참한 생활이었죠.”
몇달을 그렇게 지내다 아는 선배가수의 도움으로 캬바레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는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그를 찾는 밤업소들이 차츰차츰 늘어나 남편이 진 빚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어느날 친구에게 “텔레비전을 보니까 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동그라미라며 출연했는데, 어떻게 된 거냐”며 전화가 걸려왔다. 어이가 없어 담당 PD에게 확인을 하자 “남편이 찾아와 ‘집사람이 몸이 아파 노래를 못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파트너를 바꾸었다’고 해 그런 줄만 알았다”는 것이다. 그후 남편과 다른 여자가 동그라미란 이름으로 밤무대에서 노래를 한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제가 직접 동그라미가 일한다는 밤업소를 찾아갔어요. 남편이 웬 여자와 함께 업소에 들어오다 저를 보더니 도망을 가버리더군요.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죠.”
사흘 뒤 남편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런데 남편은 또다시 무릎을 꿇더니 이번에는 첫마디가 ‘이혼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밤무대 하루 12곳 뛰다 두차례 큰 교통사고 당하기도
“눈물을 흘리며 그러더군요. 자기가 진 빚이 너무 많아 지금 이혼을 안 하면 저까지 피해가 가니까 서류상으로 이혼을 하고 1년쯤 있다가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합치자고요.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믿어달라고 하는데, 믿어야죠. 그래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어요.”
그런데 앞으로 새사람이 되겠다던 남편은 이혼서류를 법원에 제출하던 날 윤씨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바람을 쐬겠다며 나가더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날부터 다른 여자와 함께 밤무대에 출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혼을 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밤무대를 휩쓸고 다니더군요. 덕분에 제가 설 무대가 사라졌어요. 동그라미란 팀이 두 개일 순 없잖아요. 더구나 저는 혼자고, 그쪽은 듀엣이니까 업소에선 당연히 그쪽을 무대에 세우죠.”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었다. 그는 ‘동그라미’란 이름을 버리고 ‘윤해정’이란 본명으로 밤무대 활동을 재개했다. 의정부에서 평택까지 하루에 12개 업소를 뛰기도 했다. 그러다 지금까지 얼굴에 깊은 흉터가 남아 있을 정도로 심한 교통사고를 두번이나 당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노래를 한 것이었다.
여자 혼자 밤무대를 뛰다보니 추근거리는 남자들도 많았다. 한달 이상 찾아와 사귀자며 유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대에 올라와 껴안으려는 손님도 있었다. 심지어 깡패에게 납치를 당해 여관으로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그땐 정말 몸에 칼을 지니고 다녔어요. 절 납치해서 폭행을 하려고 하면 칼을 꺼내놓고 ‘죽이고 하라’고 했죠. 또다른 유혹은 룸살롱에서 노래를 하라는 것이었어요. 돈은 많이 준다고 했지만 2차를 나가야 한다고 해서 거절했죠.”
부부 듀오 동그라미로 활동하던 때 모습.
그렇게 3년을 뛴 결과 빚도 갚고, 솔로 음반을 낼 기회도 찾아왔다.
“86년 솔로 음반을 냈어요. 저를 아는 분들이 열심히 홍보를 한 덕분인지 발매 한달만에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하는 등 반응이 좋았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에 출연하기로 한 전날부터 갑자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병원에 갔더니 목이 부운 상태에서 계속 무리해서 노래를 하는 바람에 성대결절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수술을 한 후 최소한 6개월은 노래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그때의 심정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었죠.”
그래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 밤무대에 섰다. 일본은 한국보다 출연료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다. 하지만 그는 7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이 때문이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던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자 부모를 그리다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비뚤어진 행태를 보였던 것이다.
“낯선 일본으로 간 것도 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였는데, 아이가 점점 이상해지더라고요. 이른바 문제아로 자란 거죠.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측에서 자퇴를 권할 정도였어요.”
사업성공보다 문제아였던 딸이 새사람 된 것이 더 값지다
당황한 그는 94년 일본에서의 활동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95년 분당에 정통 일본식 샤브샤브집을 개업했다. 그러나 샤브샤브는 일본에서 인기가 높은 것과 달리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아서인지 손님이 들지 않아 매달 2천만원씩이나 적자가 쌓여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업한 지 사흘째부터 하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자를 보는 상태라 병원에 갈 여유가 없었다. 윤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우리 입맛에 맞는 육수와 소스를 개발하기 위해 주방장과 함께 밤낮으로 연구에 매달렸다. 그로 인해 하혈증세가 더 심해지면서 고통을 이기지 못해 결국 병원을 찾았다. 난소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난소암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하면 완치율이 높지만, 항암치료가 다른 암보다 훨씬 힘들어 치료를 포기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의사는 그에게 수술과 항암치료하는 데 적어도 1년 이상은 걸릴 것이고 그동안은 전혀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이국 땅에서 외로움을 삼키며 번 돈으로 마련한 식당을 그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육수와 소스도 개발하지 못한 상태라 손님도 없는데, 주인마저 없으면 식당이 망하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씨는 수술을 끝낸 후 식당일을 하면서 항암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의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쓰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왜 의사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심한 구토와 역겨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부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겐 항암치료만큼 식당도 목숨이 달린 일이었어요. 죽어도 식당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항암치료와 식당일을 병행했어요. 사람들이 병실을 찾았다가 제가 안보이니까 나중엔 가게로 문병을 오더라고요(웃음).”
링거주사를 꽂고 식당에서 육수와 소스를 개발하다 쓰러진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또한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 암세포가 간과 폐에 전이되었다는 진단까지 나왔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항암치료와 식당일을 병행했다. 그런 열정 때문이었을까, 마침내 고객들 입맛에 맞는 샤브샤브 요리를 개발할 수 있었고, 암세포도 1년간의 항암치료가 끝나자 기적같이 사라졌다.
“요즘 체인점 문의가 많이 들어와요. 하지만 아직 그럴 생각이 없어요. 좀더 다양한 메뉴를 개발한 후에 체인점을 만들 생각이에요.”
윤씨는 사업의 성공보다도 자신의 투병모습을 통해 문제아였던 딸 민지(24)가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더 값진 성공이라고 한다.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서 민지가 조금씩 달리지더라고요. 어느날인가는 식당에서 일손이 부족해 저까지 아픈 몸을 끌고 그릇을 나르고 있는데 슬그머니 그릇들을 대신 나르더라고요.”
그뿐만 아니었다. 학교를 자퇴했던 민지가 뒤늦게 공부를 하겠다며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고, 일본과 독일로 연수를 갔다왔다. 오는 9월엔 호텔경영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난소암에 걸렸을 때 침대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투병생활이 더 힘들었을 거예요. 일을 하면서 치료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수영으로 300m는 너끈히 헤엄을 칠 수 있다는 윤씨는 앞으로 자신의 인생역정과 음식점 경영노하우를 담은 책을 펴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인터뷰를 마친 후 통기타를 퉁기는 그의 모습에서 가수에 대한 애정 역시 그대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달동네 쪽방에 살면서 이웃들에게 하루에 1천원을 빌려 살던 그가 오늘의 성공을 이뤄낸 그 집념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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