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장애인이 국내 최초로 영업용 택시를 운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들이 일하고 있는 회사에는 수많은 격려전화와 함께 문의전화가 쇄도했다. 이중에는 그들을 만나고 싶다는 ‘같은 심정’의 장애인도 적지 않았다.
여수 한일교통 소속 택시운전사 전재수(51·지체장애 1급), 문성운씨(43·지체장애 2급). 하반신 마비로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전씨와 문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삶을 새로이 시작했다.
‘중증장애인의 운전은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던 그들을 전격 채용한 곳은 전남 여수시 봉산동에 위치한 한일교통(사장 김종태). 평소 장애인재활협회와 친분이 두터웠던 유상종 전무(52)가 전씨와 문씨의 사정을 듣고 내린 결단이었다.
“승객들도 불안해하지 않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 일할 맛 납니다”
“택시운전면허까지 땄는데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장애인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중증장애인이 택시운전을 한다는 건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라 회사 입장에서는 모험일 수도 있거든요. 장애인재활협회 서정기 전회장님께서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도와달라구요. 전례야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요.”
처남이 신장투석으로 장애를 앓고 있던 터라 장애인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는 유씨는 두 사람의 사정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도움을 준다는 생각만으로 덜컥 운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운전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채용하는 데 신중해야 합니다. 단순한 인정과 배려로 그들을 채용할 수는 없었죠. 그런데 두 사람은 장애가 있는데도 택시운전면허자격증까지 소지한, 소위 ‘준비된’ 사람들이었어요. 꼼꼼히 그들의 기술과 능력을 평가했는데, 어느 누구보다도 능숙하고 안정된 운전솜씨를 보여주더군요. 그런 사람들이라면 일을 맡겨도 좋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장애인을 채용하면서 내심 걱정이 많았다는 유씨는 그 확신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그들이 몸소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꼬박 12시간을 오로지 운전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불편한 신체조건, 그 자유롭지 못한 생활에도 그들은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근무시간을 놓치는 법도 없었다. 안전운전과 친절은 기본이다.
승객들의 반응도 예상보다 좋았다. 장애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탄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하나같이 전씨와 문씨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잔돈을 기분 좋게 남기고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밥이라도 한끼 하자며 의욕을 북돋워주는 이도 있었다.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라’는 덕담도 꽤 많이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 덕분에 회사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당연지사. 애사심이 각별한데다 성실한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 장애인 택시기사를 고용한 것이 오히려 회사에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단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운영진도 지금은 ‘대만족’이랍니다. 이미 회사에서는 네명의 중증장애인을 추가로 채용했어요. 경비도 장애인이 보고 있죠. 두 사람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많이 바뀌게 해주었습니다.”
유상종 전무는 앞으로 적어도 30% 정도는 장애인을 택시기사로 고용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다른 회사에서도 중증장애인을 채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니, 머지않아 적지 않은 장애인들이 자활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이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장애인을 고용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못했겠죠. 전씨와 문씨가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으니 이제는 세상이 조금 더 장애인에게 문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더없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장애가 온 뒤 10년을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렇게 어엿한 직장인이 되고 보니 가족들에게도 떳떳하고, 제 자신에게도 뿌듯합니다.”
척추장애로 하반신이 마비된 1급장애인 전재수씨는 한번 차에 오르면 꼬박 12시간을 오로지 운전석에 앉아있어야 한다. 식사도 차안에서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밀폐된 소변봉투를 따로 준비하고 다녀야 한다. 하루 근무를 마치면 온통 피곤에 지칠 때도 있지만, 10년 만에 다시 찾은 직장은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고도 남을 만큼 값진 것이어서 마냥 행복하다고 한다.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소문이 쫙 퍼졌다”며 큰 소리로 웃는 다부진 모습의 그에게도 말 못할 고통과 시련이 적지 않았다.
전씨는 장애가 오기 전까지 부산의 석유개발공사에 8년째 근무해오던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아침마다 헬리콥터를 타고 시추선으로 출근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활력에 넘쳤다. 그런데 91년 어느날 아침 예고도 없이 장애가 찾아왔다. 서른아홉, 한 가정을 건실하게 꾸려오던 가장의 삶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뒤바뀌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원인도 모르는 척추장애로 하반신이 마비된 거예요. 내 모든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죠. 그때는 정말 살기 싫었어요. 온통 치료에 매달렸던 2년의 시간 동안 자살을 세번이나 시도했으니….”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는 것조차도 버거웠던 그가, 다시 삶의 의욕을 찾게 된 계기는 의외로 사소하고 단순했다. 자살을 결심하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친척집 어느 아파트. 새로 지은 건물은 자신 같은 휠체어 장애인도 전혀 이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조금만 바뀌면 이렇게 편리한데, 나도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제대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사소한 데서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힘들겠지만 한번 살아볼 만하겠다 싶었죠.”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하룻밤을 꼬박 새워 자신을 설득했던 친척의 조언도 그제서야 머리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전씨는 고향인 여수로 돌아와 자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스스로 시청을 찾아가 일거리를 찾았고, 그때부터 장애인재활협회와 인연을 맺었다.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어서 좋아요”
자활을 꿈꾼 뒤로는 한번도 장애를 느끼고 살지 않았다는 그에게, 아내는 고맙기에 앞서 늘 미안한 존재다.
“아내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내와 싸우고 자살을 결심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아파요.”
‘하늘도 나를 버리는구나’ 싶었던 깊은 좌절을 아내마저 몰라준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장애를 얻은 후로도 핀잔도 바가지도 줄지 않았던 아내. 한때 야속하다 여겼던 그의 아내는 지금도 그때와 다름없는 모습이란다.
“당신이 장애인이라 내가 여태 살아주고 있는 거야. 당신같이 술 좋아하고 잘 노는 호쾌한 남자를 장애인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독점하고 살겠어. 진즉 이혼했지.”
전씨가 장애인이 된 후 10년 동안 오로지 홀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 온 전씨의 아내는,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남편의 장애를 장애로 여기지 않았던 거였다. 그렇게 자신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는 걸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전재수씨.
전씨는 그런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아직까지 표현하지 못했다고 한다. 표현엔 늘 서툴렀던 그는 지금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느냐’며 멋쩍은 웃음만 지을 뿐이다.
앞으로 ‘개인택시’를 갖는 게 소원이라는 문성운씨.왼쪽부터 장애인인 두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유상종 전무, 문성운, 전재수씨.
“아내도 이제는 남편이 직장을 다닌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 행복하대요. 아내와 두 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어려운 살림에도 자신들의 삶을 야무지게 개척해온 가족들이 자랑스러워요.”
전씨의 권유로 지난해 11월 면허를 취득한 후 함께 택시를 운전하고 있는 문성운씨에게도 가족은 누구보다도 든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이었다. 문씨는 전씨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장애를 앓아온 소아마비 2급장애인. 어렸을 적 고향 제주의 강인한 농부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기며 살아왔다.
“귀한 자식은 매로 다스리고, 미운 자식은 밥으로 키우라는 말이 있어요.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저를 귀하게 키우신 셈이죠. 어려서부터 집안의 농사일은 다 도우며 살았어요. 잘못하면 호되게 야단도 맞았죠. 아버지는 어느 고통에도 맞설 수 있는 심성과 체력을 몸에 밴 습관처럼 지닐 수 있도록 저를 강하게 키우셨어요.”
한번도 자신에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아버지. 아버지는 자식을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키웠고 엄하게 다스렸다. 아버지의 그 강인했던 품성과 기개를 온전히 빼닮진 못했지만, 자신의 가족에게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문성운씨.
문씨는 유독 피아노를 잘 친다는 아홉살 난 딸 지영이에게 결코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며 굳은 다짐을 보였다. 그것이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배운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이자 오랜 세월 묵묵히 자신을 믿어준 아내에게 보답하는 길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가족이 자신을 믿어주었기에 자신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하는 두 사람. 이들의 소망은 ‘개인택시’를 갖는 것이다. 매일 12시간씩, 빠듯한 일상의 고비를 넘기다 보면 언젠가는 자기 소유의 택시를 운전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게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그들의 또다른 바람이다.
“운전은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들에게 운전만큼 잘할 수 있는 일도 없지요. 아주 간단한 보조장치만 달면 장애인들은 다리보다 훨씬 섬세한 손으로 운전장치를 제어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안전합니다. 다른 택시회사에서도 조금만 생각을 바꾸고 중증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으면 좋겠어요.”
장애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 사회가 안타까워
전례에 없었기 때문에 늘 상식 밖에 있었던 중증장애인의 운전. 이들은 자신의 일에 ‘하늘이 내린 천직’이라는 수사를 붙이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붙어 앉아 일하다 보면 온 몸의 뻐근함이 마디마디 배어오는 이 고단한 운전이, 애초부터 하늘이 내린 천직이라면 누가 달가워하겠는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자활을 꿈꾸는 장애인들에게 운전만큼 잘 맞는 직종도 없으니, 적어도 ‘장애인에게 운전은 무리’라는 편견만큼은 거두어달라는 깊은 속내의 말이다.
“기회를 준 세상에 오직 감사할 뿐”이라는 선한 인상의 전재수씨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열악한 제도에 관해서 만큼은 아직 할말이 많다. 준비된 장애인은 자신말고도 더 있으나, 사회는 아직까지 준비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00년 10월에 1급장애인도 면허를 딸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지만, 운전학원 어디를 다녀도 장애인 교습차량을 찾을 수 없었어요. 결국 시험장에 가서야 조금씩 연습해서 2001년 7월, 세번의 낙방 끝에 1종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법만 마련해놓고 실행에 필요한 노력은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업용 택시 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취득한 후로 여수 전역을 돌며 입사서류를 제출했지만 어느 한곳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상심의 나날을 떠올리면, 세상의 편견보다 더 준비되지 않은 게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라며 전씨는 아쉬움을 감추지 않는다.
“중증장애인이 택시를 운전하려면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승인이 먼저 있어야 해요. 공단에서 차량개조비(50만원)를 부담하니까 사실조사를 마친 다음에야 운전을 할 수 있거든요. 우리 회사에 네명의 중증장애인이 추가로 채용됐는데 공단의 승인이 늦어져서 벌써 한 달째 놀고 있어요. 장애인보다는 늘 자신들의 업무 일정에 기준이 맞추어져 있더라고요. 편의주의적 발상이죠. 하루라도 빨리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장애인 입장에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전씨와 문씨는 자신들의 막역한 지지자인 유상종 전무와 함께 조만간 ‘장애인 택시기사회’를 조직할 생각이다. 장애인의 현실적 고통과 애환을 서로 나누고,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놓치기 쉬운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겠다는 의지다.
여력이 닿는다면 12년 8개월로 일반화된 ‘개인택시’ 면허 규정을 장애인에겐 5∼6년으로 앞당기는 조례를 제정하는 데도 한몫 하고 싶다는 두 사람. 자신들이 ‘선두’에 있기에 놓쳐서는 안될 자세라는 것이 있더라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그들은 장애인들에게도 깊은 당부를 잊지 않는다.
“운전이라는 게 정말 힘든 직업입니다. 꼬박 열두시간을 일하고 나면, 나머지 열두시간을 고스란히 쉬어줘야 할 만큼 고된 일이지요. 우리의 소식이 장애인에게 희망이 될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이 정말 열심히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마저도 한낱 허튼 꿈이 되고 맙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두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하고, 열배는 더 운전에 능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다리를 잃었지만, 당당하게 세상의 발과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은 나에게 다시 하늘이 내린 귀한 직업입니다. 문씨와 저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장애인들이 자립의 길을 걷는데 하나의 터를 닦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해야 다른 장애인에게도 취업의 문이 열린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뛰겠습니다.”
자신들이 개인택시를 갖는 꿈을 이루게 될 즈음이면, 정작 이런 소식이 기사거리가 되지 않아도 될 만큼 특별한 것이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두 사람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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