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구가 뜯어진 채 나뒹굴고 있는 담배보루, 사방에 흩어져 있는 A4용지, 소파 위를 굴러다니는 2회와 4회 대본, 전원이 꺼진 채 방치되어 있는 휴대전화, 벽면에 붙어있는 김인하 민수연 최정원 등 극중 배역 이름이 적힌 종이들….
폭격을 맞은 집이 이럴까. 드라마 <올인>을 집필중인 최완규 작가(39)의 거실은 그야말로 전쟁중의 ‘임시 피난처’ 같다. 그 난장판 속을 비집고 들어가 그와 마주 앉았다. 텁수룩한 수염에 90kg은 돼보이는 거구. 이 사람이 ‘국민 드라마’ <허준>을 집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첫 방송 보셨어요? 제가 보기엔 웬만큼 잘 나와준 거 같아요. 같은 시간대의 <눈사람>이 워낙 반응이 좋아 내심 걱정했는데, 시청률(16.4%)이 괜찮게 나와 안심했어요.”
시청률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 작가답게 시청률 얘기로 말문을 연다. <올인>의 흥행 여부에 상당히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방영도 되기 전부터 올해 상반기 최대의 화제작이라 치켜세워진 <올인>이 아닌가.
이병헌과 송혜교를 주인공으로 하는 호화 캐스팅, 편당 3억원에 이르는 제작비용, 두달에 걸친 미국 LA, 라스베이거스, 그랜드캐니언의 현지 올 로케이션, 실제 프로 갬블러 차민수를 모델로 했던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원작…. ‘메가톤급 흥행’이 점쳐진다던 드라마가 바로 <올인>이다.
<올인>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도박계의 살아있는 신화’ 프로 갬블러 차민수를 소재로 했다는 점. 그는 도박과 마약에 빠져 생과 사를 넘나들다가 세계 랭킹 1위의 프로 갬블러로 다시 등극한, 한편의 드라마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그러면 <올인>은 실제 인물 ‘차민수’의 자전적 드라마인가?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노’다. 최작가는 “차민수의 실제 삶에서 모티브는 땄지만 전혀 다른 인물,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말했다. 최작가는 그 이유에 대해 원작 소설이 드라마화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리얼리티 살리기 위해 카지노 갔다가 왕창 돈 잃은 경험 있어
“원작 소설을 읽고난 첫 느낌이 ‘아. 어렵겠다’였어요. 차씨는 도박사인 동시에 바둑 기사예요. 그래서 원작 소설에서는 바둑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까지 드라마에 담아내기엔 무리가 있더군요. 게다가 그의 삶 자체가 한편의 영화 이상이라서, 이걸 다르게 보여주기가 참 어렵다 싶었어요. 차씨의 삶에서 극적 요소만 모티브로 뽑아내고 허구의 이야기로 다듬어냈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에게 충분히 양해를 구한 상태예요.”
그렇다면 원작 소설과 다른 드라마 <올인>은 어떤 내용인가. 고아로 태어나 아버지 친구였던 노름꾼으로부터 도박사로서의 근성과 끼를 이어받은 김인하(이병헌)와 부친으로부터 카지노 사업을 물려받은 최정원(지성)은 어릴적 친구다. 둘 사이에 ‘운명의 여인’ 민수연(송혜교)이 등장하면서 두 남자의 삶은 팽팽한 대결 구도를 보인다.
인하가 도박사로 성공하는 대목까지 차씨의 삶에 기대고 있다면, 그 이후는 호텔 사업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최작가는 “라스베이거스의 지금이 있기까지에는 스티븐 윌, 윌리엄 베넷과 같은 천재적인 호텔 사업의 귀재들이 있었다”면서, 카지노 사업의 이모저모를 드라마 속에서 풀어놓을 것이라고 했다.
<올인>이 승부수로 내놓은 ‘빅 카드’는 이병헌, 송혜교. 평소 “화투 한번 쳐본 일 없다”는 송혜교는 국내 호텔 카지노 교육원에서 블랙잭, 바카라, 룰렛 등의 게임을 운영하는 전문 딜러 수업을 받았고, 이병헌은 차민수씨의 지도를 받은 것은 물론 월드포커챔피언십 대회의 자료 테이프까지 챙겨보면서 배역에 푹 빠져 있다고.
“‘캐스팅이 반’이라는 말이 있어요.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죠. 이병헌이라는 연기자가 보통 ‘연기 머리’가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걸 전 이번에 알았어요. 대본을 주면 수시로 전화가 걸려와요. 그러면서 인물 해석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하는데, 작가인 저도 깜짝 놀랄 만큼 정확한 경우가 많아요. 끊임없이 캐릭터 연구를 한다는 얘기죠.”
최완규 작가는 꼼꼼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하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올인>의 흥행여부는 아직 미지수. 무엇보다 ‘전문 도박사’라는 극중인물의 설정을 둘러싸고 들려올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를 어떻게 잠재우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동안 조직폭력배, 건달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 일색이더니, 이제는 폭력도 모자라 도박이냐” “사행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들에 대해 최작가는 할 말이 많다고 했다.
“처음 집필 제의를 받았을 때부터 저도 그 부분을 고민했어요. 적어도 ‘허준’이나 ‘임상옥’의 삶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동을 줬고, 배울 것이 있었는데 과연 도박을 다루면서 그게 가능할까…. 제가 도박 자체를 강조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도 그런 까닭이에요. 따라서 사회적 역기능이 되는 그런 드라마는 아닐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드라마 쓸 때마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으로 살이 쪄
마지막으로 <올인>이 기대되는 이유는 최완규, 바로 그의 손을 거친다는 점이다. 최작가는 드라마를 집필하기 전, 꼼꼼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메디컬 드라마 <종합병원>을 집필할 때는 6개월간 종합병원에서 실제 숙식을 했고, 사극을 맡을 경우엔 한의원에서 직접 진맥을 받는 것은 물론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료를 통달할 정도로 공부를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도박의 세계를 다룬 각종 책과 자료를 샅샅이 훑은 것은 물론이요, 카지노 사업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논문까지 챙겼다. 직접 실습은 당연한(?) 일이다.
“정선 카지노에 한두 번 갔지요. 제가 한번 하면 좀 크게 거는 타입이라서 왕창 잃은 적도 있어요. 그곳을 나오면서 ‘아, 드라마를 위해 이렇게 참담한 경험까지 자초하다니 난 정말 훌륭한 작가인가봐’이랬죠(웃음). 아, 농담이고요. 취재도 취재지만, 사실 카지노가 퍽 재밌어요.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 어쩌다 해보곤 하지요.”
최작가는 경북 울진 태생으로 강원도 도계 탄광촌에서 자라 중 3때 서울로 왔다. 인천대 영문과 중퇴 후 소설가 지망생, 백수로 거의 8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중간에 공장의 공원, 정치광고업체 직원 등의 일을 전전했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 것은 93년 MBC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에 당선되면서부터. <재미없는 세상, 재미있는 영화>란 작품으로 영화 기획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먹고 살기 막막하니 한번 응모나 해보자’하고 쓴 게 덜컥 붙었다니 타고난 감각이 있다고 볼 수밖에.
94년 메디컬 드라마 <종합병원>이 히트하면서 <애드버킷> <야망의 전설> 등 주로 전문직을 소재로 드라마 대본을 써왔다. “그저 직업을 단순히 인물의 배경쯤으로 치부하는 드라마를 보면 안타깝다”고 말하는 그의 드라마는 직업 자체의 특징과 리얼리티가 살아있다는 게 특징이다.
“직업 자체가 주는 재미를 담아내고 싶어요. 적어도 그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보고 ‘말도 안돼’라고 하는 얘기만큼은 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죠. 그런 의미에서 다뤄보고 싶은 직업 중 하나가 방송기자, 그것도 <추적 60분> 같은 고발 프로그램을 다루는 기자들의 이야기예요.”
더욱 새롭고 자극적인 인물과 소재를 추구하는 건 드라마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그렇기에 드라마에 등장하는 직업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드라마 작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인기 연속극도 있지 않은가. “요즘은 ‘드라마 밖 작가’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질문을 하자 고개부터 흔든다.
“아이고… 보면 아시겠지만(주변을 가리켜 보이며) 제 생활은 이 모양이에요. 두어달째 집에 쳐박혀 있는 중입니다. 글이 안 풀리니 애꿎은 담배만 하루에 3갑씩 죽이고요. 게다가 스트레스로 인한 폭식으로 드라마만 시작했다 하면 살이 쪄요. 거의 인간 폐인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는 “<종합병원> 때만 해도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생활인으로서도 빵점”이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운동은 전혀 안하고 게을러서 별 다른 취미도 없고 “전기를 끊겠다” “수도를 끊겠다” 등의 최후통첩이 날아올 때까지 각종 고지서를 챙길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주변 사람들이 “글쓰는 재주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걱정해준다고.
인터뷰 중간 중간 그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아마 대본을 재촉하는 전화인 듯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끝내며 마지막으로<올인>을 보는 시청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조금 욕을 먹더라도 재미난 드라마를 하고 싶어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무작정 도박이나 갬블러의 삶을 흥미 위주로 보여주겠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도 <올인>,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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