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5일 오후 1시30분경. 연세대 동문회관 3층 로비가 갑작스레 분주해졌다. 3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2층에서 올라오는 계단 입구엔 출입금지 표지판이 내걸리더니 직원들이 병풍을 가져와 펼치기 시작했다. 1시부터 진행된 유모씨(28)의 결혼식을 마치고 식장을 빠져나오던 하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 상황을 파악한 듯 수군거렸다.
“오늘 여기서 노무현 당선자 아들이 결혼을 한다더니 사실인가 보군.”
잠시후 마지막까지 남아 사진촬영을 하던 유씨 친구들이 식장을 빠져나가자 무전기 이어폰을 귀에 꽂은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식장 의자를 하나씩 들춰보며 점검하는 등 예식장엔 가벼운 긴장감마저 돌았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아들 건호씨(30)의 결혼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근래 처음 있는 대통령의 집안 혼사였기에 건호씨의 결혼식은 대선 직후부터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당선자 측에서는 평범하게 예식을 치를 것이라고 밝혔지만 사람들은 대통령 아들의 결혼식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거두지 않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건호씨는 원래 양가 모두 경남 김해 출신이어서 하객들 편의를 위해 부산의 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를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의 호텔예식장들이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정했다는 후문이다. 건호씨와 신부 배정민씨(27)는 연세대 동문이다.
오후 2시가 되자 5분 안팎의 시간차를 두고 5개의 화환이 줄지어 예식장에 배달되면서 결혼식 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화환은 김대중 대통령, 민주당 한화갑 대표, 연세대 김우식 총장, 건호씨 직장인 LG전자, 신부 아버지의 전 직장인 농협중앙회 정대근 회장이 보낸 것이다.
이 시각부터 하객들도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2시쯤 노 당선자의 딸 정연씨가 도착한 것을 비롯해 신랑신부 친구들과 친인척들이 속속 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중엔 영화배우 강문영의 얼굴도 눈에 띄었는데 그는 노 당선자 부인 권양숙 여사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어려운 일 있어도 항상 웃으며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사전에 이미 청첩장을 소지한 하객만 식장 출입을 허락할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알렸기 때문인지 김원기, 정대철, 한광옥 등 10여명의 정치인들만이 얼굴을 비쳤을 뿐 정치인이나 유명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하객들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회관 밖에 경남 김해에서 친인척을 태우고 올라온 관광버스 6대가 줄지어 서 있는 등 여느 결혼식 풍경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되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카운터가 있어, 그곳에서 도우미들이 청첩장을 가져온 하객들에게 붉은색, 푸른색 스티커 비표를 옷이나 손등에 붙여주었다. 그 비표를 붙인 사람들만이 3층 예식장에 입장할 수 있는데, 그나마도 2대의 금속탐지기와 1대의 X레이 검색대로 이루어진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또한 가방이나 핸드백을 소지한 하객은 별도로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다.
2시30분, 노 당선자 부부가 도착하면서 결혼식장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노 당선자는 소감이 어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잘 살겠죠” 하며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식장 앞에서 사돈이 된 배병열씨와 인사를 한 후 하객들을 맞기 시작했다.
건호씨의 장인이 된 배병열씨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원섭섭하다”는 반응을, 장모 안인환씨는 “든든한 아들을 얻은 것 같다”며 기쁨을 표시했다. 배씨는 경남 김해의 농협에서 전무로 지내다 퇴직한 후 관련 기업에 취직을 했는데, 딸이 노무현 당선자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알고 사돈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직했을 정도로 강직하고 청렴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첩장을 소지한 하객에 한해 식장 출입을 제한하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 한 중년 부부는 “노 당선자의 친척인데 청첩장을 잊고 가져오지 않았다”며 입장을 요구하다 결국 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갔다. 또한 권양숙 여사와 가까운 친척이라는 두명의 중년 여성도 청첩장이 없어 결국 입장을 하지 못해 서운함을 표시하며 돌아서야 했다.
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청첩장은 양가가 각각 4백장씩 총 8백장만 만들어 돌렸다고 했다. 그런데 오후 2시40분이 되자 3백50석 규모의 식장에 하객들로 꽉 찬 것은 물론 3층 로비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데, 2층엔 여전히 식장에 올라가기 위한 하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1천명은 족히 넘게 모인 것 같았다.
결국 식장에 들어가지 못한 하객들은 예식이 열리는 3층 식장 맞은 편에 있는 대연회장에 설치된 4대의 대형 TV를 통해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고, 초청장이 없어 들어가지 못한 일반 시민과 기자들 50여명은 지하 영화관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는 예식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오후 3시. 신랑 건호씨가 식장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서고 뒤이어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주례는 노 당선자의 부산상고 선배인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이 맡았다. 그는 주례사 서두에서 “대선 기간에 주례 부탁을 받고 ‘대통령 아들의 주례를 서기가 난처하다’며 사양했으나 ‘낙선자 아들이 될 수도 있다’는 노 당선자의 설득에 승낙을 하게 됐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어 신부에게 “대통령 시아버지 눈치 보지 말고 두 사람이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고 당부했다.
주례사를 마친 신 전부의장은 신랑신부에게 양가 부모를 안아주라고 하자 건호씨는 장인이 된 배씨를 포옹하며 “예쁜 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살겠습니다”라고 말을 했고, 신부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결혼식이 끝난 후 가족사진을 촬영할 때 1백명이 넘는 하객들이 몰려나가는 해프닝이 벌어지도 했다. “가족이 아닌 분은 자리를 비켜달라”는 안내 방송이 두세 차례 나갔지만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날 결혼식장엔 청첩장을 가진 사람만 검색대를 통해 입장할 수 있었다
폐백을 마친 후 건호씨는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항상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겠다”는 인사를 남기고 대학 후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건호씨 부부는 4박5일 일정으로 동남아시아로 신혼여행을 간 것으로 알려졌는데, 구체적인 장소는 밝히기를 꺼려했다.
이날 결혼식에 대해 하객들은 대부분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대통령 아들 결혼식이라는 걱정과 달리 너무 평범하게 치러져 부담이 없어 좋았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편, 하객들에 대한 피로연이나 식사대접은 없었다.
결혼식뿐 아니라 건호씨 부부는 결혼 준비부터 서민적으로 검소하게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양가 부모에 대한 예단도 한복 한 벌만 준비했고, 신랑신부 예물도 시계와 반지만을 교환했다. 또한 이들 부부는 양가 부모의 지원과 5천만원의 은행대출로 강북지역에 20평형대 아파트를 전세로 마련했는데, 신혼살림 역시 침대와 세탁기만 새로 장만했을 뿐 나머지 가재도구는 배정민씨가 학생 때부터 자취하면서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 후 분가해서 살 것이라는 처음 발표와 달리 지난 1월15일 배정민씨와 전화통화를 한 결과 건호씨 부부는 여전히 명륜동 노 당선자의 자택에 살고 있었다. 배씨는 시부모의 아침상은 물론 아침 일찍 당선자의 집을 찾는 방문객들의 아침식사도 직접 챙기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을 했는데도 명륜동 집에 머무는 이유를 묻자 정민씨는 “시부모님이 청와대로 가시면 잘 뵙지도 못할 텐데 그동안이라도 모시자는 생각에 남편에게 제안 했다”고 말했다.
노 당선자 청와대 들어갈 때까지 건호씨 부부 함께 살며 가족의 정 나눠
배씨는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측근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건호씨 부부는 노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해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 아파트로 들어가 1년 동안 신혼살림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세 계약기간이 1년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일부 언론에서는 과거 대통령 아들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건호씨가 해외로 나갈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LG에서 해외지사로 보낼 것이란 예측보도를 하기도 했다. 이런 소문에 대해 정민씨는 “남편은 국내에서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계속 할 것이고 저도 지금 하고 있는 공부를 계속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대통령 아들이지만 평범하게 사는 선례를 남기겠다는 건호씨 부부의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결혼 후 노무현 당선자가 앞으로의 몸가짐에 대해 특별히 당부한 것은 없냐고 묻자 “아버님 역시 우리를 믿기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대신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살다 보면 서로 의견이나 생각이 다르고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자기주장만 펴서 싸우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생활하며, 서로 내가 진다고 생각하고 사이좋게 알콩달콩 살아가라’는 충고를 하셨다”고 말했다.
한편, 건호씨는 지난해 8월 연세대 법대를 졸업한 후 현재 LG전자에 근무중이고, 신부 정민씨는 연세대 주거환경공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상태다. 두 사람은 99년 같은 강의를 들으며 만나 4년 동안 사랑을 키워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정민씨의 친구는 “결혼 전 신랑을 두번 정도 만났는데 한번은 부대찌개에 소주를, 또 한번은 치킨에 맥주를 먹었다”며 검소하고 소탈한 건호씨의 일면을 소개했다.
건호씨 부부가 이번 결혼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게 온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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