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색 양복 차림에 두툼한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난 이영국씨(41)는 연일 계속되는 일본TV와의 인터뷰로 무척 피곤해보였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로 최근 일본이 들썩들썩하고 있답니다. 북한에 대한 비난여론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는 때에 마침 북한 관련 책을 내서 그런지 일본의 각 언론기관에서 저에게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네요. 벌써 여섯군데 TV방송사와 인터뷰를 했고 일본어판으로 출판계약도 마친 상태입니다.”
일본인 납치문제로 북한의 실상과 정치범수용소에 대해 궁금해하던 일본 사회가 정작 우리나라보다 먼저 그의 책 출간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이영국씨는 자신이 북한을 탈출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인 ‘북한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소망이 이제서야 첫 결실을 보았다고 했다.
김정일 품안에서 호강하며 살던 경호원 생활
“북한을 떠나온 많은 탈북자들 대부분이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껴서 이곳에 왔듯이, 저 또한 자유를 찾아 이곳에 왔지요. 저는 이곳에 오기까지 8년이 걸렸습니다. 북한에 있었다면 그냥 당간부로 지내면서 평생을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체제의 모순과 일인독재정치의 실상을 알고 나서부터 북한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일곱살에 친위대(김정일 경호대 명칭)로 선발되어 10년을 오직 김정일의 안위만을 위해 죽을 고생을 다했고 그것이 국가와 인민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린나이에 친위대로 선발되어 모진 군사훈련과 경호원 훈련을 받으면서 지낸 10년 동안 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편하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면서 살았어요. 경호원을 그만두고 나올 때 저는 신경쇠약증에 위장장애까지 있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충성을 다해 굳혀왔던 믿음이 경호원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허상이라는 걸 깨달은 거죠.”
시간을 거슬러 지난날의 얘기를 꺼내는 그는, 이제 비록 웃으며 말을 하고 있지만 가족을 두고 온 죄스러움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요즘에는 가족과 함께 탈북하여 국내에 정착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터라 혼자 이곳에 왔다는 이씨의 가족관계가 궁금했다.
이씨에 의하면 김정일의 경호원이 되면 워낙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기 때문에 가족들도 모른다고 한다.
“북한에 어머님이 계시고 아내와 아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형제들과 친척들도 있고요. 처음부터 혼자 오려고 한 건 아닌데 94년 두만강을 건널 때 함께 오기가 여의치 않아 먼저 제 몸만 간신히 빠져나왔어요. 그런데 중국에서 한국대사관 직원이라며 제게 접근한 사람에게 속았죠. 남한대사관으로 가는 줄 알고 따라간 곳은 북한대사관이었고 곧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되었어요. 거기서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촌동생의 노력으로 고향에 가게 되어 근 5년 만에 가족을 다시 만났어요. 그사이 아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더는 저랑 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이혼을 했어요. 수용소에 있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가족들은 굶주려 있었지요. 어떻게든 돈을 모아 다시 남한에 갈 준비를 하던 중 제 동태를 감시하던 기관원들에게 들켜버렸어요. 그들에게 잡혀가다가 안되겠다 싶어 죽기 살기로 그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쳐 다시 두만강을 건너게 되었어요. 그게 마지막이죠.”
혼자 남한에 오게 된 그는 한동안 가족들의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 몇달 전에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남한에 와서 생활기반을 닦고 기회가 되는 대로 가족을 데리고 오려 했는데 이젠 가망이 없어졌다며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던 그.
이씨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경호원이 되어도 워낙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기 때문에 가족조차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의 경호원이 되면 일단 당사자는 안정된 지위가 보장된다. 경호원에 대한 김정일의 배려가 대단하다는 것. 아울러 경호원 생활을 마친 후에는 당 간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영국씨도 10년간 경호원 생활을 접고 고향인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돌아가 무산군 당지도원으로 지냈다.
당간부가 되어 대학도 가고 가정을 꾸리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가 어떤 계기로 북한체제에 문제를 느끼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경호원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어 생활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죠. 어린나이(17세)에 경호원으로 선발되어 스물일곱살에 그만두기까지 김정일이 ‘나를 잘 보필하는 것이 곧 국가에 충성하는 길이며 인민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끊임없이 정신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그대로 믿었어요. 경호원들은 좋은 음식과 옷이 나오고 월급도 다른 노동자들보다 몇배는 많아서 저는 밖에 있는 제 부모나 다른 동포들도 다 잘살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고향에 돌아 와보니 부모님과 친지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더군요. 10년 전에 떠난 고향이 발전은커녕 더 낡고 초라해졌어요. 그때부터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무산군 당위원회의 지도원으로 일하면서 당간부들의 비리를 보게 되고 김정일이 했던 말들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은 것에 분노하게 되었어요.‘자기는 갖은 호의호식을 하면서 인민들은 굶주리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점점 북한사회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는 혼자서 저항한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고 입도 함부로 놀리다가는 쥐도새도 모르게 ‘다치는’ 상황이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어떻게든 북한을 탈출해 이런 실상을 알리는 게 최대의 저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연변TV를 보면서 개방정책으로 자유로워진 중국이 행복해보였고, 다른 나라 상황이 궁금하여 라디오를 구해 주파수를 맞추다 우연히 남한 방송을 듣게 되었다. 방송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남한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그는 탈출의 결심을 굳혔다.
이씨는 99년 또다시 어렵사리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 머물다 2000년 봄에 그토록 오고 싶어했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그는 김포공항에 처음 발을 내딛을 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한다.
“이땅에 오기까지 8년이 걸린 거니까요. 살아서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습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까지 들었거든요. 이곳에 와서 정부의 요청으로 1년 정도 군에 입대해 교관으로 복무했었어요.”
이영국씨는 군을 제대한 후 일본에 가서 북한 실상과 관련한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고 미국의 요청으로 미의회 청문회에 나가 증언을 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그의 가족이 북한 당국에 의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던 것.
“처음 남한에 왔을 땐 제가 김정일 경호원 출신이라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형제들의 안전이 염려돼서요. 그런데 가족소식을 들은 거죠. 가족들 데려오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 바로 책을 쓰기로 결심했어요. 왜냐하면 북한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서였죠. 김정일이 어떤 사람인지, 김정일 한 사람을 위해 북한이라는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책에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과 인간됨, 호화로운 생활상이 들어 있다. 물론 그는 김정일에 대해 다 알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 동안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면서 이래저래 알게 된 사실들은 미국과 일본에서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객관적인 정보라는 점을 강조했다.
김정일 경호원으로 뽑히면 무술훈련은 물론 자신의 과업을 정리, 토론하는 일이 많아 대부분 말도 잘한다고 한다.
“김정일은 성격이 급하고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에요. 스케일이 커서 한번 일을 벌이면 대강 하지 않고 크게 하는 스타일이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면이 많습니다. 비만해보이지만 수행원들이 못 따라올 정도로 체력이 왕성합니다. 뚱뚱해보이는 걸 싫어해서 옷이나 머리치장에 신경을 많이 쓰죠.
스스로 ‘나는 머리가 좋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머리 좋은 사람들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니 내 말만 들으면 언제나 승리한다’고 늘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어요. 그가 사용하는 건물은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시설이나 규모는 무척 화려하고 웅대합니다. 집무실인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청사와 관저 지하시설엔 영화시사실이 있고 절기마다 향락을 누리는 별장이 전국에 8개, 전용 술집도 따로 있어요.
김정일 집무실 차고엔 선물 받은 외제차가 1백대도 넘어
그의 집무실엔 1천명이 넘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고 비상시를 대비해 지하통로나 대피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요. 청사 차고에는 김정일이 선물 받은 차들을 모아놓았는데 세계 유명 차들이 1백대가 넘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인데도 별장에는 어마어마한 외화를 들여 상상을 초월하는 시설들을 꾸며놓았어요. 주민들이 몰라서 그렇지 실상을 알기만 하면 당장 북한 내부에서도 문제가 될 겁니다.”
얘기를 풀어가는 이영국씨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짧은 머리, 다부진 체격으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듯한 인상을 풍겼다. 하지만 말투는 북한 억양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해도 무척 나긋나긋했다. 게다가 유머감각이 풍부하고 달변가였다. 막힘없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가는 그에게 말을 참 잘한다고 하자 “경호원으로 뽑힌 후 기본교육을 받을 때부터 당지침이나 경호원 수칙, 무술관련 과제를 끊임없이 외우고 말하기를 반복 훈련합니다. 말로 자신이 수행하는 과업을 정리하고 토론하고 표현하는 것을 오랫동안 해왔는데 말을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하며 웃었다.
현재 건강식품 관련 사업을 하고 있다는 그에게 “북한에서 온 분들은 모두 음식점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라며 농담을 건네자 “저도 먹는 것을 팔기는 합니다” 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러면서 “탈북자들이 사업을 한다고 하면 잘할 수 있을지 불안한 생각이 든다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도 편견이며 지나친 걱정”이라고 한다.
“이곳에 왔으면 이곳에 맞게 살아야지요. 아까 말투 얘기도 나왔지만 저는 어디 가서 강원도사람이라고 합니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괜히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잖아요. 북한에서도 짧지만 사업을 해본 경험이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제가 차린 ‘주식회사 백룡’에서 호흡기질환과 천식에 좋은 건강식품 ‘에즈마’를 만들어 팝니다. 아직까지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유사한 약품이나 식품이 개발되지 않아서 특허도 받았어요. 아는 분들은 먹어보고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선전 좀 많이 해주세요.”
사업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그는 평범한 사업가의 모습으로 회사와 생산품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수익이 크지 않지만 몇 개월이 지나면 곧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를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영국씨. 인터뷰 중간중간에도 연신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업과 관련된 전화라면서 이야기를 끊어 미안하다며 꼬박꼬박 전화를 받는 그의 모습엔 활기가 넘쳐났다.
“교관으로 군생활 한 것을 빼면 본격적으로 남한 국민이 되어 산 건 불과 얼마 안됩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고, 뭐든지 해도 되는 자유가 있고, 웃을 수 있고 내가 가진 능력을 펼칠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가족들 생각하면 더 열심히 살아야지요. 사업도 성공하고 책도 많이 팔려서 하루 빨리 북한에 있는 가족이나 동포들을 데려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가족 얘기가 나오면서 다시금 표정이 굳어진 그. 다른 누구보다도 더 고통스런 과정을 겪고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된 이영국씨가 소망하는 일들은 단순히 개인의 바람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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