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갑숙은 요즘 두권의 책을 집필중이라고 한다.
“남자는 밉다가도 속옷 빨 때는 그렇지 않습디다. 형님도 그래요?” 장소는 빨래터. 등장인물은 본처와 후처로 불리는 두 여자. 남편과의 질펀한 하룻밤을 보낸 젊은 후처(서갑숙 분)가 만족스러운 듯 남편의 속옷을 들여다본다. 이때 본처(김지숙 분)가 첩의 손에서 남편의 속옷을 나꿔챈다. 남편의 속옷만큼은 서로 자신들이 빨겠다는 작은 실랑이가 이내 두 아내의 대판 싸움으로 커진다.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방에서 다른 여자를 안고 있을 때 본처는 홀로 불 밝혀 삯바느질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마음만큼은 본처의 것. 한 여자는 남편의 육체를 소유하지 못해 서럽고 한 여자는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해 마음에 한을 새긴다.
연극 <두 여자>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남자와 사는 본처와 후처 두 여자의 만남과 갈등 그리고 화해를 통해 한과 인내로 점철된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작품이다. 지난 94년 대종상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등 6개 부문 수상작인 영화 <두 여자 이야기>를 연극으로 각색한 것.
서갑숙(43)이 맡은 후처역의 경자는 세상 천지 유일한 혈육인 동생에게 공부를 시켜준다는 약속을 믿고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후처로 들어온다. 경자는 좀더 나은 삶을 꿈꾸지만 남편은 그녀를 씨받이로만 여길 뿐, 오히려 본처에 대한 연민으로 폭력과 구박만을 일삼는다.
남동생은 객지로 쫓겨나고 남편은 노름빚만 잔뜩 남긴 채 죽어버려 경자는 본처와 함께 두 아들을 키우며 두부장수와 삯바느질로 힘들게 생활을 꾸려가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러나 사랑과 추억에 목말라하던 그녀는 유부남의 거짓 사랑에 속아 본처의 돈을 훔쳐 야반도주를 하지만 결국 사창가를 전전하다 병을 얻고 친아들에게조차 버림받는다는 줄거리다.
“무대에 서는 기회를 얻게 되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드라마나 영화는 컷을 잘라 이을 수 있지만 연극은 서로 호흡을 주고받으면서 연기해야 하죠. 실시간으로 한편을 쭉 연기할 수 있는 게 가장 큰 매력이고요. 제가 맡은 경자는 철은 없지만, 사랑을 갈구하고 삶에 열정을 지닌 인물입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자리가 없었던 불쌍한 여인이지요. 이번 작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연기인생을 살 생각입니다. 다음 공연에선 인고의 여성인 본처 역할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말하는 그의 표정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지난 12월8일로 공연을 끝냈지만 매회 관람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샘을 뒤흔들었다는 자랑도 덧붙인다. 이 연극은 1월 중순경 전국 순회공연을 계획중이다.
동네 아줌마들과 대중목욕탕에서 수다 떨며 살아
서갑숙이 김지숙과 함께 공연한 연극 ‘두 여자’.
그는 4년 전부터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에 집을 마련, 두 딸과 3대가 함께 사는 ‘여인천하’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화려한 연기자나 성 고백서를 낸 화제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속 편한 동네 아줌마로 살고 있다. 이웃들과 대중목욕탕에서 만나 같은 학부모로서 아이들 문제를 걱정하기도 하고 아줌마들 공통의 관심사를 놓고 거침없이 수다를 떨기도 한다. 지난해 봄에는 집 근처에 ‘고기마을닷컴’이라는 갈빗집을 내 생활전선에 뛰어들기도 했다.
“연기자로서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배역이나 제안을 과감히 거절할 만한 생계수단이 있어야 하겠더라고요. 식당을 운영하면서 직접 서빙도 하고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풋풋한 삶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전에는 저를 우선으로 살아왔는데 식당을 하면서부터 남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어요.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서 오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았기에 연기자로서 제게 맡겨지는 역할에도 제 혼을 쏟아부을 겁니다.”
그는 4년전 자신의 성 체험을 고백한 에세이집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로 떠들썩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논쟁적 성담론의 중심에 갇혀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한동안 연극, 영화, TV, 드라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주어진 배역을 현실감 있게 소화해내는 연기자로서의 능력은 상당 부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서갑숙이란 연기자를 성 고백서 저자로만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때론…>을 출간했을 때 성인 인터넷방송국과 영화사의 러브콜이 많았어요. 그런데 대부분 상업적인 섹슈얼리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씁쓸했어요. 시간이 좀더 흐르면 그런 인식이 바뀔 거라고 믿어요. 저 역시 연기자로서 좀더 충실한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다짐도 하고요. 그동안 비교적 다양한 역할을 해왔어요. 백치도 하고, 수절과부도 하고, 선생님도 하고. 어떤 연출가가 그러더군요. 맹한 역할부터 강한 역할까지 다 소화할 수 있다고. 앞으로 좀더 다양한 역할들에 늘 새롭게 도전하고 싶어요.”
지난 여름은 그녀는 갑상선기능항진증으로 고생을 해야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불편한 관심으로 인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와 갈빗집을 준비하는 동안 쌓인 육체적 피로가 원인이었다.
“한 7∼8개월 동안 식당의 인테리어를 꾸미느라 황학동 벼룩시장, 중앙시장 등 재래시장들을 찾아가 숟가락부터 천막에 이르기까지 좀더 특이하고 예쁜 것을 찾아 무던히 발품을 팔았어요. 도배도 제가 직접 하고 외벽의 페인트칠도 제가 다 하고…. 몸으로 하는 일들이 그때는 참 재미있고 좋다고 생각하면서 했는데 결국 무리가 됐나봐요. 지난 6월말부터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해지며 숨이 차더군요. 늘 열이 나면서 땀도 많이 흘리고, 많이 먹는데도 체중은 감소하고요. 갑상선이 하트모양으로 부어오르면서 쉽게 피로를 느끼고 팔다리의 힘이 없고…. 지난 여름을 나기가 좀 힘들었어요. 처음엔 심장병이 재발했나 걱정하면서 병원을 찾았죠.”
그는 갑상선 질환 진단을 받고 나서 성 체험서를 통해 화제의 정점에 올랐던 상대남 M과도 완전한 결별을 결심했다.
“지난 99년 책 출간 이후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을 보는 모든 시선이 성적인 면에만 고정되어 있다보니 그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제가 만나는 모든 남자들을 ‘바로 그 M이 아닐까?’ 하는 의심스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당분간 만남을 자제하자 했는데, ‘당분간’이란 시간이 의외로 길어지더라고요. 그러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거죠. 마침 갑상선 진단을 받고 나서는 제 쪽에서 먼저 마음 정리를 확실히 했어요. 몸이 아프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쁘고 생생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잖아요(웃음). 전 사람에게 집착을 안하려고 해요.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나도 집착당하면 싫더라’ 하고 생각하면 편해요. 그리고 집착에 빠져 허우적대는 약하고 여린 남자 역시 안 좋아해요. 일에 빠져 정신없는 남자가 제일 좋아요. M도 바로 그런 면에서 제가 좋아했던 거고요.”
“얼마전 큰딸이 휴대전화에 애인 생기는 부적 붙여줬어요”
조금은 외롭기도 하지만 다시 연기를 시작하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있다보니 견딜만하다는 그녀. 얼마전 중학교 2학년인 큰딸이 그녀의 휴대전화에 ‘애인 생기는 부적’을 붙여줬다고 한다. 두 딸 모두 엄마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엄마가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고.
“지금은 두 딸을 키우고 책임지는 어머니, 생활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해요. 사랑은 그 다음일 수 있어요. 물론 두 가지 다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웃음).”
그녀는 두 딸과는 자매처럼 한방에서 잠을 자며 이런저런 하루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곤 한다. 아이들 학부모 일일교사로 연기발성법을 가르치기도 하고 녹색어머니회 회원으로 등교길 교통정리를 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땅을 딛지 않고 둥둥 떠다녔다’고 하면 이제는 ‘땅을 두 발로 밟고 현실을 사는 느낌’이라고.
“아이들과 많은 스킨십을 나누며 늘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는 말과 칭찬을 아끼지 않아요. 큰딸이 이번 겨울방학 동안 해돋이를 보러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너를 믿으니 다녀오렴. 단 도착했을 때, 재미있거나 힘들 때, 또 돌아올 때 몇번만 잊지 말고 전화해주기 바란다’ 하면서 허락해주었더니 최고의 엄마라고 자랑이 대단해요.”
초등학교 6학년생인 둘째는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으로 한동안 미술에 흥미와 재능을 보이더니 얼마전부터는 발레까지 시작했다고 한다. 노래를 곧잘 하고 그녀의 연기에도 유난히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장래에 부모에게서 받은 ‘끼’를 드러내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이번 그녀의 연극 공연도 집에서 서울의 공연장까지 세시간 가량 걸리는 장거리를 힘들어하지 않고 두세번씩 연거푸 관람을 하면서 가슴속에 뭔가를 담아두는 품새였다며 딸 자랑에 침이 마르는 줄 몰랐다.
오랜만에 연기자의 본령으로 돌아와 연극무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는 연기뿐만 아니라 특유의 다양한 호기심 덕분에 관심사 역시 다채롭고, 일상의 하루를 늘 부지런하게 보낸다. 99년 여름 프랑스와 그리스의 크레타 섬에서 한달 동안 지내면서 향기 공부를 한 경험을 살려 쓰기 시작한 <향기와 신화>라는 책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게다가 사랑을 소재로 한 희곡 대본까지 직접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품을 완성한 후 직접 연출자로 나설 계획도 갖고 있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도전은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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