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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종이는 창작과 감성을 담는 문화 콘텐츠예요 ”

삼원특수지 더페이퍼랩 김대호 기획마케팅팀 팀장

정세영 기자

2025. 06. 11

전 세계 5000여 종의 종이를 한데 모아 디자이너와 종이 애호가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국내 최초 종이 복합문화공간 ‘더페이퍼랩’을 찾았다.

정세영의 공간 도슨트
‌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삼원특수지 더페이퍼랩 김대호 기획마케팅팀 팀장.

삼원특수지 더페이퍼랩 김대호 기획마케팅팀 팀장.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수첩에 회의 내용을 적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 편지를 건네는 이들이 있다. 아이가 처음 접하는 책도 종이로 만들어졌고, 알림장과 가정통신문도 여전히 페이퍼 형태를 유지하는 학교도 있다. 사무실 책상 위 달력, 공책을 비롯해 포장지나 쇼핑백까지 우리의 삶은 온통 인쇄물에 둘러싸여 있다. 제로 페이퍼, 페이퍼리스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은 시대지만 우리의 종이 사랑은 여전하다. 

서울 광진구에 위치한 더페이퍼랩은 아주 흥미로운 공간이다. 2022년 1월, 국내 최대 특수지 전문 기업 삼원특수지가 국내 최초로 종이 복합문화공간을 열었다. 30년 넘게 종이만 취급한 삼원특수지는 더페이퍼랩을 통해 종이가 우리의 삶 곳곳에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알리고 있다. 사람들은 더페이퍼랩에서 인쇄물 만들기 활동에 참여할 수 있고, 다양한 관련 정보를 제공받는다. 브랜드와 소비자가 양방향으로 소통하는 공간인 셈이다. 

총 397㎡(약 120평)에 달하는 이곳은 한 구역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디자인 레퍼런스, 프린팅 랩, 페이퍼 라이브러리, 더 벙커, 포토 스튜디오, 세미나 룸 등 8가지 스폿을 마련해 소비자가 종이 구매부터 인쇄, 목업 샘플과 패키지 제작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더 벙커’라는 별도의 존은 전시와 세미나 등을 여는 문화 콘텐츠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 기업이나 단체, 디자인 전공 학생 등이 인쇄물 제작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 ‘더페이퍼랩 투어’와 전화 상담으로 목업 샘플을 제작할 수 있는 ‘프리뷰 서비스’도 진행 중이다. 종이로 꿈꾸는 모든 것을 실현하고 관련 지식까지 공부할 수 있어 종이 애호가들은 이곳을 ‘종이 세상’이라고 부른다. 

더페이퍼랩은 삼원특수지 창립 이래 가장 큰 마케팅 예산이 투입된 프로젝트다. 기획부터 실행, 인테리어 콘셉트, 가구 선정까지 프로젝트의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 김대호 기획마케팅팀 팀장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가치를 보여줄 확신이 있었기에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막대한 예산 투입으로 부담감이 컸을 것 같은데요.

비용도 그렇고 직원들의 기대감도 매우 컸죠. 어떤 공간이 탄생할지 모두 관심이 많았어요. 그렇기에 더욱 잘해내고 싶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콘셉트를 선정하는 거였어요. 시중에 있는 비슷한 공간들과 차별화를 두려면 명확하면서도 참신한 무언가가 필요했거든요. 이는 결코 저와 직원들의 아이디어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제 공간을 이용할 사람들의 리얼 보이스가 필요했죠. 그래서 먼저 회사의 가장 주요 고객인 디자이너 인터뷰를 시작했어요. 실무자들이 진정 원하는 공간은 무엇인지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를 나눴죠. 다행히 많은 디자이너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고, 진지하게 의견을 피력해줘서 공간의 전반적인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더페이퍼랩이 추구하는 콘셉트는 무엇인가요. 

디자이너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공간이요. 콘텐츠를 샘플로 제작하고 싶어도 높은 비용과 긴 소요 시간 등으로 포기하는 디자이너가 많더라고요. 거래 금액 자체가 적다는 이유로 제작을 거절하는 인쇄업체도 상당하고요. 저희는 디자이너들이 이러한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콘텐츠를 완성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그러기 위해선 원스톱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죠. 샘플링의 모든 과정을 더페이퍼랩 안에서 끝낼 수 있도록 했어요. 이를 위해 공간 안에서 종이를 직접 보고 만진 뒤 바로 샘플링과 촬영까지 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었습니다. 더페이퍼랩에서 그간 준비한 것들을 현실화하거나, 작업을 실험할 수 있는 장소 등 공간을 세분화하는 데 집중했어요. 

공간 세분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세요.  

더페이퍼랩은 총 8개의 스폿으로 구성돼 있어요. 핵심 공간은 ‘프린팅 랩’이에요. 작업물을 현실화할 수 있는 곳으로 잉크젯, 리소그래피는 물론 UV 인쇄, 대형 인쇄, 평판 커팅 등이 가능하죠. 국내외 다양한 패키지 제작물을 확인할 수 있는 ‘디자인 레퍼런스’에서는 종이부터 인쇄 레이아웃, 다양한 가공 방법, 지기 구조까지 직접 확인할 수 있어요. 벽에 종이를 차곡차곡 진열해놓은 공간은 ‘페이퍼 라이브러리’예요. 삼원특수지에서 취급하는 5000여 종의 종이를 만날 수 있죠. 최근 친환경 트렌드에 맞는 FSC 재생지, 비목재는 물론 고급 인쇄용지, 그래픽 디자인 용지, 산업용지, 화장·미술 용지, 색지, 보드류까지 취급하고 있어요. 정성껏 만든 패키지 제작물이나 제품을 촬영할 스폿이 필요하다면 ‘포토 스튜디오’를 찾으면 됩니다. 디자인 모임이나 원데이 클래스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세미나 룸’도 별도로 마련해두었어요. ‘워크 스페이스’에서는 프린팅 랩에서 제작한 인쇄물을 확인하고 간단한 작업도 가능합니다.

이곳만의 특별한 공간이 있다면요.

‘지니어스 바’와 ‘더 벙커’를 꼽을 수 있습니다. 지니어스 바에는 종이 전문가 ‘프린트 지니어스’와 인쇄 전문가 ‘페이퍼 지니어스’가 상주해 있어요. 이들은 종이, 인쇄, 패키지 등 작업하며 궁금했던 부분을 직접 상담해주는 역할을 해요. 디자인 제작물에 사용되는 출력, 제작 업체 정보 등 전문 컨설팅도 진행하고요. 더 벙커는 갤러리예요. 더페이퍼랩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죠. 주기적으로 전시회, 세미나, 팝업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립니다. 이 두 스폿은 더페이퍼랩이 나아갈 방향을 담은 공간이에요. 단순히 제작물 현실화를 넘어 전문가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정보를 얻고, 전시 등을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거든요. 디자이너들의 플레이그라운드나 다름없죠.

프린트 지니어스, 페이퍼 지니어스는 어떤 과정을 거쳐 선발하나요. 

지니어스는 애플에서 착안한 모델이에요. 애플이 아이폰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 지니어스라는 고객 접점 역할을 만든 것처럼, 삼원특수지가 취급하는 다양한 종이를 고객에게 보다 쉽고 명확하기 전달하기 위해 페이퍼 지니어스와 프린트 지니어스라는 역할을 부여했죠. 페이퍼 지니어스는 까다로운 입사 과정을 거친 뒤 회사 내부에서 약 6개월 이상의 전문 교육을 거친 후에 그 자격이 부여돼요. 프린트 지니어스는 패키지 제작 산업에서 10년 이상 일한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고객이 원하는 목적과 예산에 따라 최적의 종이를 제안하는 역할을 해요. 이를 위해선 종이 선택부터 제작 이슈까지 관련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전문성을 갖줘야 하죠. 자사에서 진행하는 철저한 교육과 훈련도 통과해야 하고요.  

더페이퍼랩은 메탈 소재를 주재료로 인테리어 했다.

더페이퍼랩은 메탈 소재를 주재료로 인테리어 했다.

갤러리, 전시회 등이 열리는 더 벙커.

갤러리, 전시회 등이 열리는 더 벙커.

5000여 종의 페이퍼로 채운 ‘문화 콘텐츠 공간’

인테리어가 독특해서 종이를 취급하는 매장 같아 보이지 않는데요.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 때문일 거예요. 인테리어는 저희가 가장 만족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종이는 우드라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깼거든요. 그 대안으로 메탈을 선택했어요. 사실 이 분위기를 내기 위해 거의 6개월 이상 윗분들을 설득했어요. 처음에는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결국은 차별성과 새로움을 강조한 저희의 뜻을 받아들이셨죠. 더페이퍼랩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일종의 ‘랩(lab·실험실)’이에요. ‘종이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실현해보자’는 의미를 담고 있죠.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을 공간에 녹이려면 따뜻한 우드 톤보다는 차갑고 중성적인 메탈 소재가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인테리어 입찰 과정에서도 70% 이상이 우드를 제안했지만 저희는 ‘기존의 규칙을 벗어나자’라는 원칙을 고수했고요.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워요. 공간의 정체성과 실험 정신이 인테리어에 그대로 녹아들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매장 중앙에 설치된 대형 전시물도 눈길을 끕니다.

종이의 조합으로 유기적인 움직임을 연출하는 ‘흐름의 결(Invisible Lines)’이라는 작품이에요. 더페이퍼랩에서 취급하는 비코팅지와 메탈지, 펄지 등을 조합해 완성했죠.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종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균형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더페이퍼랩에는 지금까지 총 4차례에 걸쳐 중앙 오브제를 설치했어요. 종이라는 재료로 만든 대형 설치작품을 통해 이곳이 방문객들에게 오래 기억되길 바라거든요. 또 오브제가 자연스럽게 포토 스폿의 역할도 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인 레퍼런스, 공간 벽면에 설치한 진열장을 통해 국내외 다양한 패키지 제작물과 종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디자인 레퍼런스, 공간 벽면에 설치한 진열장을 통해 국내외 다양한 패키지 제작물과 종이를 확인할 수 있다.

메탈 분위기와 어울리는 가구를 고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공간에 비치된 가구는 모두 별도 제작했어요. 더페이퍼랩은 예술성과 감각이 돋보이는 종이 오브제를 전시하는 곳이에요. 가구 역시 독창적이고 감각적인 쇼케이스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디자이너들이 자주 사용하는 프로그램 기능 중 하나인 ‘Layers(레이어)’에서 착안해 쇼케이스마다 Layers 01, 02, 03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어요. 디자이너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고요. 그중 Layers 01은 여러 개의 슬라이딩 형태로 구성돼 있어요. 관람자가 직접 하나하나 전시판을 열어보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죠. 몰입감은 물론 디자인 제작물을 탐색하는 재미까지 느낄 수 있어 반응이 아주 좋아요. 

세상을 이루는 대부분의 것은 트렌드를 따라가요. 종이도 마찬가지인가요. 

종이 역시 소비자의 니즈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끊임없이 변화해요. 패션업계에 블랙 & 화이트 스타일이 유행하다 다음 시즌에는 정반대의 파스텔 톤이 대세로 떠오르는 것처럼, 종이업계도 미니멀한 화이트 컬러 중심의 패키징이 주목받은 시기가 있는가 하면 컬러풀한 디자인이 유행하는 시즌도 있어요. 한때는 다양한 표면 처리를 한 화려하고 감각적인 특수지가 잘 팔렸었어요. 그러다 뷰티업계에서 친환경 유기농 제품이 유행하자 화학 물질을 최소화한 자연 소재 기반의 비목재 친환경 패키지가 각광받았죠. 이처럼 종이 산업도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에 맞춰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요. 저희 역시 이런 분위기를 잘 따라가기 위해 꾸준히 공부하고 있고요. 

공간 중앙에는 ‘흐름의 결’이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다.

공간 중앙에는 ‘흐름의 결’이라는 작품이 설치돼 있다.

벽면에 마련한 종이 샘플을 모아둔 공간.

벽면에 마련한 종이 샘플을 모아둔 공간.

 ‘종이는 결국 글을 쓰기 위한 도구’라는 인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편견이라고 생각해요. 종이는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형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여러 가지 재질과 질감, 컬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연한 소재거든요. 출판물은 물론이고 패키지, 아트워크, 오브제, 공간 연출, 심지어 가구에도 활용할 수 있죠. 디자이너의 상상력에 따라 정보를 담는 도구에서 경험을 만드는 재료로 확장할 수도 있고요. 특히 최근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종이가 친환경 소재로 재조명되고 있어요. 플라스틱이나 복합 소재를 대체하는 환경친화적 솔루션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고요. 결국 종이는 단순한 소모품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해주는 창의적인 플랫폼이나 다름없는 거죠.

현대사회가 디지털 문화로 바뀌면서 종이 사용이 줄어들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이렇게 방대한 종이를 선보이는 것보다 몇 가지 핵심 종이만 취급하는 편이 낫지 않나요. 

저희는 종이 전문 유통회사예요. 종이를 일반적인 시각으로 대해선 안 되죠. 종이로 할 수 있는 것, 종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남들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간 더페이퍼랩을 운영하며 깨달은 건 ‘종이는 단순한 산업재가 아닌 하나의 문화 콘텐츠’라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종이들이 존재해요. 이를 소비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저희의 사명이에요. 나아가 소비자들이 종이를 창작과 감성을 담는 매개체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고요. 

친환경 이슈로 ‘종이 안 쓰는 날’ 등이 제정되며 많은 기업에서 친환경 경영은 필수 과제가 됐어요. 이와 관련된 방향과 계획이 궁금해요.

삼원특수지는 오래전부터 환경 문제를 핵심 가치로 삼아왔어요. 2007년 국내 지류 유통업계 최초로 FSCⓇ CoC(국제산림관리인증)를 획득하며 친환경 경영의 기반을 다졌죠. 현재 전 직원이 친환경 사탕수수 펄프 100%로 제작된 얼스팩 복사지를 사용하는 등 다양한 친환경 활동을 실천하고 있어요. 이 외에 생산 단계에서의 환경성 강화 모니터링과 다양한 친환경 종이의 개발도 실시하고 있어요. 저희는 좀 더 엄격하고 정밀한 기준으로 친환경성을 검토하고 관리해요. 또 매년 해외 파트너사와 함께 제지 생산 과정에서의 탄소 감축 성과와 다음 목표를 공유하며 지속 가능한 방안을 고민하고요. 사실 친환경 이슈가 주목받는 건 저희에게 반가운 흐름이에요. 아직까지 패키지와 포장 분야에서 종이보다 더 친환경적인 소재는 드물다고 생각하거든요. 저희는 오랜 시간 친환경 경영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과 실천 역량을 차근차근 쌓아왔어요. 이 노력을 오랫동안 이어갈 예정이고요. 더불어 종이의 친환경성, 아름다움, 무한한 가능성을 널리 알리고 디자이너들과의 협업 및 배움을 지속해나갈 계획이에요.

#종이 #종이매장 #더페이퍼랩 #여성동아

사진 지호영 기자 사진제공 더페이퍼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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