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밑으로 늘어진 꼬불꼬불한 퍼머 머리, 몸에 꼭 붙는 반팔 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 뾰족한 구두…. 만화가 김수정씨(53)의 옷차림에서는 젊은 감각이 폴폴 묻어났다. 올해 인덕대학 만화·애니메이션과 신입생이 된 그에게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더니 “산업체 특별전형이었기에 망정이지 수학능력시험을 치렀으면 아마 입학하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웃는다.
“저는 아날로그 세대잖아요. 디지털 쪽에는 ‘젬병’입니다. 내 손으로 캐릭터 디자인을 하면서도 디지털 기기를 다루지 못해 답답했어요. 디지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원도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제대로 되질 않았어요. 차라리 학교에 들어가 정기교육을 받는 것이 집중적이고 안정적이겠다 싶었습니다.”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통해서는 지속적으로 공부해나갈 자신이 없어 대학을 택했다는 그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간다는 일이 쑥스러워서 남들에게 말도 안하고 지난 1년간 살금살금 알아봤다고 한다.
“2년전인가, 인덕대학 만화대전에 심사위원으로 갔던 적이 있어요. ‘캠퍼스가 참 아기자기하구나’ 생각했죠. 이진주씨가 만화·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있는데 장비, 기자재 등이 뛰어나다고 학교 자랑을 했어요.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몇몇 대학을 생각해봤죠. 인터넷을 두드리고 교수진도 살펴보다 이진주씨와 상의도 많이 했습니다.”
이진주씨는 ‘달려라 하니‘의 인기작가. 김수정씨보다 2년 후배로 80년초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우의를 다져오는 사이다. 이진주씨는 “우리 학교로 오라”고 적극 권유했다. 1년여에 걸쳐 심사를 받고 면접을 봤는데, ‘안되면 창피하고 된다고 해도 별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집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 겨울이었어요. 친한 만화가 몇명이 모여 송년회를 하는데 이진주 교수가 합격증을 줬어요. 저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듯이 받아들이더군요.”
3백만원 가량 등록금을 냈으며 “아빠가 대학 간다”고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간 상태이고, 둘째 딸은 유아교육 전공으로 지금 대학 2학년이다. 자녀들은 “그러세요” 하며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부인 류미희씨(34)도 평소 남편이 디지털 학습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고.
이진주씨가 “나보다 더 유명한 만화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김수정씨는 우리나라의 대표 만화가로 꼽힌다. 잠시 이력을 살펴보면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경상대 축산과를 다니다 만화가가 되고 싶어 대학을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75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81년 ‘오달자의 봄‘, 이듬해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날자 고도리‘, 83년 만화잡지 ‘보물섬‘을 통해 ‘아기공룡 둘리‘를 연재하며 부동의 인기작가로 지명도를 높이게 됐다. 90년대 중반에는 애니메이션·캐릭터·패션 사업에까지 진출했으며 지난 2000~2001에는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했다.
교수진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쟁쟁한 이력은 ‘늦깎이 새내기’인 그에게 오히려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배운다는 열망에서 ‘덜컥’ 시작은 했지만, ‘아들 딸뻘인 동기생들과 잘 적응하며 지낼 수 있을까’ ‘잘못해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35년 만에 다니는 학교의 지시사항들을 잘 숙지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
“1박2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는데 그땐 좀 서먹했어요. 만 19세가 안된 앳된 얼굴들 속에서 50대 아저씨가 끼니 학생들이 수군거릴 수밖에 없죠.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저 사람 만화가 아니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고요. 입학식을 할 때도 운동장에 서 있는데 동기생들이 저를 보고 실실 웃더군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 때 자기 소개를 하면서 제가 만화가 김수정이라는 풍문이 사실로 확인된 후 급속도로 가까워졌어요. 아마 둘리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웃음) 무엇보다도 만화·애니메이션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1백20명 동기생들이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묻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처음엔 ‘삼촌’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남학생들은 ‘형님’으로 통일했고 여학생들은 아직 적당한 호칭을 못 찾고 있다고. “급하면 옆구리 찌르겠죠” 하며 그는 껄껄 웃는다. 개강 첫날엔 조카들 갖다준다고 사인해달라는 동기생들도 많았다는 후문. 쉬는 시간에 동기생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줬더니 모두 즐거워했다고 한다.
“서른살 이상 나이차가 나니까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불안감이 너무 빨리 해소됐어요. ‘요즘 신세대들은 건방지고 닳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며칠 겪어보진 않았지만 저의 동기생들은 정말 순수하거든요.”
동기생들에 대해 진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는 학교에서만큼은 스무살 나이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얼마전 ‘노파심’ 어린 발언을 한 후 ‘아차’ 싶은 때가 있었다고.
“신입생 환영회 때였어요. 저는 술을 한잔도 못 마셔요. 그런데 요즘은 여학생들도 술을 잘 마시잖아요. 여학생들이 술 마시는 걸 보고 은연중에 ‘주량 알아서 조절해 마셔라’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영락없이 아빠가 딸에게 타이르는 말투죠. 불편한 발언으로 동기생들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가끔 어른스러운 입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는 이번 학기에 21학점을 신청했다. 심리학개론, 미술사, 토플, 기초컴퓨터, 2D 애니메이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다섯 시간씩 강의를 듣는데 수업은 오후 5시 반부터 시작해서 오후 9시55분에 끝난다. 마지막 시간엔 엉덩이도 아프고 너무 허기가 진다며 중간에 간식타임을 갖든지 해야겠다고 너털웃음을 짓기도 한다.
올해는 김수정씨에겐 여러가지로 의미가 깊은 해다. 분신과도 같은 둘리가 탄생 2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경사는 둘리가 캐릭터로는 최초로 시민증을 받게 된 것. 한국 만화계와 캐릭터산업 애니메이션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 부천시로부터 명예 시민증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스무살이 된 둘리 부천시 명예 시민 되며 ‘사람’으로 인정받아
“부천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문화도시입니다. 시내에 ‘둘리의 거리’가 있는 등 둘리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요. 둘리의 생일인 4월 22일쯤 잔치를 벌일 예정입니다. ‘둘리의 거리’에 있는 둘리 동상 앞에서 명예 주민등록증 및 명예 시민증 현판식을 갖게 되죠. 둘리의 주민등록번호는 830422-1000000이라고 하더군요(웃음).”
28년째 만화가로 살며 김수정씨만큼 성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는 만화가로서의 성공과는 별도로 자신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두번 결혼을 했다. 일반인에겐 잘 안 알려졌지만, 만화계에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연애결혼 했던 첫 부인과는 16년간 살다가 헤어졌다. 파경의 이유는 성격 차이.
“제 탓이 컸지요. ‘자상’이라는 단어하고는 거리가 먼 남편이었습니다. 만화가로서 레벨 업이 되기까지 과정이 무척 힘들었어요. ‘일’이 모든 것의 우선 순위였죠.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도 ‘만화 다음’에 결정을 했어요. 만화라는 영역에 그 누가 침투해 들어오거나 거슬리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요. 그러다보니 ‘가정’하고는 거리가 멀었을 수밖에요.”
한마디로 덜 다듬어진 상황이었다고 한다. 멋진 만화, 재미있는 만화, 감동이 있는 만화, 최고의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결혼생활 십수년간 이기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사이 가정엔 균열이 생겼고 그 틈을 메울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지금은 달라졌어요. 틀어지고 모난 것이 둥글어졌다고 할까요. 젊었을 때는 인생을 투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만큼 살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편해요. 역류하려 하면 너무 힘들어요. 물론 역류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90년 이혼한 그는 지금의 부인과 96년에 재혼했는데 그 사이 많은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불교 신자도 아니지만 산속 절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애썼다. 캐릭터 사업은 95년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겪은 아픔과 경험, 여기에 먼저 살았던 선인의 지혜를 불교적인 색채로 결합시킨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한다.
그의 재혼 스토리는 작가답게 로맨틱하다. 우선 부인 류미희씨는 그보다 무려 스무살이나 어리다. 그가 부인을 처음 만난 것은 96년 1월,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다. “여행도 잘 가야 한다”며 그가 털어놓은 러브스토리를 들어본다.
당시 그는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때문에 자료탐색 차 파리로 출장을 가게 됐다. 관계자 세명과 함께 떠났는데 셋만 출발하면 여비가 많이 들어 여행사의 투어 팀에 꼈다. 그때 류미희씨도 부모님, 조카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떠난 투어팀의 멤버였다.
“파리에서 틈틈이 일을 보다 합류했는데, 처음엔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매력 있는 여자다 생각했지만, 나이 차이가 통상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거든요(웃음). 그래서 같은 여행팀의 일원으로 편하게 대했죠. 그러던 중 ‘필’이 통했어요.”
처음 그녀는 그가 인기 만화작가인 것도 몰랐다. 조카들이 환호를 하자, 그때서야 그가 둘리를 그린 작가인 줄 알았다고. 게다가 “김수정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줄 처음 알았다”고 말하는 류씨가 당시 만화가로서 웬만큼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그로서는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여행 후에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데이트를 즐겼고 결혼 이야기까지 구체적으로 주고 받았다. “서로 어떤 점이 끌렸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부인의 ‘티 없이 맑은 느낌’에 매료된 것 같고 부인은 자신의 ‘자유스러운 느낌’을 좋아한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장인·장모 될 분들을 찾아뵈었을 때, 그 분들이 무척 난감해했다. 7박8일 같은 투어 팀에서 여행을 하며 김수정이라는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괜찮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윗감으로는 20년의 나이차와 이혼 경력이라는 탐탁지 않은 조건 때문. 하지만 온갖 노력 끝에 결국 결혼 승낙을 얻어냈고 두 사람은 만난 지 넉달 만에 결혼했다. 지금 부인과 전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데, 부인은 아이들과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올해로 결혼 7년차에 접어드는 이들 부부는 만화계에서 닭살 부부로 소문났을 만큼 금실을 자랑한다.
“지금도 집밖을 드나들 때는 포옹하고 키스하는 세리머니를 잊지 않아요. 주변에서 ‘물 좀 흐리지 말라’는 요청이 하도 많아서 요즘은 제가 좀 자제를 하는 편이죠(웃음).”
얼마전 인기도 조사 전문 인터넷 사이트 VIP (www.vip.co.kr)가 네티즌 2만여명을 대상으로 ‘가장 다시 보고 싶은 만화영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응답자의 26.5%가 ‘아기공룡 둘리‘를 꼽았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둘리를 기억하고 좋아하기에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고 한다.
“제 만화에 대한 거창한 철학은 없어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있고 나이가 들어서도 제 만화를 생각할 때 웃을 수 있으면 제 만화는 의미가 있는 거죠. 지금까지 그런 철학으로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저는 아날로그 세대잖아요. 디지털 쪽에는 ‘젬병’입니다. 내 손으로 캐릭터 디자인을 하면서도 디지털 기기를 다루지 못해 답답했어요. 디지털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원도 다녀봤습니다. 그런데 공부가 제대로 되질 않았어요. 차라리 학교에 들어가 정기교육을 받는 것이 집중적이고 안정적이겠다 싶었습니다.”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통해서는 지속적으로 공부해나갈 자신이 없어 대학을 택했다는 그는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간다는 일이 쑥스러워서 남들에게 말도 안하고 지난 1년간 살금살금 알아봤다고 한다.
“2년전인가, 인덕대학 만화대전에 심사위원으로 갔던 적이 있어요. ‘캠퍼스가 참 아기자기하구나’ 생각했죠. 이진주씨가 만화·애니메이션과 교수로 있는데 장비, 기자재 등이 뛰어나다고 학교 자랑을 했어요.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몇몇 대학을 생각해봤죠. 인터넷을 두드리고 교수진도 살펴보다 이진주씨와 상의도 많이 했습니다.”
이진주씨는 ‘달려라 하니‘의 인기작가. 김수정씨보다 2년 후배로 80년초에 처음 만나 지금까지 우의를 다져오는 사이다. 이진주씨는 “우리 학교로 오라”고 적극 권유했다. 1년여에 걸쳐 심사를 받고 면접을 봤는데, ‘안되면 창피하고 된다고 해도 별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집에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지난해 겨울이었어요. 친한 만화가 몇명이 모여 송년회를 하는데 이진주 교수가 합격증을 줬어요. 저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는 의외라는 듯이 받아들이더군요.”
3백만원 가량 등록금을 냈으며 “아빠가 대학 간다”고 자녀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간 상태이고, 둘째 딸은 유아교육 전공으로 지금 대학 2학년이다. 자녀들은 “그러세요” 하며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부인 류미희씨(34)도 평소 남편이 디지털 학습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고.
이진주씨가 “나보다 더 유명한 만화가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로 김수정씨는 우리나라의 대표 만화가로 꼽힌다. 잠시 이력을 살펴보면 경남 진주가 고향인 그는 경상대 축산과를 다니다 만화가가 되고 싶어 대학을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75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81년 ‘오달자의 봄‘, 이듬해 직장인의 애환을 그린 ‘날자 고도리‘, 83년 만화잡지 ‘보물섬‘을 통해 ‘아기공룡 둘리‘를 연재하며 부동의 인기작가로 지명도를 높이게 됐다. 90년대 중반에는 애니메이션·캐릭터·패션 사업에까지 진출했으며 지난 2000~2001에는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애니메이션·캐릭터·패션 전문회사 (주)둘리나라의 대표이기도 하다.
교수진조차 부담스러워 하는 쟁쟁한 이력은 ‘늦깎이 새내기’인 그에게 오히려 불안감으로 작용했다. 배운다는 열망에서 ‘덜컥’ 시작은 했지만, ‘아들 딸뻘인 동기생들과 잘 적응하며 지낼 수 있을까’ ‘잘못해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35년 만에 다니는 학교의 지시사항들을 잘 숙지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기 때문.
“1박2일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는데 그땐 좀 서먹했어요. 만 19세가 안된 앳된 얼굴들 속에서 50대 아저씨가 끼니 학생들이 수군거릴 수밖에 없죠.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람은 ‘저 사람 만화가 아니냐’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고요. 입학식을 할 때도 운동장에 서 있는데 동기생들이 저를 보고 실실 웃더군요. 그런데 신입생 환영회 때 자기 소개를 하면서 제가 만화가 김수정이라는 풍문이 사실로 확인된 후 급속도로 가까워졌어요. 아마 둘리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웃음) 무엇보다도 만화·애니메이션을 지향한다는 공통점이 있어서인 것 같아요.”
1백20명 동기생들이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묻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처음엔 ‘삼촌’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남학생들은 ‘형님’으로 통일했고 여학생들은 아직 적당한 호칭을 못 찾고 있다고. “급하면 옆구리 찌르겠죠” 하며 그는 껄껄 웃는다. 개강 첫날엔 조카들 갖다준다고 사인해달라는 동기생들도 많았다는 후문. 쉬는 시간에 동기생들에게 캐리커처를 그려줬더니 모두 즐거워했다고 한다.
“서른살 이상 나이차가 나니까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했어요. 그런데 불안감이 너무 빨리 해소됐어요. ‘요즘 신세대들은 건방지고 닳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아직 며칠 겪어보진 않았지만 저의 동기생들은 정말 순수하거든요.”
동기생들에 대해 진한 애정을 표현하는 그는 학교에서만큼은 스무살 나이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얼마전 ‘노파심’ 어린 발언을 한 후 ‘아차’ 싶은 때가 있었다고.
“신입생 환영회 때였어요. 저는 술을 한잔도 못 마셔요. 그런데 요즘은 여학생들도 술을 잘 마시잖아요. 여학생들이 술 마시는 걸 보고 은연중에 ‘주량 알아서 조절해 마셔라’라는 말이 튀어나왔어요. 영락없이 아빠가 딸에게 타이르는 말투죠. 불편한 발언으로 동기생들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지만, 가끔 어른스러운 입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는 이번 학기에 21학점을 신청했다. 심리학개론, 미술사, 토플, 기초컴퓨터, 2D 애니메이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다섯 시간씩 강의를 듣는데 수업은 오후 5시 반부터 시작해서 오후 9시55분에 끝난다. 마지막 시간엔 엉덩이도 아프고 너무 허기가 진다며 중간에 간식타임을 갖든지 해야겠다고 너털웃음을 짓기도 한다.
올해는 김수정씨에겐 여러가지로 의미가 깊은 해다. 분신과도 같은 둘리가 탄생 2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경사는 둘리가 캐릭터로는 최초로 시민증을 받게 된 것. 한국 만화계와 캐릭터산업 애니메이션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 부천시로부터 명예 시민증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스무살이 된 둘리 부천시 명예 시민 되며 ‘사람’으로 인정받아
“부천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육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문화도시입니다. 시내에 ‘둘리의 거리’가 있는 등 둘리와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요. 둘리의 생일인 4월 22일쯤 잔치를 벌일 예정입니다. ‘둘리의 거리’에 있는 둘리 동상 앞에서 명예 주민등록증 및 명예 시민증 현판식을 갖게 되죠. 둘리의 주민등록번호는 830422-1000000이라고 하더군요(웃음).”
28년째 만화가로 살며 김수정씨만큼 성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나 그는 만화가로서의 성공과는 별도로 자신의 삶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두번 결혼을 했다. 일반인에겐 잘 안 알려졌지만, 만화계에선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연애결혼 했던 첫 부인과는 16년간 살다가 헤어졌다. 파경의 이유는 성격 차이.
“제 탓이 컸지요. ‘자상’이라는 단어하고는 거리가 먼 남편이었습니다. 만화가로서 레벨 업이 되기까지 과정이 무척 힘들었어요. ‘일’이 모든 것의 우선 순위였죠. 어떤 중요한 일이 있어도 ‘만화 다음’에 결정을 했어요. 만화라는 영역에 그 누가 침투해 들어오거나 거슬리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요. 그러다보니 ‘가정’하고는 거리가 멀었을 수밖에요.”
한마디로 덜 다듬어진 상황이었다고 한다. 멋진 만화, 재미있는 만화, 감동이 있는 만화, 최고의 만화를 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결혼생활 십수년간 이기적이고 독선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 사이 가정엔 균열이 생겼고 그 틈을 메울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난 지금은 달라졌어요. 틀어지고 모난 것이 둥글어졌다고 할까요. 젊었을 때는 인생을 투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만큼 살다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그냥 물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편해요. 역류하려 하면 너무 힘들어요. 물론 역류해서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서른 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동기들이지만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90년 이혼한 그는 지금의 부인과 96년에 재혼했는데 그 사이 많은 방황의 세월을 보냈다. 불교 신자도 아니지만 산속 절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평화를 위해 애썼다. 캐릭터 사업은 95년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겪은 아픔과 경험, 여기에 먼저 살았던 선인의 지혜를 불교적인 색채로 결합시킨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도 피력한다.
그의 재혼 스토리는 작가답게 로맨틱하다. 우선 부인 류미희씨는 그보다 무려 스무살이나 어리다. 그가 부인을 처음 만난 것은 96년 1월, 파리행 비행기 안에서다. “여행도 잘 가야 한다”며 그가 털어놓은 러브스토리를 들어본다.
당시 그는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때문에 자료탐색 차 파리로 출장을 가게 됐다. 관계자 세명과 함께 떠났는데 셋만 출발하면 여비가 많이 들어 여행사의 투어 팀에 꼈다. 그때 류미희씨도 부모님, 조카들과 함께 가족여행을 떠난 투어팀의 멤버였다.
“파리에서 틈틈이 일을 보다 합류했는데, 처음엔 결혼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매력 있는 여자다 생각했지만, 나이 차이가 통상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거든요(웃음). 그래서 같은 여행팀의 일원으로 편하게 대했죠. 그러던 중 ‘필’이 통했어요.”
처음 그녀는 그가 인기 만화작가인 것도 몰랐다. 조카들이 환호를 하자, 그때서야 그가 둘리를 그린 작가인 줄 알았다고. 게다가 “김수정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줄 처음 알았다”고 말하는 류씨가 당시 만화가로서 웬만큼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는 그로서는 참 신선하게 느껴졌다.
여행 후에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며 데이트를 즐겼고 결혼 이야기까지 구체적으로 주고 받았다. “서로 어떤 점이 끌렸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부인의 ‘티 없이 맑은 느낌’에 매료된 것 같고 부인은 자신의 ‘자유스러운 느낌’을 좋아한 것 같다고 답한다.
하지만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장인·장모 될 분들을 찾아뵈었을 때, 그 분들이 무척 난감해했다. 7박8일 같은 투어 팀에서 여행을 하며 김수정이라는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괜찮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윗감으로는 20년의 나이차와 이혼 경력이라는 탐탁지 않은 조건 때문. 하지만 온갖 노력 끝에 결국 결혼 승낙을 얻어냈고 두 사람은 만난 지 넉달 만에 결혼했다. 지금 부인과 전처 사이에서 낳은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데, 부인은 아이들과도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올해로 결혼 7년차에 접어드는 이들 부부는 만화계에서 닭살 부부로 소문났을 만큼 금실을 자랑한다.
“지금도 집밖을 드나들 때는 포옹하고 키스하는 세리머니를 잊지 않아요. 주변에서 ‘물 좀 흐리지 말라’는 요청이 하도 많아서 요즘은 제가 좀 자제를 하는 편이죠(웃음).”
얼마전 인기도 조사 전문 인터넷 사이트 VIP (www.vip.co.kr)가 네티즌 2만여명을 대상으로 ‘가장 다시 보고 싶은 만화영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응답자의 26.5%가 ‘아기공룡 둘리‘를 꼽았다. 그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둘리를 기억하고 좋아하기에 그만큼 부담감도 크다고 한다.
“제 만화에 대한 거창한 철학은 없어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할 수 있고 나이가 들어서도 제 만화를 생각할 때 웃을 수 있으면 제 만화는 의미가 있는 거죠. 지금까지 그런 철학으로 일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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