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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장애, 그까짓 게 뭐라고!" 휠체어 타고 1인 5역 해내는 최국화 앵커

이경은 기자

2023. 02. 16

휠체어로 넘지 못하는 건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한다. 앵커부터 모델, 디자이너, 번역가, 강사까지 만능인 KBS 6기 장애인 앵커 최국화를 소개한다.



평일 낮 12시 50분경, KBS ‘뉴스12’에 다른 사람들보다 눈높이가 낮은 한 앵커가 등장한다. 휠체어를 탄 채 생활 뉴스를 전달하는 최국화 앵커다. 앉아 있는 곳만 다를 뿐 부드러운 목소리와 차분한 톤, 안정감 있는 미소에서 ‘프로’의 향기가 느껴진다.

최국화는 2021년 40세 늦깎이로 KBS 6기 장애인 앵커에 선발됐다. 그의 직업은 앵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15년 차 강사에, 최근에는 BTS와 함께 서울관광재단 모델로도 발탁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고 그 한계를 넘어 다니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1월 9일 동아매거진 스튜디오에서 최국화(42) 앵커를 만났다.

오늘도 뉴스를 마치고 오셨나요.

따끈한 뉴스를 전달하고 부리나케 왔죠. 평일 낮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 진행되는 정오 뉴스에서 ‘최국화의 생활뉴스’를 진행하고 있어요. 마지막 5분을 장식하는 코너입니다.

매일 오전이 바쁘겠네요.

주어진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임하고 있어서 앵커 일에 삶 전체를 맞췄어요. 집도 회사에서 15분 거리로 옮겼죠. 제 분량이 길진 않지만 시청자들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분야를 맡은 만큼 책임감이 막중하네요(웃음).



오는 길이 불편할까 걱정했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왔어요. 수동 휠체어는 대중교통을 타기엔 불편해서 주로 자차나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합니다. 모든 지하철 역사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게 아니고, 저상버스(바닥이 낮은 버스)가 아닌 경우도 있거든요. 외출 전 항상 내비게이션 스트리트 뷰(도로의 풍경을 보여주는 서비스)로 동선을 짜요. 길이 울퉁불퉁한지, 경사로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장 여부도 체크합니다.

발 헛디뎌 얻은 장애

뉴스 스튜디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최국화 앵커.

뉴스 스튜디오에서 활짝 웃고 있는 최국화 앵커.

그가 휠체어를 타기 시작한 건 16년 전이다. 이제는 바퀴로 다니는 일상이 익숙해졌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불의의 사고로 장애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2006년 말 중국 유학 당시 머물던 집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 낮은 높이였지만 엉덩이가 먼저 땅에 부딪혀 척추뼈를 다쳤다. 병원에서는 척추 신경이 손상됐다고 했다. 그는 2007년 허망하게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사고네요.

한동안은 제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어요. 일어서거나 다리에 힘을 줘보려 했죠. 그렇게 하면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반신이 마비되니 단순히 다리만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감각이나 배변 기능도 엉망이 됐어요. 처음엔 앉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죠.

중국 유학은 어떻게 결심한 건가요.

한국에서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일을 하다가 25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중국 유학을 선택했어요. 중국어를 공부할 목적으로 갔다가 전공을 살려 한국 학교의 저학년 교사로 일하고 있었죠. 해외에서 다치는 바람에 누운 상태로 한국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그 과정도 엄청 복잡했어요.

유학 중에 교사를 하다니 대단하네요.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여행가나 승무원을 꿈꾸기도 했어요. 그런데 다리를 못 쓰게 돼 막막했죠. 사고 이후론 ‘내가 꿈을 꿀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치고 나선 한 달에 50만 원이라도 버는 게 목표가 됐죠. 쓰일 수 있는 곳에서 쓰임 받고 싶단 생각뿐이었어요. 사회가 저를 어떻게 바라볼지 무서워서 밖에 나오질 못했거든요. 비장애인일 때 장애인을 바라보던 시선이 모두 비수가 돼 돌아온 거예요. 그 전엔 장애인들을 불행하고 불쌍한 대상 정도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 시기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2009년 마지막으로 입원했던 국립재활원에서 주치의 선생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어요.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 관련 교육 사업을 시작하는데 함께하지 않겠냐고요. 제 교사 경험을 선생님께서 알고 계셨거든요. 퇴원하기도 전에 장애 인식 개선 교육, 안전사고 예방 교육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2년 만에 사회로 돌아갔네요.

당시 비슷한 장애를 가진 환자들에 비하면 정말 빠른 편이었어요. 요즘은 여러 지원 제도가 생겨 더 빨리 사회로 나오는 분이 많아요. 사실 처음 일을 다시 시작할 땐 두려웠어요. 제 눈높이가 낮아져 사람을 쳐다보는 게 무서웠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상처로 다가왔어요. 시간이 지나자 하길 잘했다 싶었어요. 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그 이후에도 계속 망설였을 거고 사회 복귀도 늦어졌을 테니까요.

‘선입견’ 떨치고 ‘사명감’을 얻다

2022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취재 당시의 최국화 앵커.

2022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취재 당시의 최국화 앵커.

실제로 재활원에 오래 머무는 환자 중엔 사회 복귀가 어려워 퇴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존 살던 집에 베리어 프리(barrier free) 여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장애 이후의 생활을 뒷받침할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경우다. 자동차 전복 사고로 전신마비 진단을 받은 뒤, 6개월 만에 강단에 복귀한 이상묵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는 한 다큐멘터리에서 “경제사회적 환경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일로 복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최 앵커도 주치의의 강사직 제안을 인생의 행운으로 꼽는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 강사가 흔치 않았는데요.

당시는 장애인의 강연이 별로 없던 시기예요. 그래서 저도 공부를 시작했죠. 장애와 관련한 좋은 강연과 책을 마구잡이로 접했어요. 지금도 주말마다 대구로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가요. 교육 트렌드는 매일 바뀌니까요.

뉴스를 진행하면서 강의와 대학원 공부까지, ‘갓생(god+인생)’이네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난 덕이죠. 강사 시절 초반에 유치원생 교육을 간 적이 있어요. 아이는 성인과 달리 속마음을 숨기지 않아서 제가 상처받을까 걱정을 많이 했죠. 우려 속에서 교육을 마쳤는데 한 아이가 따라 나오더니 저를 만나 행복하다며 다음에 또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겠단 거예요. 제가 갖고 있던 선입견을 떨치는 계기가 되면서 이 일의 사명감이 무엇인지 처음 느꼈어요. 제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이유예요.

사랑에 대한 강연도 한다고요.

지난달 스타벅스 코리아에서 ‘열여덟 어른(만 18세로 보육원에서 퇴소해 홀로 생계를 꾸리는 보호종료아동)’ 대상 강연 요청이 왔어요. 연애와 사랑에 대한 내용도 부탁하셔서 속으로 놀랐어요. 장애인들은 무성의 존재로 취급받거나 연애 시장에서 번외로 분류되기도 하거든요. 저도 누군가 날 이성으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감이 자리했었고요. 제 연애도 잘 못 하고 있으니 할 말이 많진 않았지만(웃음) 연애 강연은 색다르고 좋은 경험이었어요.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주저함이 없네요.

망설이다 놓친 일은 수년이 지나도 ‘그때 할걸’ 싶거든요. 물론 시도했는데 잘 안 된 일도 있지만 집에서 이불 킥 몇 번 하면 잊혀요.

2009년 강사로 시작한 그의 커리어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됐다. 한국관광공사와 협업해 베리어 프리 여행지를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 MC도 맡았다. 최 앵커는 “여행 프로그램을 찍을 땐 전국 곳곳을 휠체어로 다녀야 했는데, 가끔 PD가 나를 업기도 하고 고생깨나 했다”며 웃었다. 지금은 서울관광재단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늦은 나이에 앵커가 됐어요.

전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틈날 때마다 앵커 일을 추천했어요. 응원을 듣다 보니 ‘나도 할 수 있나?’ 싶어 불혹이 넘은 나이에 급히 준비해 지원했죠. 장애인 앵커는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걸 보이는 자리인데 그동안 제가 해온 활동들과 운 좋게 겹쳤어요. 그게 합격 이유였던 것 같아요.
회사에서 일할 때 느끼는 불편함은 없나요.

전혀 없어요. 일하기 편한 환경을 조성해줘요. 가끔 제 마음을 읽는 것 같기도 해요(웃음). 얼마 전 새 스튜디오 바닥에 널브러진 전선이 불편하다는 생각만 했는데 다시 가니 전선 가리개로 모두 가려져 있더라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것 같아요.

주변 응원 덕이 커요. 같이 사는 친동생도 제게 뭐든 할 수 있다며 북돋아 주거든요. 그러다 보니 저도 “장애 까짓것 뭐라고!” 하면서 씩씩해져요. 어머니 소원이 장애를 가진 딸이 남에게 무시당하고 살지 않을 만큼 돈을 벌어다 주는 거였어요. 자식이 아프거나 장애를 가지면 부모는 죄인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요.

앵커가 되고 어머님께서 엄청 기뻐하셨겠네요.

동네 모임을 하다가도 제 코너 할 시간이 되면 식당에 들어가 밥을 드신대요. 본방 사수하려고요. 자랑거리가 생긴 거니까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너무 좋아하시죠.

들을수록 재활할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이 느껴집니다.

맞아요. 주변의 지지가 없으면 활동이 가능한 데도 시설로 보내지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장애별로 세분화된 사회 복귀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요즘엔 장애인 의무 고용 같은 행정 제도가 많이 생겨 나아지고 있지만 안타까운 경우도 여전히 많아요. 사고가 나고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서 낙심해 있는 제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던 같은 병실 언니가 안타까운 선택을 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전해 들었어요. 환경이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죠.

“받은 만큼 세상에 보탬이 되고 싶다”

오는 3월 최국화는 총 2년 임기의 앵커 일을 마무리한다. 최 앵커는 아쉬움을 느끼기보단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보였다. 우선 1기 앰배서더로 활동하는 삼성물산 유니버설 브랜드 ‘하티스트(HEARTIST)’의 의복 디자인에 적극 참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2020년 4월 론칭한 하티스트는 휠체어 장애인도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의류를 선보이는 곳이다. 또 앵커 경력과 유아교육 전공을 바탕으로 아이와 함께하는 TV 프로그램 진행도 꿈꾸고 있다.

재주가 많아서 그런지 꿈도 다양하네요.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지금까지 받은 사랑이 큰데 저만 받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하나만 덧붙이면 BTS가 속한 하이브 엔터테인먼트 사옥 내 안내판 중국어 번역도 제가 했어요. 재능 기부로요. ‘아미’라서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웃음).

본인 삶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다면요.

‘최 앵커가 하는 걸 보고 나도 용기를 얻었다’ 생각하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2022년 3월 장애인 앵커로는 최초로 베이징 동계패럴림픽 취재를 다녀왔어요. 중국 출장도 어려웠지만 출장을 가기 전부터 강원도 강릉·횡성 등 훈련 장소를 돌면서 선수들을 인터뷰했는데, 그땐 정말 힘들었어요. 영하 25℃의 추운 날씨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일 때라 선수를 만날 때마다 PCR 검사를 해야 했거든요. 그럼에도 저를 보고 꿈을 갖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선수들의 열정에 감동받기도 했고요. 제 삶을 보고 조금이라도 장애인분들의 재활에 자극과 용기를 주면 좋겠습니다.

#최국화 #장애인앵커 #재활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최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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