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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가수 화가’ 조영남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이유

윤혜진 프리랜서 기자

2022. 02. 05

지난해 12월 가수 조영남이 데뷔 50주년 기념 앨범을 냈다. 올 2월에는 그림 전시회도 연다.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만난 조영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요즘”이라며 웃었다.

인테리어를 위해서라면 보통 그림을 벽에 걸거나 기대 세워둔다. 조영남(77)의 집에는 세우거나 걸고도 남은 그림이 거실 바닥에 그냥 눕혀져 있다. 이젤과 물감, 붓, 연필 등 작업 도구도 죄다 거실에 나와 있다. 한강 뷰가 펼쳐진 넓은 거실이 모두 작업실인 셈이다. 통성명 후 조영남은 원래 하던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앉을 자리를 물색하며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자 “내 생애 최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거창한 답이 돌아왔다.

“일단 5~6년 오랜 재판 기간에도 여자 친구들이 한 명도 떠나가지 않았어요. 또 난생처음 은행 빚을 졌는데 다 갚을 때가 됐고요. 이 이상 행복이 뭐 있겠어요. 나는 버킷 리스트라 할 만한 게 없어요.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는 뜻이지.”

데뷔 50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해 기쁘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올 줄 알았다. 하긴 기념 앨범에 큰 의미를 뒀다면 50주년을 3년이나 지난 후 챙길 리가 없다. 1968년 ‘딜라일라’로 가요계에 입문한 조영남의 데뷔 50주년은 정확히 따지면 2018년이다.

“이 음반은 내가 내자고 한 게 아니에요. 작곡하고 작사하는 친구들이 내자 해서 한참 다퉜어요. 왜 늙어 보이게 데뷔 햇수를 밝히는 거냐고요. ‘엘비스 프레슬리 몇 주년 기념 음반’ 들어봤어요? 마이클 잭슨, 브루스 스프링스틴도 안 내잖아.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타이틀을 달고 나와야 시선을 끈다고 하니 결국 내가 졌지.”

히트곡을 내는 건 운, 나는 행운아

우여곡절 끝에 나온 이번 앨범 타이틀곡은 ‘삼팔광땡’이다. ‘삼팔광땡’은 화투로 하는 게임 ‘섰다’에서 최고의 패를 의미한다. 마음 가는 대로 잘 살아온 조영남의 인생을 ‘삼팔광땡’에 빗댔다. 가수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작곡한 정기수와 가수 소명의 ‘최고의 사랑’을 만든 작곡가 한빈이 공동 작사·작곡했다.



이 노래를 녹음하다 재미있는 가사가 떠오른 조영남은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꾼 조영남 버전의 ‘내인생 삼팔광땡’이란 곡도 한 앨범에 담았다. 이 곡 가사에는 동료 가수 이미자, 패티김, 조용필, 나훈아가 등장한다. 그들과 노래해봤으니 이만하면 자신의 인생이 삼팔광땡이라는 것이다. 조영남은 “조용필이 ‘바운스’, 나훈아가 ‘테스형!’을 발표해 요란법석을 떨 때 친구들이 ‘넌 뭐 하냐’고 하더라”며 “속칭 쪽이 팔려 쓰게 된 곡”이라고 했다.

“가사를 쓰며 누구를 넣을지 고민하지 않았어요. 이미자 누님과 패티김 누님은 맨날 같이 노래했고 용필이랑 나훈아는 나랑 셋이서 찍은 사진이 있어요. 그 희한한 사진을 보다 조영남 버전 ‘삼팔광땡’을 완성했지. 이 판을 사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골라서 들으라는 의미예요.”

이야기를 하며 보여준 사진에는 한때 지금의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자랑한 젊은 시절의 조영남과 나훈아, 조용필이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일찍이 돈을 벌고자 음악다방 ‘쎄씨봉’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조영남은 번안곡 ‘딜라일라’를 시작으로 ‘내 고향 충청도’‘제비’ ‘화개장터’ ‘도시여 안녕’ 등 여러 히트곡을 냈다. 타고난 성량과 성악 발성을 바탕으로 정통 클래식과 이른바 ‘딴따라’ 사이를 오가는 창법이 조영남 특유의 매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국민 가수’ 조영남은 2016년 그림 대작 혐의로 기소돼 2020년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4년 넘는 시간 동안 무대에 서지 못했다. 그사이 아이돌 일색이던 가요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무명 가수였던 송가인, 임영웅 등이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로 떠오르며 트로트 붐이 일었다. 2020년 무죄 판결 후 첫 방송 출연 때 조영남은 임영웅과 ‘화개장터’를, 이찬원과 ‘딜라일라’를 불렀다. 조영남은 “몇 해 전부터 가요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가수들이 다 잘생기고 노래를 정말 잘하더라”고 했다.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방송에서 활약하고 많은 무대에 서는 친구들도 독자적인 히트곡을 가진 경우가 드물잖아요. 이건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고 운 같아요. 그런 점에서 나는 운이 좋은 시대에 태어났죠.”

가요계 대선배이자 인생 선배로서 조영남이 가진 해탈한 듯한 느낌은 이번 앨범 곳곳에서 묻어난다. ‘어허야 어허 세상살이 일장춘몽이요 소풍이지’(‘삼팔광땡’ 중), ‘검은 구름 끼었다고 근심 걱정 말아요’(‘옴마니 반매훔’ 중), ‘사방에서 태클오고 나는 맨날 연전연패 it’s alright’(‘삐뚤빼뚤’ 중) 등의 가사가 노래 듣는 이의 고단한 삶을 토닥여준다.

“산다는 게 실제로 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제 해탈할 나이가 됐어요. (집에 와 있던 작곡가 정기수와 한빈을 손으로 가리키며) 저 친구들이 내 나이에 맞게 노래를 만들어줬죠. 물론 마음에 안 드는 노래는 내가 안 부르지(웃음). ‘이건 안 된다’ 딱 말해요. 그러다 보니 작업하면서 작곡가, 작사가랑 싸움도 하고 나름대로 재미있어.”

‘유배 생활’ 겪고도 계속 그림 그리는 이유

한양대 음대를 중퇴하고 서울대 성악과를 명예 졸업한 조영남이 전공과 상관없는 미술 활동에 몰입하기 시작한 건 미국 체류 시기인 1970년대 중반부터다. 이후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50여 회 진행하고 단체전에도 600여 회 참여해왔다. 조영남은 “음악과 미술 두 가지를 다 해보니 차이점이 느껴진다”며 “사람들과 아웅다웅 다투면서 같이 음악 작업하는 것도 재미있고 혼자 내 멋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미있다”고 설명했다.

“음악과 미술은 좀 달라요. 음악은 규칙이 있어요. 피아노 건반이 88개잖아요. 이게 88개인 이유는 지금 있는 가장 낮은음 건반에서 밑으로 더 만들어봤자 사람 귀로 잘 구별이 안 돼서예요. 그 음역대 안에서만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반면 미술은 100% 자유예요. 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는 게 없어요. 예를 들어 피카소가 입체파로 유명하잖아. 그런데 나는 여기 보이는 지붕을 3D(3차원)로 표현했단 말이야. 그래놓고는 속으로 ‘형님, 형님이 그렇게 애썼던 입체파 화풍을 제가 완성했습니다. 제가 형님보다 한 수 위입니다’ 생각한다고. 이런 맛에 미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번에 나온 50주년 기념 앨범 표지도 조영남이 그렸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포옹’에 자신의 시그너처인 화투를 덧입혀 새롭게 완성한 작품이다.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데이비드 호크니를 지나 최근 클림트에 빠진 조영남은 그림 그리는 방식도 바꿨다. 예전에는 조수를 고용했다면 지금은 자신이 다 그린 샘플을 갤러리에 보낸다. 갤러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맡겨 판화를 찍듯 똑같은 작품을 그려 보내오면 조영남이 밋밋한 부분에 터치를 더해 완성하는 식이다. 팝아트 개인전을 준비하는 만화가 기안84 역시 한 방송을 통해 “직원들이랑 사전 협의를 하고 팀으로 간다”며 직원들이 자기 그림에 채색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조영남은 “이제는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이 그림만 그리면 된다”며 “내가 지금 최고로 행복하다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고 했다.

“아, 그림 얘기 나온 김에 그 얘기도 좀 해야겠다. 재판 끝나고 나서 내 그림을 관리하는 갤러리 주인과 ‘대법원 무죄 판결도 났으니 조수 열 명 정도와 같이 작업하는 걸 보여주자’ 해서 그 모습을 촬영해 인터넷에 올렸어요. 그랬더니 그걸 본 친한 미대 교수가 또 난리 난다는 거예요. 결국 올린 걸 내리고 그만뒀어요. 그런데 생각해봅시다.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을 했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해서 직접 망치 들고 다 했겠어요? 앤디 워홀도 조수를 몇십 명씩 써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예요. 내 그림은 당연히 조영남의 그림으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거잖아. 내가 억울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사람들이 몰라서 그런 거니까 어떻게든 제대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번 생긴 프레임을 걷어내기란 쉽지 않다. 조영남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그림을 꾸준히 그리는 이유는 단지 그림이 좋아서다. 간혹 그가 미대 출신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단다. “다 몰라서 하는 얘기야. 아트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다”라며 “엘비스 프레슬리는 트럭을 몰다 가수가 됐고 비틀스도 음대를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한 번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고 싶다”

1945년생인 조영남은 카메라 뒤보다 앞에서 살아온 세월이 훨씬 더 길다. 자기 말이 이슈가 될 것을 알지만 거침없다. 이런 그의 직설화법은 종종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에는 전 부인 윤여정 배우의 오스카 수상에 대해 언급했다 구설에 휘말렸다. 이에 대해 조영남은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저 묻는 말에 대답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조영남은 “기자가 물어보기에 바람피운 남자에 대한 우아한 복수를 당한 것 같다고 내 나름대로 멋있게 표현한 건데 악플이 엄청났다”면서 “결코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낼 생각은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조영남은 왜 노코멘트를 하거나 간략하게 답하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수상 관련 발언의 후폭풍으로 전시가 취소되는 난리를 겪고도 조영남은 얼마 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또 전 부인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는 “내가 돌싱이 아니었으면 화가도 못 됐을 것”이란 얘기였다.

“기자나 방송국에서 나한테 질문을 할 때는 기대하는 바가 있을 거잖아요. 내가 노코멘트 해버리면 쓸 게 없어지지. 다 먹고살려고 질문했을 텐데 말이에요. 돌싱 얘기가 나온 방송 같은 경우는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거예요. 내가 여정이하고 같이 살았으면 혼자 두고 어떻게 그림을 그리겠어요. 여러 면에서 정말 멋있고 고맙게 생각해요.”

이번에도 조영남은 두루뭉술하게 빼지 않았다. ‘이슈 메이커 조영남의 이미지는 반은 자처한 거고 반은 외부 영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기자가 조영남의 청담동 빌라로 오는 택시 안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목적지로 해당 빌라 이름을 대자 택시 기사는 “거기 조영남 씨가 산다던데? 부자잖아. 인터넷에서 봤어요”라고 아는 체를 했다. 시간을 아끼고자 만날 사람을 다 집으로 부른 건 조영남이 맞지만, 그렇다고 자기 사는 곳 위치와 시세까지 시시콜콜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진 않았을 터다. “유명인의 삶도 피곤하겠다”며 이 일화를 전해주자 조영남은 “하하하” 웃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반반이에요. 그간의 사건들은 보통 내 입방정 때문에 일어난 거야. 돌이켜봤을 때 가장 후회하는 말이 있어요. 예전에 인터뷰하다가 얼결에 ‘내 그림을 조수가 그려서 마땅치 않다 생각하는 사람은 가져와라. 환불해주겠다’고 한 거예요. 나는 설마 내 그림을 산 사람들이 진짜 환불해달라고 가져오랴 싶었거든. 그런데 내가 기소가 되니까 물밀 듯이 환불요구를 해오더라고. 내 칠십 평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어.”

보통 그림을 팔면 판매가 절반을 화가가 받는다. 나머지 절반은 화랑 몫이다. 그런데 조영남은 저 발언 때문에 환불액 전부를 혼자 물어줬다고 한다. 그는 “그때 말조심해야 된다는 걸 배웠다”며 “재판이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2016년 시작된 ‘그림 대작’ 재판 1심에서 조영남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2심과 3심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조영남은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진짜’ 어른이 되는 동안 평소 65kg을 유지하던 체중이 47kg까지 줄어들 만큼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돌아보며 조영남은 “나라에서 국비를 들여 나를 화가로 알려줬다. 유배 생활 동안 책도 두 권 냈고 무엇보다 재판을 하면서 우리 딸이 똑똑하게 잘 컸다는 것도 알았다”고 농을 건넸다. 곱씹어보면 세 시간에 걸친 인터뷰 내내 모든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어떤 말에든 유머 한 스푼이 꼭 첨가됐다. 심지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어머니가 화투 갖고 장난치지 말랬는데 그 말을 어겨 이렇게 됐나 보다”라고 말해 심각한 표정의 재판관을 기어이 웃긴 조영남이다.

“내 성미가 기본적으로 재미없는 일은 때려죽여도 안 해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재미있는 거 하다가 죽어야지. 난 ‘재미스트’야. 요즘은 육상 동영상 찾아보는 게 재미있어요. 스마트폰을 사용한 지 2년밖에 안 됐는데 진작 쓸걸 그랬어. 스마트폰으로 내 기사 댓글은 안 봐도 육상 영상은 열심히 찾아봐요. ‘유튜브’에는 세상 돌아가는 게 쫙 나오잖아. 그런데 이 물건 때문에 인간이 드라이해지고 더 경쟁사회가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산업혁명이 오늘날의 온난화를 만든 주범이듯 스마트폰은 인간의 온난화를 진행시키기 딱 좋은 물건이야.”

‘재미스트’ 조영남의 삼팔광땡 인생

자칭 ‘재미스트’와의 대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그는 이야기를 나누다 불쑥 큐레이터가 된 듯 그림 투어를 시켜주고, 돌연 피아노를 연주하며 신곡 ‘삼팔광땡’도 들려줬다. 이보다 더 자유롭게 살 수 없을 듯 보이지만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50여 년을 버틴 조영남이다. 그는 반드시 지키는 선이 있다고 했다. 첫째, 해야 할 일은 결코 대충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모 일간지 칼럼 연재를 마친 조영남은 연재 기간 43주 동안 단 한 번도 마감을 어기지 않았다. 매번 빨간 펜으로 원고지 20매씩 채워 보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그림을 그린 이유도 알고 보니 2월에 예정된 전시회 때문이었다. 그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이번 전시는 2월 6일부터 경기 수원시 중부일보 건물 1층에서 한 달간 열릴 예정이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다 물어보라던 조영남은 아버지로서의 삶에 대한 말을 묻자 대답을 아꼈다.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불현듯 생각났다며 “버킷 리스트가 돈 다 쓰고 죽기”라 말한 그는 “남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의외였다. 50여 년을 대중 앞에 서왔으면서도 온갖 오해를 산 그를, 아무리 직접 마주했다 해도 단 세 시간 만에 다 파악하기란 애초에 무리였을지 모른다. 인터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기자를 배웅하던 조영남은 무심한 듯 말했다.

“오늘 이 ‘오징어 게임’ 트레이닝복을 일부러 입었어. 나중에 인터뷰 사진을 보면 지금 이 시대에 찍은 거구나, 바로 알 수 있잖아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겠지만 그때 이 사진을 보고 ‘조영남이 그림 그리는 모습은 이랬다’라고 잘 써줘요(웃음). 나는 매 순간 충실하게 살아보려고 애쓸 뿐이야. 재미없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

#여성동아

사진 홍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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