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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젝스키스 이재진, 분식점 사장 되기까지

“양현석·이은주 동생 부부, 사랑하는 내 가족에 대해”

글·진혜린 | 사진·이기욱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13. 03. 15

1세대 아이돌 젝스키스의 멤버 이재진이 프랜차이즈 분식점 사장이 됐다. 이제는 ‘신화’가 된 아이돌 그룹 멤버였던 그가 분식점 사장이 되기까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된 적 없는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었다. 새로운 시작점에 선 그는 자신의 꿈을 이뤄나가고 있는 지금이 충분히 행복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젝스키스 이재진, 분식점 사장 되기까지


지난 1월 초, 이재진(34)이 자신의 매부인 양현석의 건물에 분식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직접 찾아갔다. 홍대의 랜드마크라고 불리는 삼거리에 위치한 빌딩의 2층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이재진은 젝스키스 10년 후의 모습이 아닌, 젝스키스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기자의 방문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러면서 단지 분식점 사장으로서 인터뷰를 하는 것이 처음이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겠다며 정식 인터뷰까지 말미를 달라고 했다.
1월 말 다시 만난 이재진에 대한 개인적인 첫인상은 한마디로 ‘솔직한 청년’이었다. 적당히 보기 좋게 포장하는 법이 없었다. 작위적인 변명을 늘어놓거나 손발 오그라드는 ‘듣기 좋은 말’도 하지 않아 더욱 인간적이었다. 그래서 오해만 잔뜩 안고 찾아가 듣기 좋은 말만 들은 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만큼 그는 유쾌한 사나이였다.

매부 양현석의 제안으로 차린 분식집
“누군가는 동생을 시집 잘 보내서 덕 보고 산다고 할 거예요.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그냥 ‘복’이라고 생각해요. 첫 번째는 동생의 복일 테고, 그 복 때문에 동생이 행복하게 사니까 제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거고요. 그것은 결국 제 복인 거죠.”
이재진은 아이돌 1세대의 화려함을 내려놓고 이제는 평범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꺼릴 게 없다고 했다. 단지 일단 가게 운영을 맡았으니 그 가게를 잘 꾸려나가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했다.
“가게를 여는 문제는 2년 전쯤 현석이 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어요. 지금도 저 혼자 먹고사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지금껏 돈도 안 벌고 쭉 놀았지만, 특별히 큰돈 들어갈 일도 없으니까 잘 살았거든요(웃음). 문제는 앞으로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려면 안정적인 돈벌이를 해야 한다는 거였죠. 그것을 위해 저도 하고 싶은 일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현석이 형이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은 거죠.”
말로는 군 제대 후 ‘놀았다’고 하지만 사실 차근차근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첫 단계로 자신의 이름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내놓은 것. 그의 미술적 재능은 이미 젝스키스 활동 당시에도 주목을 끌었는데, 최근에는 빅뱅의 스페셜 에디션 앨범 속에 다섯 멤버들의 캐릭터 일러스트를 그렸다. 그는 만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2011년에는 애니메이션을 제대로 공부하려고 일본 유학을 준비했지만 뜬금없는 원전 사고로 때를 놓쳤다. 그래도 분식점을 열기 전까지는 작품과 사업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애를 써왔단다.
“꾸준히 관련 전문가들과 미팅하면서 구상을 해왔어요. 애니메이션 사업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은 현실적으로 가게 운영과 동시에 진행하기 어려워 일단 가게 일에만 전념하고 있지만 가게가 안정되면 애니메이션 일을 다시 시작하려고 해요.”
매부의 제안으로, 매부의 아이디어로, 매부의 빌딩에 문을 열게 된 가게지만 대충 꾸려갈 생각은 전혀 없다. 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킨다. 특히 새벽 1시 반까지 문을 여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잠시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그가 주력하는 일은 가게의 흐름 전반을 살펴보면서 시간대별로 주요 고객층을 파악하는 것. 날씨에 따라, 시기에 따라 어떤 변화가 있는지도 살펴본다. 이것이 메뉴 개발로 이어지는데, 최근 동종 업계 매장에서는 보기 드문 커피 머신을 들여놓은 것도 그 일환이라고 했다. 보통 평일 낮에는 자녀를 데리고 온 엄마들이나 직장인들의 모임이 많고, 주말이나 저녁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데 그들이 식사 후 자주 찾는 메뉴가 바로 커피이기 때문이다.

젝스키스 이재진, 분식점 사장 되기까지

젝스키스는 1997년 데뷔해 2000년 해체하기까지 H.O.T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화려한 아이돌 1세대를 장식했다. 맨 왼쪽이 이재진이다.



“가게를 안 하고 큰 욕심 없이 사는 게 오히려 편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앞날을 생각하면 그럴 수만도 없잖아요. 현석이 형이 가게 문을 열 때 ‘못하면 에누리도 없다’고 했거든요(웃음). 그 말이 빈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결국 매출이 모든 것을 말해주겠죠. 사장이 매출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지만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전화로 가게 상황을 보고받으면서 운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저는 직접 나와서 상황을 판단하고 급한 일은 바로바로 해결하는 것이 사장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다못해 고장 난 기계를 고치는 거라도 하면 좋잖아요.”



젝스키스 이재진, 분식점 사장 되기까지


이재진, 돈 쓰는 재미에 산다는데?
이재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가죽 안대를 쓰고 ‘폼생폼사’를 외치던 카리스마나 연예인 특유의 어깨 힘이 느껴질 거라고 오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를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깨진 이미지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군 제대 후 계속 놀았는데 무슨 돈으로 먹고살았을까? 아~ 양현석이 도와주었겠구나’라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지 않게 된다.
“요즘에는 돈 쓰는 재미에 살아요. 돈이 많아서 돈을 펑펑 쓴다는 게 아니라, 제가 누릴 수 있는 선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저렴하고 융통성 있게 돈을 쓸 수 있게 됐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맛을 이제야 느끼는 것 같아요.”
정확히 선을 긋자면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동생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동생한테 5만9천원 받을 일이 있는데, 아직 못 받았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이럴 때, 잔돈 없다며 5만원짜리 두 장을 줘야 ‘아, 동생이 시집 잘 가서 이런 게 좋구나’ 싶을 거 같다며 농담을 한다. 워낙 씀씀이가 적어서 그동안 번 돈을 잘 간수해왔던 그였다.
“할인카드나 쿠폰 같은 제도가 얼마나 잘돼 있는데요. 여기저기 알아보면 갖고 싶은 물건도 싸게 살 수 있고, 적은 돈으로도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거든요.”
그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알뜰 절약 노하우를 들으며 한참을 웃었는데 그 속에는 동생네에서 고추장 가져오기 같은 소소한 비책 등도 숨어 있어서 기사에 다 공개하지 못하겠다.
“은주가 결혼하기 전에도 저는 늘 그렇게 살았어요. 사람들은 연예인이니까 돈을 많이 쓸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연예인처럼 살지 않았거든요. 젝스키스 멤버들 중에는 집안이 부유해서 씀씀이가 큰 친구들도 있었지만 해외 공연 갔다 오면서 면세점에 들르면 걔네들이 뭘 사는 건지, 그게 좋은 건지 어떤 건지도 잘 몰랐죠. 이제는 알아도 돈 아까워서 잘 못 사요(웃음).”
젝스키스 활동 당시에는 멤버들 간의 가정 형편이 극과 극으로 갈려 젝스키스의 ‘부익부 빈익빈’ 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빈익빈에 속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재진이었다. 돈 쓰는 맛을 요즘에서야 알게 됐다는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돈 필요하지?’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정작 그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였거든요. 젝스키스 데뷔 후 몇 개월 만에 부모님께 집을 사드리고도 남을 만큼 벌었으니까요. 하지만 늘 저희 집 가정 형편이 엄청 어려운 것처럼 방송에서 그려지곤 했어요. 정작 저에게 가수 활동으로 벌었던 돈은 무척 큰돈이었고, 부모님께 전부 드려서 차곡차곡 모아왔었죠. 두 분이 돌아가신 지금도 그 돈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참, 저희 집이 방송에 나갈 때 은주가 살짝 등장한 적이 있는데, 형(양현석)이 방송을 통해 은주를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는 젝스키스 시절을 ‘뭘 모르던 때’였다고 했다. 지금이야 학생 아이돌이 많지만 그 당시 고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해 춤추는 게 좋아 가수가 된 그는 자신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고.
“조금 약삭빨랐다면 나중을 위한 안전장치도 해뒀을 텐데, 그냥 논다고만 생각해서 손해를 봤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매니저들에게
맞는 일도 다반사였거든요. 그땐 왜 (김)재덕이랑 저만 맞았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멤버들은 다 집에 가고, 연습실에 남아 있는 아이들만 꼭 매니저한테 별일 아닌 일로 혼나고 얻어맞고 그랬죠(웃음). 그래도 참 걱정 없고, 힘든 일도 없던 시절이기도 했죠.”
하지만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것은 그의 주변에서 조장하는 불안감을 그대로 믿게 만들었다고 했다. 워낙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부모님이나 자신에게는 실제로 부모님 병원비나 기타 생활비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부모님도 편찮으신데, 돈 벌어야지”라던 사람들 때문에 사기도 당하고 이용도 당하면서 받은 상처가 컸다고 했다. 젝스키스 해체 후 솔로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라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다큐멘터리를 찍은 적이 있었어요. 집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으라는 둥, 버스를 타라는 둥, 학교에 가서 양치질을 하라는 둥, 엉뚱한 주문을 많이 했죠.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일인데, 연예인이 양은 냄비 뚜껑에 라면을 덜어 먹다 흘리고, 버스를 타려다가 사람들 시선이 두려워 택시를 타고 양치질도 학교에서나 가서 할 수 있다는 상황으로 만들어가더라고요(웃음).”
물론 그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결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힘든 사람은 은주였죠. 아버지가 2005년 췌장암 진단을 받고 2006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가 2007년 간경화 진단을 받고 2008년 간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4년간 동생이 병구완을 했거든요. 자신도 YG 연습생으로 있으면서 데뷔가 불확실한 상황이라 불안했을 텐데 부모님 병수발까지 도맡았으니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예요.”

아직도 웃으며 말하지 못하는 일
그 시간은 남매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다. 이재진 자신은 2006년 한 게임개발업체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군 대체 복무를 했지만 2007년 대대적인 병역특례비리조사에서 부실 복무 혐의를 받고 재입대 통보를 받았다. 부산에서 공예고등학교 도예과를 다녔던 그가 회사에서 웹디자인 업무를 주로 담당했는데, 이것이 병무청에서 지정한 분야인 ‘정보처리’와 ‘게임개발’로 보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병무청장을 상대로 ‘현역입영 취소 소송’을 내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 소송 과정 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근무 기간 동안 병무청에서 나와 업무 내용을 확인하고 이상 없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미지정 업무였다고 하니 너무 억울하더라고요. 그럴 거면 미리 말해주던가요(웃음).”
웃는 모습을 보니 얼핏 보기엔 이제 마음이 편해졌나 싶었다. 군대 두 번 갔다 온 또 다른 누구처럼 개그 소재로 삼을 만큼 말이다.
“아니에요. 저 아직도 웃으면서 말 못해요(웃음). 지금도 억울하다니까요.”
시간이 지나면 아픔의 색도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그 당시에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2006년 산업기능요원으로 근무를 시작한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소송 과정에서 어머니마저 저세상으로 보냈고, 그간 부모님 병간호로 고생만 하던, 그리고 언제 데뷔할지도 모를 기약 없는 연습생인 동생을 홀로 남겨두고 재입대를 해야 하는 상황. 그 어느 누가 담담할 수 있었겠는가.
“어릴 때는 특별한 거 없는 남매지간이었는데, 제가 젝스키스로 데뷔하자 더 각별해진 것 같아요. 여고생이던 은주로선 오빠가 젝스키스라는 것이 친구들에게 무척 자랑스러웠겠죠. 콘서트 티켓도 주고 용돈도 나름 거하게 주고, 협찬 받은 물건이나 팬들에게 받은 선물들은 아꼈다가 동생한테 주곤 했는데, 그 당시 말은 안 해도 엄청 고마웠나봐요. 은주가 YG 연습생이 된 뒤 제 집에 자주 들러 청소를 해주곤 했는데, 그때부터 더 친해졌어요.”
그래서 그랬냐고 물었다. 재입대가 억울하고 부모님의 연이은 부음으로 고통스럽고, 홀로 두고 온 동생이 걱정돼서 청원 휴가를 나왔다가 복귀하지 않은 것이냐고.
“그냥 힘들기만 했어요. 그때 우울증 자가 진단을 했는데, 우울증이라고 나오더라고요. 어렵게 복귀한 후에 재판을 받았는데, 그때 탄원서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아직도 정말 고마워요. 아버지 친구분들, 어머니 친구분들, 우리 젝스키스 팬들이 엄청난 분량의 탄원서를 보내주셨어요. 다들 영창에 가야 할 사안이라고 했지만 그분들 덕에 큰 처벌은 면할 수 있었죠.”
세간의 시선은 무척 따가웠다.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봤다.
“한참 후에 젝스키스 멤버들을 만났는데, ‘며칠 동안 탈영했느냐’고 묻더라고요. 탈영과 휴가 미복귀는 처벌부터 엄연히 다르거든요. 그런데 ‘그게 그거’라고 하데요. 그리고 현석이 형이 힘을 써줘서 영창에 가지 않은 거라고 확신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현석이 형은 그런 데 힘쓸 사람이 아니거든요. 힘쓴다고 될 일인가요?”
군 복귀 후 바로 수색대로 배치돼 힘든 시간을 보냈다. 헬기를 타거나 땅을 파고 산을 타면서 얼어 죽을 뻔했다며 보통의 군필자들처럼 군대 후일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남은 기간 동안 휴가나 면회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몸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그 상황을 즐기려고 노력했단다. 자신에게 우울증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에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 후 들려온 동생의 임신 소식과 양현석과 동생의 결혼, 그리고 제대 5일 전 태어난 첫째 조카를 생각하면 더욱 힘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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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진이 말하는 매부 양현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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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유로움과 당당함이 느껴지는 그에게서 우울증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성격 자체에 어둠이 없어 보였다. 선천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사람처럼. 하지만 그것은 이재진, 본인의 노력으로 만들어간 현재의 모습일 뿐이었다.
“계속 좋은 일만 생기니까 저도 좋지 않았던 기억을 없애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매일 운동을 하고 좋은 사람들 만나면서 기분 좋은 일만 만들려고 하는 거죠. 제 성격이 원래 좀 좋아요(웃음).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준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렇게 살려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요.”
남들이 말하는 ‘동생 시집 잘 보낸 덕’은 이런 부분에 해당된다. 남들이 오해하는 것처럼은 아니지만 분명 ‘주변의 행복’이 지금 자신의 행복에 밑거름이 돼주었으니 말이다. 동생과 양현석의 연애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양현석은 그 존재만으로 그의 가족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여동생 곁에 든든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재진과 부모님에게 위안이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하리라는 것은 모르고, 사귀는 줄은 알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어느 정도 확신한 상태에서 돌아가셨고요. 계속 (양현석이) 병문안을 왔거든요. 부모님은 사윗감이 연예인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하신 것 같아요. 든든한 사람이 동생 곁에 있어서 좋다고 하셨죠.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마지막에는 더 듬직해하셨어요.”
자신에게 부모님의 부재가 안겨다준 충격만큼, 동생에게도 부모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에서 동생 또한 친정 부모님의 손길을 원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동생네 집으로 출근을 한다.
“아기들은 밤에 자다가 잘 깬다면서요. 아침에 가보면 동생은 밤새 뒤척이는 아이들 돌보느라 잠이 부족할 때가 많거든요. 형은 늘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니까 거의 새벽이 돼야 돌아오고요. 요즘은 더욱 그런 것 같고요. 형이 주말이면 하루 종일 아이들과 놀아주지만 평일에는 아무래도 힘드니까요. 그럴 때 남들은 친정 부모님이 도와주곤 한다는데, 동생한테는 친정 부모님이 안 계시니까 제가 부모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에 눈을 뜨면 동생네 집으로 달려간다. 외삼촌의 방문을 가장 반기는 것은 물론 아이들이다. 이제 네 살 된 첫째 조카 유진이는 매부인 양현석을 빼다 박았다. 두 살 된 둘째 조카는 주변에서 삼촌인 이재진을 닮았다고 하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동생을 더 닮은 것 같단다. 이제는 훌쩍 커버린 두 조카를 양쪽 팔에 끼고 비행기를 태워 온 집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침부터 진이 다 빠지지만 자신에게는 행복을 충전하는 시간이라고도 했다. 새벽에 들어온 매부와 잠이 부족한 동생에게 그는 오전 나절 자유를 선사한다는 기쁨도 맛본다. 그래서인지 동생은 얼마 전부터 아예 오빠와 함께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꺼낸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새집을 찾고 있는데 그때 오빠도 함께 들어와 살자고 권한다고.
매일매일 닭살 돋게 사랑 표현을 하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알뜰히 오빠를 챙기는 동생이다. 이재진은 동생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살림꾼’이라는 것을 들었다. 정리 정돈 하나는 끝내준단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가족을 챙기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가슴 뭉클할 만큼 애틋하다고 했다. 아픈 부모님을 수년간 병간호했던 어린 시절의 동생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왜 같이 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그러자니까 그럴까 생각 중이에요. 제가 먼저 형이나 동생한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요구한 적은 없었어요. 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이번에 젝스키스 컴백 이야기가 나오면서 누군가는 너무도 쉽게 ‘현석이 형한테 부탁해봐’라고 말하더라고요. 현석이 형 입장에서 생각하면 왜 그걸 도와주고 싶겠어요. 또 현석이 형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오죽 능력이 없었으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양쪽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을 부탁은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성경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잖아요. 스스로의 노력 없이 도움만 바라서는 안 되겠죠.”
그렇지 않아도 최근 젝스키스의 컴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드라마‘응답하라 1997’ 이후 젝스키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은 강성훈이 젝스키스 컴백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기 때문이다. 2월 13일 강성훈이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으며 젝스키스의 컴백은 물거품이 됐지만 인터뷰 당시만 해도 여섯 멤버의 의사가 ‘컴백’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던 상황이었다.
“저는 무대에 대한 미련은 없어요. 무대 말고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제 꿈은 제주도처럼 한적한 곳에 가서 자전거 타면서 사는 거예요(웃음). 물론 젝스키스는 저에게 좋은 추억이죠. ‘응답하라 1997’을 조금 보긴 했는데, 봐도 잘 기억나질 않아요. 픽션과 논픽션이 섞여 있다던데, ‘저런 일이 있었나’ 싶기만 하더라고요.”
고백하자면 기자도 이재진과 같은 ‘서태지 키즈’임과 동시에 ‘응답하라 1997’로 대변되는 ‘응칠 세대’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치며 “지금 당장 무대에 서도 될 만큼 여전히 멋있다”는 다소 ‘응칠 세대’스러운 멘트를 던지고야 말았다. 그는 “컴백하고 싶은 성훈이 외에 최근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혼은 취향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면서도 결혼 후 가족을 건사할 걱정부터 먼저 하는 다소 엉뚱한 남자에게서 가족을, 그리고 자유를 동시에 사랑하는 독특한 사랑 방식이 느껴졌다.

장소협찬·스쿨푸드 홍대점(02-322-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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