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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생 사용설명서 첫 번째 | 인생을 튜닝하다

“달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세이셸공화국 명예총영사 정동창

글 | 김현미 기자 사진 | 조영철 기자

2011. 11. 16

“달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30대 초반에 최연소 부장이 돼 승승장구하던 직장을 10년 만에 박차고 나와 여행사를 차린 지 1년도 안 돼 외환위기를 맞았다. 하루 종일 사무실을 지켜봐야 손님은 오지 않고 주머니에는 빈 지갑뿐. 점심시간은 다가오는데 직원들 밥 사줄 돈이 없어 민망한 사장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실업자보다 더 처량한 신세가 돼 차를 몰고 한강공원으로 갔다. ‘이대로 강으로 몰고 들어가 빠져 죽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에라, 건강이나 챙기자” 하고 그때부터 무작정 걸었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우고, 영업한다고 허구한 날 술만 마셨더니 몸무게는 95kg이나 나가고 체력은 바닥이었습니다. 그 몸으로 뛰고 싶어도 뛸 수가 없었죠. 느릿느릿 걷기 시작해 조금씩 빠르게 걷다 보니 어느새 달리게 되더군요. 이듬해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뛸 때는 87kg으로 몸무게가 확 줄었죠.”
세이셸공화국 명예총영사이자 인오션M·C 대표인 정동창씨(50)의 달리기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운동장 한 바퀴 도는 것도 지구 한 바퀴 돌듯 힘겨웠던 그가 10km, 20km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다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할 만큼 자신감이 붙자 국내 마라톤대회란 대회는 다 쫓아다녔다. 2000년대 초반, 국내 마라톤대회를 17번 완주하고 한창 달리는 맛에 푹 빠져 있던 그는 해외 마라톤대회로 눈을 돌렸다. 뉴욕마라톤대회 참가를 문의했더니 투어 오퍼레이터를 통해 신청하라고 했다. 해외 마라톤대회를 위해 각국마다 엔트리 쿼터를 가진 여행사(투어 오퍼레이터)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일본은 이미 베이징마라톤대회 참가자를 위해 전세기를 3대나 띄우고, 하와이 호놀룰루마라톤에는 1만8천 명, 뉴욕마라톤에는 9백여 명이 참가할 만큼 마라톤 붐이 일어, 여행사들이 별도의 스포츠사업부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행 트렌드가 패키지 여행에서 자유 배낭여행으로 옮겨갔고, 앞으로 한국에도 스포츠 여행 시대가 올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마라톤대회 참가자는 그 도시를 달리고 가족들은 응원하며 여행을 즐기는 것이죠. 투어 오퍼레이터라고? 여행사라면 바로 제가 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당장 세계 유명 마라톤대회와 관광을 접목시킨 여행 상품을 개발했죠.”
이후 정 대표는 보스턴, 런던, 베를린, 호놀룰루, 파리, 로스앤젤레스, 괌, 사이판, 모스크바, 베이징, 상하이 등 국제대회만 35차례 이상 참가했다. 그렇게 10년을 미친 듯 달렸더니 몸무게는 20kg가량 줄었지만 에너지는 30대 시절보다 더 충만했다.
“달리기와 관련한 거라면 생리학, 해부학 책까지 2백여 권쯤 봤어요. 정보가 아쉬울 때라 외국 출장 갈 때마다 책을 사와 조금씩 번역해서 마라톤 동호회 홈페이지에 올렸죠. 마라톤 선수들 훈련장으로 쫓아가 그들이 어떻게 연습하는지, 몇 시간 운동하고 얼마나 쉬는지 일일이 기록하고, 음료수 사들고 가서 코치나 감독에게 물어가며 배웠어요. 나중에는 육상경기연맹 심판 자격증도 땄죠.”
전 세계에서 가져온 마라톤 자료들을 사무실에 비치했더니 제일 먼저 기자들이 찾아와 그에게 세계 마라톤 동향을 물었다. 달리기는 그의 취미생활이자 생업이 됐고, 정동창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라톤 전도사’였다. 달리느라 바빴고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알리느라 바빴던 시절, 그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2004년 초, 아프리카의 세이셸공화국 외교부가 보낸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내용은 ‘명예영사 신청을 받고 있으니 신청서를 제출하라’는 것. 나라 이름부터 너무 생소한 데다 내용도 엉뚱해서 그는 스팸 메일인 줄 알고 지나쳐버렸다. 6개월쯤 지났을 때 주 케냐 한국대사관의 이석조 대사가 “이메일을 못 받았느냐, 빨리 신청하라”고 재촉했다. 세이셸공화국은 우리나라 외교 공관이 없어서 케냐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처음엔 ‘도대체 저들이 나를 어떻게 알았나’ 싶었는데 모든 게 달리기와 여행이 맺어준 인연이었다. 2003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했던 케냐 선수들이 귀국 비행 편이 원활치 않아 대회가 끝났는데도 출국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회 조직위의 호텔 지원도 끊겨 가난한 케냐 선수들이 갈 곳이 없어 발을 구르자 정 대표는 선뜻 자신의 집을 제공하며 3일 동안 그들과 남산을 달리고 서울 관광도 시켜주었다.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외교부 사람들에게 ‘한국의 참 고마운 분’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것이 세이셸공화국에까지 전해져 명예총영사로 추천받게 된 것이다. 법정 스님과의 인연도 큰 힘이 됐다. 그는 법정 스님의 해외여행을 수행하게 된 인연으로 자주 길상사를 찾았고, 평소 박항률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던 법정 스님 덕분에 자연스럽게 박 화백과 친분을 맺었다. 박 화백이 지인인 이 대사에게 세이셸 명예총영사로 자신을 추천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마라톤대회 개최해 세이셸의 4대 국가 이벤트로 선정

“달리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천국’으로 꼽히는 세이셸공화국의 아름다운 자연.



얼떨결에 명예총영사가 됐지만 일단 책임을 맡은 이상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한국에 알릴까, 어떻게 하면 한국과 교류를 늘릴 수 있을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세이셸뿐이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달리기. 1백15개 섬으로 이루어진 세이셸공화국은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천국’으로 꼽힌다.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마라톤대회를 개최해보자! 상상을 현실로 옮기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세이셸 국민들의 의식이었다. 천혜의 자연환경이 제공한 넉넉한 먹을거리로 아쉬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인지라 땀 흘려 달려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국민 건강, 단합, 외국 관광객 유치, 국가 이미지 향상이라는 4가지 이유를 들어 세이셸 정부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2008년 2월 제1회 에코힐링세이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첫 대회 참가자는 3백50여 명. 그중 해외에서 온 참가자 수는 1백여 명이었다. 이후 참가자 수는 2009년 5백명, 2010년 1천 명 규모로 매년 두 배씩 늘고 있다. 또 국제육상경기연맹의 공인대회로 인정받아 낚시·요트·크레올 문화 페스티벌 행사와 함께 세이셸의 4대 국가 이벤트로 지정됐다.
“2005년 제가 처음 세이셸에 갔을 때 그곳을 찾아온 한국인은 우리 가족을 합쳐서 연간 2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2010년 2백50명, 올해는 5백명이 넘었고, 앞으로 연간 6천 명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몰디브는 많이 가는데, 세이셸은 거리상 몰디브와 큰 차가 없어요. 한국과 시차는 5시간밖에 안 납니다. 한마디로 몰라서 안 간 거죠. 다음 목표는 세이셸에 문화센터를 건립하는 것입니다. 1층에는 한국의 IT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2 층 전시장은 세계 문화 교류의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정 대표는 최근 펴낸 ‘달리면 인생이 달라진다’(예인)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달리기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온 후, 나와 내 인생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이전의 나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작할 엄두조차 내보지 못했던 엄청난 변화들이 찾아왔다. 달리기가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열정과 추진력을 깨우고, 한풀 꺾여 있던 자신감까지 모두 되살려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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