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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진정한 예능인

김태원의 정체를 밝히다

괴팍한 아티스트? 인자한 국민할매?

글·김유림 기자 사진·박해윤 기자, 부활엔터테인먼트 제공

2011. 10. 21

인생역전. 우리나라 록 그룹의 전설 ‘부활’의 리더 김태원에게 적합한 수식어다. 2008년 MBC ‘황금어장-라디오 스타’ 출연을 계기로 ‘재야의 고수’에서 단박에 스타로 등극한 그는 촌철살인 같은 언변으로 대중에게 웃음과 감동을 선사한다. 알면 알수록 궁금한 남자, 김태원의 지난 20년을 들었다.

김태원의 정체를 밝히다


새로운 예능의 대세, 김태원(46)은 요즘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다. 연말까지 ‘부활’ 전국투어 콘서트를 이어가야 하고, 난생처음 지휘봉을 휘두르며 KBS ‘남자의 자격’ 청춘합창단을 이끌고 있으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 섭외도 끊이지 않고 있다. 또 얼마 전까지는 MBC ‘위대한 탄생’에서 위대한 멘토로 활약하며 대중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당시 그는 “3등은 괜찮다. 하지만 3류는 안 된다”라는 명언을 비롯해 오디션 탈락자들에게 “여기까지라는 말은 없습니다. 항상 지금부터입니다”라는 격려와 질책이 담긴 감성적인 어록을 남겼다. 지난해부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딸과 함께 광고 출연까지 했으니 요즘이야말로 최고의 전성기가 아닐 수 없다.
2002년 이승철과 다시 손잡고 ‘네버엔딩 스토리’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뮤지션으로서 김태원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2008년 MBC ‘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 출연하면서 그의 재발견이 이뤄졌다. 당시 그는 엉뚱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재치 있는 언변을 선보였고, 다음날 바로 김태원 어록이라는 검색어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더니 이듬해 봄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 전격 합류, 깡마른 체구에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으로 ‘국민할매’란 애칭까지 얻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김태원이 ‘희야’ ‘사랑할수록’ ‘네버엔딩 스토리’를 만든 부활의 리더란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부활은 1985년 디엔드(The End)라는 이름으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다 이듬해 이승철을 보컬로 내세우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집 타이틀곡 ‘희야’ ‘안녕이라고 말하지 마’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88년 김태원이 대마초 흡입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르면서 2집 활동에 실패했다.
이 무렵 팀을 탈퇴한 이승철이 89년 첫 솔로 앨범 ‘마지막 콘서트’를 발표하면서 승승장구할 때 김태원과 부활은 오랜 침체기에 들어갔다. 1993년 부활은 3집 앨범을 발표하며 재기를 노렸다. 보컬 김재기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지만 데모 테이프에 단 한 번 녹음한 ‘사랑할수록’이 그대로 앨범에 실리면서 부활 3집은 1백만 장 이상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박완규를 영입해 발표한 5집 ‘론리 나잇’도 히트였다. 하지만 부활의 운은 여기서 다하는 듯했다. 2002년 이승철의 제안으로 다시 결합해 ‘네버엔딩 스토리’를 발표하기까지 긴 세월 동안 김태원은 또다시 어두운 동굴 속에 갇혀 지냈다.

공황장애·대인기피증 때문에 선택한 선글라스
9월 초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 강연회에 참석한 김태원은 오랜 슬럼프를 극복하고 ‘국민할매’ ‘국민멘토’로 사랑받게 되기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자타 공인 음유 시인답게 간혹 알듯 모를 듯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예상 밖에 있으라!”는 강연회 주제는 일반인의 상식에서 다소 비껴 있는 그의 인생관과 참으로 잘 맞아떨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채로 무대에 오른 김태원은 어린 시절 대인공포증과 공황장애를 겪은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부활’로 데뷔할 때까지 사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는 그의 고백에 객석이 잠시 웅성거렸다.
“서른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누군가를 볼 때 예의 주시하며 상대의 눈을 바라봤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무척 불편해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눈을 감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아이러니입니다. 제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랑한다’ ‘아름답다’라는 등의 감성적인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자 사람들은 어색해하면서도 저를 좋아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음악 하는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시에 나오는 언어를 쓰라’는 겁니다. 실제로 저는 20년 동안 홀로 고독하게 지내며 처절하게 그런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죠. 하지만 아름다운 말을 자주 사용하려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간 일상의 흔한 것들이 진짜 아름답게 보이거든요.”
김태원은 그동안 어록으로 화제를 모은 모든 말은 책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체득한 것임을 강조했다. 스스로 많은 ‘실험’을 했고 그래서 얻은 결과가 지금 자신의 모습이라는 얘기였다. 그동안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담담하게 말하면서 “그렇기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존재한다”며 지금 처한 상황이 좋지 않더라도 끝까지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얼마 전 MBC ‘무릎팍 도사’에 나와 밝혔듯이 지금까지 생사를 오가는 위기를 네 번이나 겪었다. 고등학생 시절 부산 송정 앞바다에서 익사할 뻔할 때, 대마초의 수렁에서 허덕일 때, 95년 간경화 판정을 받았을 때, 지난해 위암 수술을 받았을 때를 말한다. 위암은 ‘남자의 자격’에서 건강검진 미션을 수행하던 중 발견했는데, 응급수술진이 대기할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지만 그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의연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김태원의 정체를 밝히다


“고3 때까지 미술을 전공했지만 결국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저는 스물한 살, 이승철씨는 스무살 때 일입니다. 처음 ‘희야’를 타이틀곡으로 하겠다고 했을 때 팀 내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게 무슨 록이냐’는 거였죠. 하지만 대중이 듣지 않는 음악은 소용없다고 생각했고 모든 책임은 리더인 내가 지겠다고 해서 끝까지 ‘희야’를 우겼습니다. 결국 ‘희야’는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부활은 록 그룹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든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끝까지 자기만의 색깔을 이어간다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인정받게 돼 있어요. 제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단 하나의 무기를 꼽으라면 ‘순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게 순수함이에요.”



평생 약속 ‘욕하지 않기’와 ‘담배꽁초 버리지 않기’
지난 20년 동안 그가 자신과 한 약속이 두 가지 더 있다. ‘욕 하지 않기’와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기’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있는 얘기임에도 김태원은 인생을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두 가지 약속에 대해 설명했다. 욕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은 건 중3 때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한 번도 욕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김태원은 “10분 이상 거울을 쳐다보고 자기 자신과 대화한 적이 있느냐”고 청중을 향해 묻더니 “나는 20년 동안 내 눈동자를 보고 이야기해왔다. 욕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나에게 얘기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며 웃었다.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기로 한 건 1988년 부활이 해체됐을 때부터다. 이승철이 솔로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때 상대적으로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던 김태원은 자신만의 일을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기였다. 그는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니냐”며 멋쩍은 듯 웃었다.
“이승철씨가 ‘가요 톱10’ 1위를 계속 차지할 때 저는 ‘나도 두 가지 하는 일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하루 종일 담배꽁초와 씨름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시나요?(웃음) 제가 외모가 이래서 옷과 신발과 안경은 좋은 걸로 사려고 합니다. 어느 날 프라다 재킷을 입고 있는데 한 후배가 옷이 멋지다면서 자기가 한번 입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러라고 옷을 벗어 줬는데 그 친구가 재킷 양 주머니에 손을 넣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주머니에서 담배꽁초가 한 움큼씩 잡혔거든요. 후배가 저를 거의 미친놈 보듯이 째려보면서 ‘형님, 이게 뭡니까’ 하고 물었지만 저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얘기해봤자 길어지고 결국은 구차해질 테니까요. 이승철씨와 ‘네버엔딩 스토리’로 다시 만났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이승철씨가 비싼 차를 타고 다녔는데, 가끔 그 차에 같이 탈 때가 있었어요. 늘 저는 조수석에 앉았는데, 하루는 차 안에서 담뱃불을 끄려고 하다가 불씨가 바람에 날려 뒷좌석 시트를 태우고 말았어요. 그러자 그동안 꾹 참고 있던 이승철씨가 ‘형 미쳤어? 담배꽁초 그냥 버려’ 하고 정색을 하더군요. 하지만 그때도 ‘승철아, 내가 사정이 있어’ 라고 하고는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승철씨는 아마 지금까지도 제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웃음).”
이해하기 힘든 얘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태원은 25년간 별을 보며 살았다고 했다. 천체망원경 마니아로 밥은 굶어도 별은 봐야 한다고 생각한 끝에 월세에서 전세로 옮기라며 아버지가 준 돈으로 몇천만원짜리 천체망원경을 샀다. 달을 보고 목성의 선을 보고, 토성의 띠를 보면서 그는 행복을 느꼈다.
“별은 굳이 똑바로 볼 필요가 없어요. 망원경의 특징은 반사경을 빼면 사물의 위아래가 바뀐다는 겁니다. 별은 위아래가 바뀌어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게 좋았어요. 제가 지구에서 상처받았을 때 저를 위로해준 것이 바로 우주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다 처분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틀었습니다. 지금 저는 현미경을 봅니다. 현미경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움은 우주에 버금갑니다.”
김태원을 수식하는 말 중에는 MBC ‘위대한 탄생’ 덕분에 붙여진 ‘국민멘토’가 있다. 덕분에 최근 들어 그에게 ‘멘토란 무엇인가’를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난처하다. 그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준 것일 뿐, 특별한 지식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멘토란 단어도 최근에 와서 알았다”고 말했다.

김태원의 정체를 밝히다


“얼마 전에는 한 목사님이 청년부 아이들이 말을 너무 안 들어서 고민이라고 하시더군요. 자아가 강해서인지 어른이 하는 말을 잘 안 듣는다는 거예요. 영적으로 대화하려고 해도 많이 흔들린다는 거죠.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가 갖고 있는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씨앗에 이미 모든 정보가 들어 있다고요.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는데, 그 나무가 5백 년이 됐다고 해서 씨앗보다 더 많은 걸 아는 건 아닙니다. 이미 씨앗에 모든 정보가 들어 있고 나무는 그저 자랄 뿐이에요. 누군가에게 나이나 지위를 이용해서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그 나이에 찾아오는 부작용을 안고 삽니다. 부작용이 일어나도록 감정을 건드려놓고 그 아이를 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그 아이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약간의 힌트만 주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요. 저 역시 공황장애와 대인기피증 때문에 학교에 잘 가지 않았습니다. 물론 권장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신 집에서 혼자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기타도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어요. 대신 남들은 한 달이면 마스터하는 걸 저는 4~5년에 걸쳐 연습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콤플렉스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시간이 결국 제 뿌리가 됐고,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에요.”

가장 아름다운 말 ‘우연에서 기적으로…’
부활이라는 이름처럼 김태원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더욱이 그에게는 강인하면서도 너그러운 아내가 있었다. 그가 대마초 중독으로 사경을 헤맬 때 당시 여자 친구였던 아내는 그를 말없이 품어줬다. 김태원은 그런 아내의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한다.
“마약이라는 게 하루 종일 사람을 몽롱하게 만듭니다. 거의 폐인에 가깝죠. 넋이 나간 모습으로 늘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내는 그럴 때마다 제 옆에 와서는 ‘태원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 하고 물어봤어요. 보통 여자라면 ‘저 인간 어떡하나’ 하고 바가지를 긁거나 아예 떠나겠죠. 하지만 아내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런 아내를 생각해서라도 넋을 찾을 수밖에 없었죠. 여자 친구한테 멋있게 보이려면 정말로 사색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니까요. 그 작은 움직임들이 저로 하여금 마약과 술을 끊게 했고,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한다. 죽어도 은혜를 갚지 못한다는 걸 잘 알기에 죽는 날까지 갚으며 살겠다고 다짐한다. 동갑인 두 사람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만났다. 당시 자살을 생각하고 있던 김태원은 아내를 보자마자 결혼을 결심했을 정도로 아내에게 푹 빠졌다고 한다. 현재 아내는 딸(15)·아들(11)과 함께 필리핀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얼마 전 김태원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들 이야기를 공개하는 등 그동안 가슴에 묻어둔 아픈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저의 심각한 작곡 히스테리로 인해 가족이 캐나다로 도망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2002년 저는 음악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때 아들이 아프다는 걸 알았습니다. 마음이 아픈 아이였습니다. 제 아내의 소원이 뭔 줄 아십니까. 아들보다 하루 더 사는 겁니다. 저는 지금도 아이와 대화하는 꿈을 꿉니다. 아들과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태원은 ‘우연에서 기적으로’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이 그래 왔기 때문이다. 기타를 치기 시작한 것도 작은 질투에 의한 우연이었고, 그가 쓴 주옥같은 가사들의 주인공인 아내를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그는 “우연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걸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연을 발견해야만 기적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늘 사색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저를 좋아해주시는 이유를 잘 압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겠습니까. 분명 독특함 때문일 겁니다. 저는 아는 게 많지 않아요. 방송을 보면 잘 아시겠지만, 정말 머리가 나쁩니다. 지난번 ‘남자의 자격’에서 아이큐 검사를 했는데 81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고 말 것들에 저는 감동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할수록’이란 노래도 아내가 해석해준 팝송 제목을 듣고 영감을 얻어 만든 노래입니다. 이처럼 무지함은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 대중이 제 모습을 알아갈 만할 때 저는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겁니다. A에서 B로 C로 D로…, 끊임없이 변신할 테니 기대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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