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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돌아온 초원의 사랑

40년 세월 넘은 원조 꽃미남 밴드 히식스

“나이 묻지 말고, 노래에 주목해주세요”

글·이혜민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김홍탁 제공

2011. 09. 16

‘히식스’가 40년 만에 다시 모였다. 대표 보컬이었던 최헌이 암에 걸리자 친구의 쾌유를 빌며 다시 악기를 잡은 것. 뛰어난 연주 실력과 완벽한 하모니로 60, 70년대를 풍미한 히식스의 연습 현장을 공개한다.

40년 세월 넘은 원조 꽃미남 밴드 히식스


‘세시봉’ 열풍에 힘입어 추억의 명곡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맞춰 1960, 70년대 한국 록의 태동을 이끌며 많은 사랑을 받은 꽃미남 그룹 히식스(HE6)가 다시 뭉쳤다. 8월13일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한창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초로의 아티스트들을 만났다.
6층 스튜디오 연습실, 오후 1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 히식스의 정규 멤버인 김홍탁과 정희택(기타), 조용남(베이스), 유상윤과 안정현(키보드), 배수연(드럼), 객원 멤버로 그룹 ‘바보스’에서 활동한 김선(퍼커션·드럼)이 하나둘 자리에 모였다. 제각각 햄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악기를 매만지며 ‘준비운동’을 하다 정각 1시에 리더 김홍탁이 말문을 열자 연습이 시작됐다. 이들이 풍기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들이 곁에 두고 있는 악기 때문일까. 중년의 남자들이 청년처럼 느껴졌다. 히식스가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화음을 넣자 어느새 연습실은 화려한 콘서트장으로 변했다.

3개월 전 히식스 재결성, 일주일에 세 번씩 연습

히식스를 재결성한 뒤 KBS ‘콘서트 7080’에 출연한 소감은 어떤가요.

40년 세월 넘은 원조 꽃미남 밴드 히식스




김홍탁 그전에도 멤버 몇 명이 무대에 섰지만, 이렇게 ‘히식스’란 이름으로 멤버 전체가 함께 무대에 선 건 40년 만이에요. 오랜만이라 긴장됐지만 재미있었어요.
조용남 오랫동안 활동을 안 해서 그런지 관객들이 저희를 모르시더라고요. 그래도 히트곡 ‘초원의 사랑’‘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를’을 부르니까 앙코르가 나와서 기분이 좋았죠.
히식스 멤버들과의 호흡은 예전과 비교해 어떤가요.
유상윤 목소리는 나이 들수록 좋아지니까 노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오랫동안 화음을 안 맞춰봐서 하모니는 자연스럽지 않더군요.
정희택 옛날에는 우리가 선두주자였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하지만 각자가 재능을 가지고 있으니까 노력해 묵은 먼지를 털어내면 곧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을 거예요.
연습은 어떻게 하고 계세요.
김홍탁 일주일에 세 번 만나 서너 시간씩 연습하는데, 다들 칼같이 시간을 지켜요.
김선 (경로우대를 받아) 전철이 공짜니까 오고가는 것도 편하죠(웃음).
정희택 멤버들이 서로 잘났다고 하면 협조가 안 될 수도 있지만 홍탁이 형님이 카리스마 있게 말씀하시니까 오늘도 모두 검정 의상을 준비해 오고 시간도 딱 맞춰서 나왔어요.
히식스가 재결성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김홍탁 히식스의 대표 보컬인 최헌이 암에 걸려 아픈데, 무엇보다 그 친구가 쾌유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물론 멤버들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서로 말은 안 했어도 ‘뭘 하면 재미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그러다 제가 폐기흉 수술을 받고 생과 사를 오갈 때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도 밴드 소집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유독 우리나라만 다양한 음악이 공존하지 않다가 세시봉 열풍이 불면서 아날로그 음악을 다시 찾는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덕분에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어요.

멤버들과 의기투합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배수연 다시 형님들을 모시고 밴드를 할 수 있으니 영광일 따름이죠.
김선 예전부터 록그룹 활동은 다시 하고 싶었어요. 히식스가 다시 뭉친 덕에 저는 객원으로 참여했는데 연습 날만 되면 괜히 설레요.

정희택 제 딸 가수 제이(J)가 경기도 일산에 햄버거 가게를 열었거든요. 한창 데이트할 나이에 일에 매달려 있으니까 도와주려고 한국에 나왔지만 사실 한국에 온 첫 번째 이유는 히식스 재결성 때문이에요. 미국에서도 교회에서 밴드 활동을 했지만 예전 멤버들과 함께한 밴드 생활이 그리웠거든요. 미국에 살 때 홍탁이 형님이나 써니(김선) 형님과 늘 함께 했는데, 두 형님이 하시는 일에 저만 빠질 순 없죠(웃음).

팬클럽 회원들과 버스 대절해 야유회 가기도
히식스는 우리나라 최초의 록밴드인 키보이스에서 활동한 김홍탁이 결성한 밴드다. 키보이스로 유명세를 얻긴 했지만 하드록을 하고 싶어 그룹을 새로 만든 것이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찾던 그는 ‘당신은 몰라’를 작곡하며 대학생인 최헌을 히식스 보컬로 발탁했다.
당시 히식스는 록밴드 시대의 선두주자로 최초의 라이브클럽인 ‘오비스캐빈’에서 섭외 1순위에 드는 한편, 플레이보이컵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연이어 두 번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경연대회 첫 회 때 인지도가 떨어져 준우승을 했다고 생각한 멤버 조용남은 홧김에 술을 먹다 귀가 찢어졌을 정도로 밴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당시 활동은 어떻게 하셨나요.
김홍탁 극장쇼가 유행해서 지방을 오가고 방송 활동도 했어요. 당시 동양방송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쇼쇼쇼’에 고정 출연했는데, 곽규석씨가 사회를 보고 저희가 개그 콩트를 했죠.
유상윤 ‘쇼쇼쇼’ 오프닝과 피날레 때 춤까지 췄어요. 아마 우리가 TV에서 춤춘 최초의 록밴드일 거예요. 여성 피부연고제 광고도 찍었고요.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고 그 연고 이름을 말하면 여자들이 환호를 지르는 것이 광고 콘셉트였죠. 그날 받은 출연료로 포커를 쳐서 최헌이 다 따는 바람에 우리는 출연료를 한 푼도 못 건졌어요(웃음).
멤버 영입은 어떻게 하셨나요.
조용남 공연을 보고 우리 음악 스타일과 맞겠다 싶은 친구에게 제안하는 거죠. 신기한 건 상대 역시 우리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정희택 1971년 대연각호텔에 화재가 나 그곳에 본거지를 둔 정운택악단이 해체되는 바람에 히식스에 들어왔어요. 제가 미국에 들어갈 때는 기존 밴드에서 같이 활동한 배수연을 히식스에 심어놓고 갔죠. 엄청 연습하는 친구니까 팀원들도 좋아하더라고요. 배수연이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드럼을 잘 친다고 해도 후배인지라 제 앞에서는 ‘깨갱’ 해요(웃음).
히식스의 인기가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유상윤 팬클럽이 있었는데 오비스캐빈에 팬클럽 사무실도 있고 회장도 있었어요. 한번은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 야유회를 다녀왔죠. 버스 한 대마다 히식스 멤버가 한 명씩 타고 놀러 갔는데, 팬들이 우리가 맨 스카프를 뺏느라 치열하게 매달렸어요. 아마 그 팬들이 우리나라 오빠 부대의 시초일 거예요.
김홍탁 TV나 라디오조차 흔치 않던 때라 당시 팬들은 배지를 만들어 옷에 달곤 공연장으로 찾아왔어요. 한번은 진명여고에 갔는데 책상에 히식스 멤버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예요. 유상윤은 꽃미남으로, 드러머 권용남은 찰스 브론슨과 비슷하다고 인기가 많았어요.
조용남 난 이미 결혼한 몸이라 그랬는지 내 팬들은 나이가 좀 많은 편이었어요. 수적으로도 적었고요. 서운할 수도 있었지만 여자를 돌같이 보기 때문에 괜찮았어요(웃음).

팬레터도 많이 받으셨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팬이 있나요.
김홍탁 어떤 여대생이 끔찍할 정도로 집에 자주 왔어요. 그 친구를 피해서 집에 들어가려고 담 넘어 다니느라 고생 좀 했죠. 하지만 좋은 팬도 있었어요. 예전에는 음악 자료가 많지 않아서 해적판 음반을 들으며 공부해야 했는데 어떤 팬들은 외국에서 나온 앨범 원판을 공수해서 가져다줬어요. 제겐 다이아몬드 반지만큼이나 귀한 선물이었죠.
김선 그렇다고 남자 팬들이 없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올 9월에 히식스 공연을 할 예정인데 공연을 마련하신 남자 분이 히식스의 열성 팬이었다고 하더라고요.

40년 세월 넘은 원조 꽃미남 밴드 히식스


40년 세월 넘은 원조 꽃미남 밴드 히식스


팬들이 히식스를 사랑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김홍탁 저희의 음악성을 알아준 것 같아요. 즉흥 연주한 경음악 음반이 리메이크되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명반이라고 평가하더라고요. 당시엔 한 소절이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녹음을 해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만들었나 싶어요. 돈 잘 벌 때는 워커힐호텔 빌라, 돈 못 벌 때는 여관에서 합숙하며 연습하고 녹음했죠.
유상윤 국내 유명 밴드들은 대부분 그룹 중 한 명이 싱어고 나머지 멤버들은 연주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밴드 구성원 모두가 연주를 하면서 노래도 불러요. 미8군에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까 한 사람보다 여러 사람이 노래 부르는 게 체력적으로 더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어요.
김홍탁 우리 시대에는 비틀스가 세계의 대중음악 판도를 바꿔놨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물론 멤버들 모두가 노래를 부른다는 게 쉽진 않아요. 보이스 컬러가 다르니까 하모니를 내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거든요. 하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듯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한다는 게 힘들어도 잘 어우러지면 매력이 배가되는 것 같아요.

사생활 아닌 음악성에 관심 기울였으면
히식스는 70년대 초반 그룹사운드 음악이 사회적으로 퇴폐 문화로 내몰리면서 해체됐다. 그룹은 시기별로 멤버가 교체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리. ‘히식스’만 해도 김홍탁과 조용남이 원년 멤버고 정희택이 2기, 배수연이 3기인데 시간이 갈수록 히식스에 대한 인기는 시들해져 갔다. 급기야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밤무대 등을 전전하던 멤버들은 하나둘 미국으로 건너갔고 원년 멤버인 이영덕, 권용남은 지금껏 미국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음악을 잊고 산 건 아니다. 귀국한 김홍탁은 조용남과 함께 1995년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열어 각각 원장과 이사로, 유상윤은 명지전문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음악 하는 후배들을 양성했고, 가수 정훈희의 오빠인 정희택은 딸 제이(J)를 가수로 길러냈다. 김선 역시 이 일 저 일 다 하면서도 밤에는 꼭 클럽 무대에 서서 음악만큼은 끼고 살았고 배수연은 우리나라 드럼계 일인자로 우뚝 섰다.
히식스를 그만둔 뒤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조용남 민물장어집도 하고 핸드백 가게도 했는데 난 장사가 그렇게 어려운 건지 몰랐어요. 장사할 때는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손가락을 자르려고 했죠. 그런데 안 잘랐더니 장사가 안 될 때마다 다시 음악을 하고 싶더라고요. 일에 전력투구를 못한 거죠.
김홍탁 미국에 가서 장사를 했어요. 가발 가게, 꽃 가게, 보석 가게, 벼룩시장에도 나가고 안 해본 게 없어요. 신기한 건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샌프란시스코로 모였다는 거예요. 탤런트나 트로트 가수들은 LA에 가던데,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정희택 미국에 가서 제이 엄마가 커피숍도 하고 레스토랑도 했는데, 저는 문만 따주고 낮에는 홍탁이 형님 하고 써니 형님이랑 놀고 저녁에는 꼭 기타를 쳤어요. 그래도 밴드를 못하니까 회의가 들더라고요. 멤버들이 간간이 ‘열린음악회’나 ‘콘서트 7080’에 출연하는 걸 보면서 마냥 부러워 했죠.

오랫동안 무대를 그리워한 만큼 각오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어떤 계획을 갖고 계세요.
김선 다양한 음악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국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줘야 해요. K팝이 좋아서 한국에 온 외국인들도 막상 한국에 오면 노래를 들을 곳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서는 라이브클럽에서 노래를 하면 연주만 하는 라이브클럽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데 그것부터 바뀌면 좋겠어요.
김홍탁 전국 투어를 하고 싶어요. 가능하면 우리 앨범도 새로 만들고 싶고, 우리가 살았던 미국에서 순회 공연도 꼭 해보고 싶어요. 저희가 이렇게 활동하는 것이 후배들에게도 좋다고 생각해요. K팝이 대세라고 하지만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잘 뛰려면 마이너리그부터 탄탄하게 다져져야 하거든요.
인터뷰 내내 “나이와 여자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며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면 노코멘트로 일관한 히식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경이 아닌 실력에 눈길을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리드 기타, 키보드, 베이스 모두 2명씩 구성돼 이전보다 더 강렬한 사운드를 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히식스는 오는 9월부터 시작될 순회 공연 준비에 한창이다. 연습실에서 40년 전 그 곡을 연주하고 있는 히식스의 심장은 예전 그때처럼 세차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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