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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암 극복한 ‘국민 고모’ 오영실

“인생의 한 고비 넘으며 깨달은 것들…”

글·김유림 기자 사진·조세일

2011. 08. 17

만나면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 있다. 유쾌한 바이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허물도 진솔하게 내보일 줄 아는 오영실이 그렇다. 그는 지난해 갑상선암 수술을 받아 주위의 걱정을 사기도 했지만 1년의 휴식을 통해 예전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며 ‘여유’라는 큰 선물도 얻었다고 한다.

갑상선암 극복한 ‘국민 고모’ 오영실


약속 시간 10여 분 전에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지만 주인공인 오영실(46)은 이미 화사하게 단장을 마친 채 그곳에 와 있었다. 싱그러운 녹음을 배경으로 원목 탁자에 앉아 다이어리에 메모를 하고 있는 그는 한눈에도 건강해 보였다. 지난해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많은 이들의 걱정을 샀지만 지금껏 별 후유증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그는 미국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가 미국행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유학 중인 큰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12학년, 우리나라로 치면 고3인 아들에게 엄마로서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큰아들 혁수군은 2002년부터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당시 외과 전문의인 남편이 버지니아대 교환교수로 가게 되면서 가족 모두 유학길에 올랐고, 4년 뒤 한국으로 돌아올 때 혁수군만 혼자 남아 유학 생활을 계속했다. 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어느덧 대입을 앞두자 오영실은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2008년 드라마 ‘아내의 유혹’을 통해 연기자로 변신하면서 ‘국민 고모’로 등극한 오영실은 이후 주말드라마 ‘민들레 가족’에 캐스팅되는 등 주가를 올리고 있었기에 방송 활동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갈등을 좀 했어요. 연기도 불러주는 사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일보다 아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마침 그즈음에 꿈을 꿨는데, 큰아이가 작은 꼬마로 변해 있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손과 다리를 잡아 늘였더니 아무렇지 않게 쑥 늘어나는 거예요. 잠에서 깨고 나니 아이가 제 손길을 간절히 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일을 계기로 다른 건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아이한테 가기로 결심했어요.”

아들에게 따뜻한 밥 지어주며 행복 느껴

갑상선암 극복한 ‘국민 고모’ 오영실


그가 머문 곳은 미국 버지니아주 해리슨버그. 도심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어서 주말에는 그가 직접 운전해 아이를 시내에 있는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기를 반복했다. 몇 군데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고서는 버몬트에서 플로리다까지 일주일 동안 아이와 함께 캠퍼스 투어도 떠났다. 최종 선택한 학교는 리버럴 아트 칼리지로 아이는 앞으로 컴퓨터 관련 학과를 전공할 계획이다.
“아이와 함께 학교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직접 방문해보길 잘한 것 같아요. 막상 경험하니까 아이 혼자 결정하기에 힘든 부분이 많더라고요. 큰일을 치르고 나니 아이한테 고마운 마음이 먼저 들었어요. 그동안 아이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속상했던 날이 많았는데, 그래도 끝까지 잘 참고 대학까지 간 아들이 대견하더라고요. 아이와 단둘이 지내면서 자식으로 인해 속상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들이 더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얼마 전 한 아침방송을 통해 그가 미국에서 생활하는 집이 공개된 적이 있는데, 집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대저택으로 소개되는 바람에 네티즌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도 받았다. 요양을 핑계 삼아 사치한다는 질책이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가 머문 곳은 월세 1천 달러짜리 집으로 엘리베이터는 노인이 주로 사는 마을인 만큼 휠체어 전용으로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외식도 거의 안 하고 알뜰하게 지냈는데, 갑작스러운 공격에 어안이 벙벙했다”고 말했다.
“저희 부부는 돈 관리를 각자 해요. 지금껏 제 생활비는 제가 벌어 썼는데 갑자기 수입이 없어지니까 손이 떨려서 돈을 잘 못 쓰겠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때는 외모 가꾸는 것도 투자라는 생각에 네일아트도 부담 없이 받곤 했는데, 미국에서는 제가 직접 집에서 손톱 손질을 했어요. 그러고는 ‘몇 만원 벌었네’ 하고 뿌듯해했죠(웃음). 대형 마트에서 나눠주는 쿠폰도 열심히 모으고, 이사 나오는 날에는 처음 냈던 보증금을 다 돌려받으려고 청소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몰라요. 미국은 집을 빌릴 때 못 하나 박은 것까지 다 계산해서 집이 망가진 값만큼 제하고 돌려주거든요. 처음 살러왔을 때보다 훨씬 깨끗하게 청소를 했더니 군소리 없이 다 돌려주더라고요(웃음).”
식사도 거의 집에서 해결했다. 돈을 떠나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줄 수 있다는 게 행복했다고 한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데다 아이 또한 맛있게 잘 먹어줘 날마다 식사 준비하는 시간이 즐거웠다는 그는 “김치칼국수, 스파게티, 월남쌈 등 특식도 자주 해줬더니 아이 눈이 휘둥그레지더라”며 웃었다.



갑상선암 극복한 ‘국민 고모’ 오영실

혁수군 고등학교 졸업식 날. 오영실은 지금까지 잘 참고 따라와준 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고 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앞만 보며 바쁘게 달려온 오영실은 일을 접고 오랜만에 누려보는 여유에 건강도 절로 좋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상선암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완치율이 높고 치료가 간단하지만, 그는 되도록 지인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혼자 쉬는 시간을 택했다.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건 2년 전이지만 연기 활동에 집중하느라 수술 시기를 1년 정도 미뤘다. 암이라는 통보는 서울 삼성의료원 유방암센터장인 남편에게 직접 받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야외 촬영을 하고 땀으로 범벅이 돼 집에 들어왔는데, 남편이 절보고 ‘로또 암’에 걸렸다고 하더라고요. 갑상선암은 아주 흔하고 완치도 잘되는 병인 반면, 보험회사로부터 암 진단금을 받을 수 있어 그렇게 부른대요(웃음). 그래도 처음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죠. 그날 남편이 어디 근사한 곳에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를 해줬으면 참 좋았겠지만, 너무 덤덤하게 얘기해서 그게 좀 속상하긴 했어요.”
그는 이미 20대 초반 갑상선에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부터 5년 동안 약을 복용했는데, 그래서인지 갑자기 피곤이 밀려올 때가 많다고 한다. 평소에는 에너지 넘치게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졸음이 오면 만사 제쳐놓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곤 했다. 그는 “연애할 때 남편과 이태원 나이트클럽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도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소파에서 잠깐 졸았더니 남편 혼자 스테이지에 나가 여자들 무리에 휩쓸려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더라”며 웃었다.

유언장 쓰면서 가족의 소중함 다시 한 번 느껴
처음에는 갑상선암이 가벼운 병이라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수술 날이 가까워올수록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그는 유언장을 기록했다. 노트 한 권에 남편과 아이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에게 남기는 편지를 쓴 것.
“남들은 비웃을지 모르지만 저는 진지했어요. 한 번이라도 유언장을 써본 사람이라면 제 심정을 아실 거예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유언장이 있는 위치를 알려주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남편이 알게끔 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수술이 잘됐으니 아무도 유언장을 열어 보진 않았죠. 남편에게는 금전적인 상황을 제대로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자산이 얼마나 있고 빚은 또 얼마인지, 그리고 그동안 미처 말로는 하지 못했던 얘기들을 적었고, 아이들에게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는 얘기를 했어요. 유언장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게, 누구든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르잖아요. 미리미리 준비를 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영정 사진도 이왕이면 본인 마음에 드는 걸로 쓰면 좋잖아요(웃음).”
수술을 계기로 그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특히 아이들 교육 문제로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 대로 아이가 올바른 사고방식을 지닐 수 있도록 잘 이끌어주는 게 부모 노릇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부로 세상을 일으키는 아이가 있다면, 고운 마음씨로 세상의 빛이 되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둘째 아들 종수(17)는 전남 벌곡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닌다. 아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학교 생활을 즐거워하고 예전에는 쉽게 찾지 못했던 공부 의욕도 점차 갖게 됐다고 한다. 아이가 2주에 한 번 집에 오는데 그때마다 학교 얘기, 친구 얘기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처음에는 남편의 반대가 심했어요. 제도권 밖의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죠. 아이 역시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에 대해 무척 두려워하면서 싫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직접 벌곡에 내려가 학교를 둘러보고는 마음을 굳혔어요. 마침 그날 아이들이 학예회를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이 밝고 발표 내용도 정말 창의적이더라고요. 그날 이후 두 사람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요. 지금은 남편과 아이 모두 저한테 고마워하죠. 덕분에 요즘 집안에서 발언권이 세졌어요(웃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다른 집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비교하며 괴로워한 날이 많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쥐고 있는 행복은 거들떠보지 않고, 남의 손에 들려 있는 행복만 보려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학교를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면 어떡하나, 취직을 못하면 어떡하나. 너무 많은 걱정을 앞서 한 탓도 크다. 그는 얼마 전 에스키모 이누이족의 노래를 듣고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갑상선암 극복한 ‘국민 고모’ 오영실


“봄에는 여름 걱정을 하고, 여름에는 가을 걱정, 가을에는 겨울 걱정을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듣고 지나쳤을 노래인데, 저는 가슴에 와 닿더라고요. 젊은 시절 항상 걱정을 달고 살았던 것 같아요. 아이가 어릴 때는 왜 아직도 걷지 못할까, 왜 말을 하지 않을까, 왜 글을 읽지 못할까…. 늘 앞서서 걱정을 한 거죠. 그렇게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도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제 와 후회해봤자 소용없지만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에 대한 걱정은 그만 거둬들이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밝게 살기로 했어요. 그래서 둘째한테도 ‘종수야, 공부가 싫으면 기술을 배우면 돼. 빵 굽는 기술 배워서 엄마랑 예쁜 카페 차릴까?’ 하고 바람을 넣어요. 그런데 아이가 오히려 반드시 영국에 있는 대학에 가서 자동차 디자인을 할 거라며 거절하데요(웃음).”
둘째는 애교가 많고 성격도 밝은 편이다. 2주에 한 번 집에 오면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골목길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고. 벌곡에서 생활하면서 외모도 한결 훈훈해(?)졌다. 중국에서 40일 동안 극기 훈련을 받고 몸무게가 15kg이나 빠진 덕분이다. 요즘은 ‘식스팩’을 만들겠다며 운동에 한창이다. 방송반 활동을 시작해 카메라에도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오영실은 “아이 적성에 딱 맞는 학교인 것 같다. 심지어 학교에서 나오는 급식도 엄마가 한 것보다 맛있다고 한다”며 웃었다.
오영실은 1년 동안 미국에서 지내면서 남편과의 관계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됐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한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이제는 남편의 성격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남편에게 기대기보다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단다. 그는 “안 되는 걸 억지로 강요한 내 탓도 큰 것 같다. 내가 더 사랑했다고 해서 섭섭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내가 상대에게 베푼 만큼 돌려받으려고 했던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신혼 때 남편과 외국으로 여행을 갔는데, 오지랖 넓은 제 성격에 시댁 식구들 선물을 사느라 며칠을 보냈어요. 그러고는 마지막 날 결국 ‘내 선물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엉엉 울었죠. 그렇다고 남편이 제 것을 따로 챙겼을 리 없으니 그것 가지고 또 트집을 잡았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당신한테 다른 사람 선물 사라고 강요한 적 한 번도 없다. 당신이 필요한 걸 사면 된다’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남편 말이 옳아요. 내가 먼저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모르고 살았던 것 같아요.”

부모 없는 아이들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어
그가 아이들이나 남편을 한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데는 종교의 힘이 크다. 지난 1년을 기도 속에서 보냈다는 그는 쉬는 동안 지난 인생을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속물적인 유혹에 흔들리는 자신을 반성하며 이제는 좀 더 의미 있는 유혹에 넘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예전에는 ‘어떤 걸 가질까, 어떻게 놀까, 어떻게 아이를 학교에 보낼까’ 하는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고민을 주로 했다면 앞으로는 좀 더 큰 걸 바라보며 살고 싶어요. 1년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면서 그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렸고,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겠더라고요. 뜬금없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제는 남을 위한 삶도 살고 싶어요. 봉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저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가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 언젠가는 안락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어요. 아직 남편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내년에는 대학원에도 진학해 본격적으로 사회복지학을 배워볼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방송 활동을 게을리할 생각은 없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오영실과 함께하는 트로트보다 쉬운 재즈’ 공연에서 해설을 맡았던 그는 8월 중순부터 연말까지 지방을 돌며 다시 무대에 설 예정이다.
연기에 대한 열정도 변함이 없다. 처음에는 연기하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던 남편도 이제는 그를 연기자로 인정하며 더 열심히 하라며 응원해준다고 한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서 정신지체장애를 지닌 인물로 나왔는데, 처음에는 남편이 배역이 마음에 안 든다며 싫어했어요. 그런데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니까, 방송 시작하고 석 달 정도 지났을 때는 늦은 밤 술 한잔 마시고 들어와서는 ‘여보, 사람들이 나보고 국민 고모부래’ 하면서 아이처럼 좋아하더라고요(웃음). 뮤지컬에 출연할 때는 땅바닥에 신문지 펴놓고 도시락 먹는 게 마음에 걸렸던지 종종 연습실로 먹을 걸 사들고 오기도 했어요.”
아나운서에서 연기자로 변신에 성공한 그는 늦게 시작한 만큼 오랫동안 연기자로 활동하고 싶은 바람이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는 이순재·김영옥을 롤 모델로 삼는 그는 “젊어서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자들이 부러웠는데, 이제는 나이 들어서도 즐기면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솔직하고 털털한 모습으로 안방극장을 푸근하게 달궈주는 연기자 오영실. ‘국민 고모’를 넘어 ‘국민 어머니’가 되는 그 순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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