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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행복한 동성애자

홍보회사 오피스h 대표 황의건 남다른 게이 라이프 스토리

글·정혜연 기자 사진·지호영 기자

2010. 11. 16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의 핸디캡을 핸디캡으로 여기지 않고 오로지 열정에 따라 전진했다는 점이다. 홍보회사 오피스h의 대표 황의건도 게이라는 성 정체성을 당당히 오픈, 편견에 아랑곳 않고 열심히 일한 결과 업계에서 인정받는 이가 됐다. 인생의 정점에 선 그는 “이제 게이와 일반인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홍보회사 오피스h 대표 황의건 남다른 게이 라이프 스토리


유쾌하다. 그의 첫인상은 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지난 10월 중순 홍보회사 오피스h의 대표 황의건(42)을 서울 신사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로 안내하는 그의 얼굴에서 자연스러운 웃음이 배어 나왔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데 그는 이를 늘 상기하며 살아온 듯했다. 이사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라 사무실에는 집기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하 골방 생활을 청산하고 지상으로 올라가려고요(웃음). 농담이고, 사무실 계약기간이 끝나는 시점에서 저희 주력 홍보 대상도 조금 달라져 도곡동으로 옮기게 됐어요. 양재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라 해가 좋은 날에는 직원들과 도시락 싸들고 나가서 먹어도 좋을 것 같아요. 벌써부터 다들 들떠 있어요.”
광고기획자, 케이블방송 프로그램 기획·진행자, 트렌드 분석가, 칼럼니스트…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를 말할 때 ‘게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6년 전 한 케이블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이후 각종 패션잡지에서 그의 커밍아웃을 조명했다. 요즘은 한결 나아졌지만 당시는 커밍아웃을 한 이에게 불편한 시선이 뒤따르던 때였다. 그는 왜 굳이 커밍아웃을 한 걸까.
“업계에 공공연히 루머가 돌았죠. 주된 활동 노선이 이태원 게이 스테이지였으니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거든요. 명쾌하지 않은 걸 불편하게 여기는 성격이라 기회가 왔을 때 자연스레 오픈했어요. 그래도 전 세련되게 한 편이에요.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방법대로, 필드에서 최고로 꼽히는 매체들을 통해 알렸으니까요. 지금 뒤돌아봐도 상당히 만족스러워요.”

나를 잃지 않고 ‘건강한 게이’ 된 건 최고의 행운
생물학적 성은 태어날 때 결정되지만 성 정체성은 사람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자리 잡히기 마련이다. 황의건은 유아기 때 어렴풋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네댓 살 무렵 장난감 자동차보다 마론 인형을 더 좋아했어요. 아주 어릴 때지만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이후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보통의 남자 아이들과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느꼈죠. 열여섯 살 때쯤 저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였고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3년 동안 고민했어요.”
그는 게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고 말했다. 소위 남자다운 남자의 전형이라고 말하는 마초를 10, 유약하고 혼자 있기 좋아하는 초식남을 0이라고 본다면 남자들도 자신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모를 것이라고. 그 속에서 자신이 게이임을 스스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일 또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황의건은 장기간의 고민 끝에 자신이 게이임을 받아들였고, 스무 살 때 “그렇다면 당당하게 게이다운 게이로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떨어지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시력이 안 좋아서 판정이 아슬아슬했어요. 군의관이 가고 싶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고 결국 입대를 했죠. 군에서는 저더러 입대한 이들 중 최연소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군대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해서 들어갔는데 적응을 꽤 잘했어요. 일반 친구들은 물론 게이 친구들을 거기서 많이 사귀었거든요. 저와 7년 넘게 사귀었던 애인도 군에서 만난 게이 형이 소개해줬죠.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많아요.”
군복무를 마친 그는 호주 맥쿼리대에 입학했다. 퇴직을 앞둔 부모가 이민을 염두에 두고 그를 멜번에 보내려했지만 그는 시드니로 향했다. 시드니에는 게이들이 커뮤니티를 이뤄 사는 게이 타운이 있었기 때문. 그는 그곳에서 대학시절을 보내며 심리적인 안정을 얻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황의건은 자신이 ‘건강한 게이’가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통의 게이들이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에 치여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데 반해 그는 게이로서의 올바른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고. 무지개 깃발이 왜 게이의 상징인지, 주디 갈랜드가 왜 게이들의 아이콘인지 등 게이들만의 문화를 배우며 폭넓은 이해력을 갖출 수 있게 됐다.
“게이들이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해서는 게이 문화에 대한 지식을 쌓고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해요.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위도식하는 게이들은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전 많은 게이 후배들이 건강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케이블 방송 PD를 거쳐 패션업체,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 남들보다 창의적인 생각과 게이만의 특출난 감각을 갖고 있던 그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업계에서 빠르게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 99년에는 경매사이트 와와컴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으며 016 NA 네이밍과 크리에이티브 콘셉팅에도 참여했다. 다양한 경험을 살려 2001년에는 홍보회사 오피스h를 열었고 이후 각종 패션·생활 브랜드업계 홍보를 도맡아 진행하며 성공 궤도에 올랐다.

게이만 아는 게이의 세계
미국 시트콤의 영향인지 20·30대 여성들 사이에선 감각적인 게이 친구를 갖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 됐다. 쇼핑을 할 때도 어떤 아이템이 섹시하게 보이는지 여자들보다 더 잘 알고, 남자들의 본능적 습성에 대해 몇 시간씩 수다를 떨 줄 아는 게이란 여자들에게 천군만마와 같다. 하지만 황의건은 “게이가 모두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말했다.
“게이라고 모두 수다스러운 것도 아니고, 모두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무뚝뚝한 게이, 보수적인 게이, 패션을 싫어하는 게이도 있죠. 더러는 마초적인 게이도 있어요. 물론 여성성을 편안하게 가지고 가는 게이들이 많기는 한데,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가 하나로 고정돼 있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죠.”
일부 남자들이 게이를 대하는 데 있어 자신이 타깃이 될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게이라고 남자들에게 무조건 접근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는 “게이들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게이를 좋아하는 것”이라며 잘못된 선입견을 바로 잡았다. 게이들은 게이를 알아보는 ‘게이다(게이와 레이더의 합성어로 게이들 사이에서는 게이들만의 촉이란 의미로 확장돼 사용된다)’가 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만남이 자연스레 이뤄진다고 한다.
“‘게이다’는 후천적으로 발달한 안테나로 생각하시면 돼요. 상대를 볼 때 항상 ‘게이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살다보니 그런 쪽 감각이 자연스레 생긴 거죠. 확률이요? 제 경우 90% 이상이에요. 본인이 스스로 게이인지 헷갈려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다 맞아요(웃음).”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는 그의 시선도 궁금했다. 극중 게이 커플이 선보이는 연애 과정, 가족과의 갈등 등은 현실 세계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일까.
“사귀게 된 계기를 제외하곤 거의 일치해요. 드라마를 보면 두 사람이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명함을 건넸고, 이후 자연스럽게 사귀게 됐다고 나와요. 그런데 사실 한국에서 그런 경로로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에요. 상대방이 게이라는 확신이 들어도 먼저 오픈했다가 아닌 경우 사회적으로 잃을 게 많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대시하지 않아요. 때문에 대부분은 게이 플레이스에서 만나 사귀죠. 그런 부분은 김수현 작가님이 게이 세계를 모르셨을 테니까 이해해요. 그 외 연애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이나 가족과의 갈등 등은 놀랍게도 매우 비슷해요.”
그는 게이들이 갖춘 감각적인 시각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게이들은 매력적인 남성을 알아보는 능력도 뛰어나다고. 그들만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거론된 남자 아이돌 스타는 반드시 3개월 안에 인기를 얻게 된다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홍보회사 오피스h 대표 황의건 남다른 게이 라이프 스토리


“아이돌 그룹 ‘비스트’가 나왔을 때 게이들은 이기광의 매력을 알아봤어요. 그때만 해도 ‘듣보잡’이었는데 얼마 후 시트콤에서 인기를 얻더니 각종 예능프로그램 MC는 물론 CF까지 섭렵했죠. 2PM이 처음 나왔을 때도 여자들은 닉쿤을 사랑했지만 게이들은 우영을 더 매력적으로 봤고, 결국 우영도 예능프로그램 MC를 맡았죠. 확실히 다르죠? 여자가 좋아하는 여자는 화장품 광고를 하고, 게이가 좋아하는 남자는 속옷광고를 한다는 법칙이 있기도 해요(웃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업계에는 “트렌드는 게이로부터 시작돼 여자, 대중의 순서로 나타난다”는 말이 존재한다. 실제로 트렌드세터, 얼리어답터 소비자군에 게이가 많다. 황의건은 자신이 그 속설의 증명이라고 말했다. 연초만 되면 자신에게 트렌드 분석을 요구하는 업체가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게이들은 일반인보다 순발력과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는 분석도 있다. 그는 “무딘 이들은 무디지만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을 경우 게이들은 평생 게이가 아닌 척하고 살아야하니까요.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끊임없이 거짓을 이야기해야 하니까 상황 대처 능력이란 게 자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죠. 그런데 참… 그것도 못할 일이죠. 특히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게이들은 대단해요. 집안에 여자 둘이서 사는 건데 어떻게 잘 살까 싶어요.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비난할 순 없어요. 그런 ‘유부게이’의 경우 잃을 게 많아 그냥 그 상태로 사는 경우가 많은데 ‘나쁜 게이’가 아니라 ‘불쌍한 게이’라고 봐야죠.”

여자·남자 사이 비트윈, 이제는 일반인·게이 사이 비트윈으로 살고파
황의건은 게이로 한평생을 살았다. 성공한 게이 사업가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잃은 것도 많았고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현 시점에서 뒤돌아볼 때 그는 ‘나를 잃지 않은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한 가지씩은 부족해요. 자신이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건 일반인이나 게이나 마찬가지거든요.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팅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유일한 약점이었죠. 피겨 강국인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선 김연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두려움을 눈앞에 둔 채 모든 걸 감내해야 했을 거예요. 게이들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많은 편견과 선입견에 맞닥뜨리는 순간을 늘 안고 살아가요. 개중에는 세상에 맞춰 사는 걸 선택한 이도 있지만 전 한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덕분에 제 정체성을 찾았고, 또 적어도 제 자신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게 됐죠.”
여자와 남자 사이에서 게이로 살아온 그는 “앞으로 일반인과 게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일환으로 황의건은 최근 책 ‘비트윈(웅진윙스)’을 발간했다. 일반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게이의 삶이 비교적 자세하게 수면 위로 드러난 책이다. 그는 “책을 읽은 사람들이 단순히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게이를 바라보는 것에서 벗어나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책 곳곳에서 그의 진심이 묻어났다.

게이만 커밍아웃을 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남들과 다른 나’, ‘남들과 비슷한 나’라는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선 위에서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가기 위해 저마다의 커밍아웃에 직면하게 된다. - ‘비트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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