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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빛나는 조연 ②

악역 전문 꼬리표 뗀 손병호, 날마다 즐거운 인생

글 정혜연 기자 사진 조영철 기자, 손병호 제공 || ■ 장소협찬 르 쁘띠 끄루(02-722-0650)

2010. 06. 16

이름보다 얼굴이 더 알려진 배우 손병호. 스무 살때부터 연극판에서 연기를 배워 올해로 꼬박 스물여덟 해 동안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았다. 그사이 사랑하는 아내도 얻었고, 자신과 아내를 고루 닮은 예쁜 두 딸도 생겼다. 연극·영화·드라마를 넘나들며 분주하게 활동하는 손병호는 “일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한다.

악역 전문 꼬리표 뗀 손병호, 날마다 즐거운 인생


미소 짓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쉽게 말을 걸 수 없을 것만 같다. 출연작마다 날카로운 악역을 연기해서일까. 배우 손병호(48)의 주변 공기는 차가울 것 같다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지난 5월 중순, 조금 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연신 웃음을 지었다. 정지 버튼이 고장 난 비디오플레이어처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던 손병호는 스크린에서 봤던 악당이 아니었다.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조양은씨 닮았다’는 거예요. 언젠가 동료들이 괜찮은 식당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앉자마자 주인이 ‘어제 드셨던 요리 해드려요?’ 하더라고요. 무슨 소린지 모르고 그냥 그러시라고 했는데 음식을 내려놓으면서 그제야 아닌 걸 알아채더라고요. 거기가 조양은씨의 단골집이었다는데, 뭐 그런 비슷한 일이 종종 있었어요. 실제 모습이요?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 모습이 제 평소 모습이에요(웃음).”
그는 지난 5월 초 영화 ‘대한민국 1%’ 홍보차 KBS 예능 프로그램 ‘해피투게더3’에 나가 그간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젊은 시절 춤을 무척 좋아해 별명이 ‘잭슨 손’이었다며 볼링 치는 모습에 고전무용·현대무용·발레의 특성을 접목시킨 특이한 춤을 선보인 것. 이튿날 그의 이름은 인터넷 검색순위 1위에 기록될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예능의 힘을 실감했죠. 미니홈피 방문자 수가 폭주해 깜짝 놀랐어요(웃음). 친구들을 비롯한 산악회 지인들 모두 ‘딱 평소 손병호 모습’이라며 좋아했는데 인터넷에서는 난리가 났던 모양이에요. 그동안 악역 연기를 했을 뿐이지 실제 제 모습은 천진난만하고 사람들 웃기는 거 좋아하고 그래요.”

연기가 좋아 무작정 연극판에서 살았던 젊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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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는 1982년 서울예술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서 각종 무대를 섭렵한 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소풍’을 통해 영화계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로는 영화 ‘파이란’ ‘야수’ ‘알포인트’, 드라마 ‘바람의 나라’ ‘불한당’ ‘하얀거탑’ 등에 출연하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출연한 작품이 영화 33편, 드라마 6편, 그리고 연극은 셀 수도 없다. 연기에 뜻을 품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원래 어릴 적부터 끼가 많아 줄곧 연기자를 꿈꿨다”고 한다.
“부모님 말씀이 전 어릴 때 상만 펴주면 위에 올라가 춤추고 노래하느라 정신이 없었대요(웃음). 아버지나 고모는 커서 배삼룡처럼 되면 좋겠다고 하셨을 정도였죠. 연기자가 되고 나서도 ‘제대로 갔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는 영화관에서 이소룡 영화를 본 다음 날이면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고 한다. 이소룡의 표정과 몸짓을 복사판처럼 똑같이 따라 했기 때문. 때문에 별명도 ‘모션 손’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던 그는 “타고난 끼는 숨길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그는 고등학교 때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고 한다. 대신 신문을 뒤적이다 연기학원 광고를 보고는 시험을 치렀고 부모를 설득해 어렵게 돈을 마련해 등록을 했다. 그 당시 주먹구구식으로 성행했던 학원에 발을 내디딘 손병호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려 했다. 하지만 그를 좋게 본 연출자가 바로 연극에 캐스팅을 시켜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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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실제로 처음 봤을 때 환상이 심어졌다고나 할까요. 연극을 보고 있으면 혼이 빠질 정도로 매료됐죠. 선생님 지도 아래 선배들과 연기하는 게 마냥 즐거웠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배움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더라고요. 그해 유난히 각 학교 연극영화과 경쟁률이 높았는데, 전 운 좋게 서울예대에 합격할 수 있었어요.”
아직까지도 대학에서 만난 은사의 성함과 선후배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손병호는 “대학 시절 경험이 정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존경하는 교수와 밤새 연기에 대해 논하고, 동료들과 힘을 모아 작품을 연극무대에 올린 일 등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때에 학교를 다녔던 그는 “무대에 오를 때만은 마음이 너무도 편했다”고 한다. 그러다 인생의 전환점이 돼준 극단 목화에 들어갔다.
“군 시절 마지막 휴가를 나와 처음으로 극단 목화의 공연을 봤죠. 제가 군대에서 꿈꾼 연극이 그대로 무대 위에 펼쳐지니까 너무 황홀하고 신기해서 큰 충격을 받았어요. 목화에 입단하고 나서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라는 연극에 처음 출연했는데 대학로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취객 역할이었는데 너무 리얼하게 해서 극에 활력이 된 거죠. 그때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이후 그는 99년 송일곤 감독의 영화 ‘소풍’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같은 해 최민수, 정우성 등이 나온 영화 ‘유령’에 합류하면서 상업영화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고, ‘파이란’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나와 얼굴을 알렸다. 당시 그가 맡았던 역은 최민식의 친구이자 그를 살해하는 조직폭력배 용식. 잔악한 인물을 실감나게 연기한 터라 이후로 손병호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죄다 악역이었다.
“처음에는 그게 정말 싫더라고요. 국가대표 악역으로 이미지가 고정될 것 같아서 전부 다 거부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악역도 각각 사정이 있으니 다양한 모습이 나오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때부터 대본을 연구하며 그 범위 안에서 캐릭터에 변화도 주고, 디테일한 부분에도 신경을 쓰고 그랬죠. 그 정점이 ‘야수’의 조직폭력배 보스였던 것 같아요.”
권상우, 유지태와 함께한 이 영화에서 그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해 “진짜 조폭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에게도 이미지 변신의 기회가 찾아왔다. 드라마 ‘하얀거탑’의 인권 변호사가 바로 그것. 그가 연극 ‘클로저’에 출연하고 있을 때 함께 출연한 배우 김여진의 남편 김진민 PD가 ‘하얀거탑’을 준비하고 있던 안판석 PD를 데리고 극장을 찾았다가 그를 발견했다고.
“그때 연극 끝나고 다 같이 술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했는데, 전 그날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하얀거탑’에 출연해달라고 연락이 온 거예요. 어떤 드라마인 줄도 모르고 1회를 봤는데 너무 잘 만들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더라고요. 바로 전화 걸어서 하겠다고 했고, 10회부터 출연하기 시작했어요.”
권력을 쥐고 있는 대형 병원에 맞서 소수의 편을 옹호하는 변호사 역할을 실감 나게 연기한 그는 이후부터 다양한 역할 제의가 들어와 한시름 놨다고 한다.

“아내를 만난 건 생애 최고의 행운”

연기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손병호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렸다. 8년을 사귄 아내와 마흔의 나이에 부부의 연을 맺은 것. 무용수인 아내는 함께 작업을 하다가 만났다고 한다.
“아내가 창무회에 소속돼 있었는데 매년 타 장르와 결합한 공연을 했어요. 93년에는 ‘춤과 연극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공연을 했는데 그때 저희 단원들에게 연락이 와서 함께 일하게 됐죠. 그런데 우리들 눈에는 그들이 부르주아처럼 보이더라고요. 연극은 배고픈 작업인데 무용은 그렇지 않은 것 같고, 또 그들이 도우러 간 우리를 얕보는 것 같기도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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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쫑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아내는 나이가 많은 손병호의 친구에게 술을 따라주며 장난으로 반말을 했다. 거기에 화가 난 그는 참지 못하고 폭발해 상을 엎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그는 우발적으로 사고를 친 것, 관심 갖고 있던 아내의 말 한마디에 화를 낸 것에 스스로도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밤새 벽에 머리를 찧으며 후회했다고. 그런데 3일 후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아내 역시 그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저녁이나 함께하자는 아내의 제의에 그는 흔쾌히 응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그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다.
“사실 결혼을 빨리 하고 싶었는데 가진 게 없어서 못했어요(웃음). 하지만 전 그걸 창피해하지 않아요. 오히려 열심히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죠. 결혼하고 나서 바로 아이를 가졌어요. 첫째 딸 지오가 저희 곁으로 왔을 때는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어요.”
그 딸이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아빠와 엄마의 장점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끼가 넘친다고 한다. 유년 시절을 오롯이 연극장에서 보낸 딸 지오는 사람들이 시키지 않아도 나서서 발표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라고. 그는 “아이가 가끔 우리를 불러 앉혀놓고 연습한 연기를 보여주기도 한다”며 웃음 지었다. 지오가 조금 더 큰 후에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밀어줄 생각이라는 그는 “연기는 힘든 점이 많아서 사실은 피아니스트 같은 직업을 택했으면 좋겠다”며 솔직한 심정을 고백했다.
요즘 그의 최대 자랑거리는 지난해 낳은 둘째 딸 지아. 아내의 반대 때문에 미루다가 작년에 겨우 얻게 되었는데 귀가 시간이 절로 빨라질 정도로 아이가 너무나 예쁘다고 한다. 갖기 전에는 정색하며 싫어했던 아내도 이제는 아이를 보려고 밖에 나갔다가 금방 들어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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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려면 돈도 많이 들고 하니까 처음에는 둘째 얘기만 꺼내도 아내가 진짜 싫어하더라고요. 제가 계속 설득해서 결국은 아이를 가졌는데 아내가 몸이 약해서 힘들어했어요. 아이 낳고 산후 조리할 때는 피골이 상접해서 진짜 안쓰러울 정도였죠. 아내한테 들어보니 낳고 나서도 한 두 달까지는 아이 얼굴 보기도 싫었대요. 몸 좀 추스르고 나니 그제야 아이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집 안에 웃음꽃이 끊이지 않자 이제는 아내가 우스개로 “셋째 낳아볼까?”라는 말을 한다고. 그는 부모가 자식에게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라는 말을 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 난 요즘 아이들에게 ‘너희 때문에 엄마 아빠가 얼마나 행복한 줄 아니’라는 말을 한다”며 웃음 지었다.
그는 요즘 드라마 ‘자이언트’ 촬영에 한창이다. 이 드라마가 끝나면 6월부터 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인생의 절반을 연극·영화와 함께해온 그에게 ‘주연보다 더 바쁜 조연’이라는 타이틀이 붙여진 것에 수긍이 갔다. 그는 앞으로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싶다는 희망사항을 조심스레 내비쳤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겠죠. 하지만 10년 넘게 영화판에서 살며 영화라는 장르에 매력을 느꼈고, 어느 정도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궁극적으로는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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