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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이제는 말한다

증오의 터널 빠져나온 작가 한수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말하다

글 오진영 사진 조영철 기자

2010. 06. 16

7년 만에 신작 ‘용서를 위하여’를 내놓은 작가 한수산. 그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자취를 소설로 형상화하면서 80년대 자신이 겪은 필화사건을 처음 공개했다.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경험을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소설에 담은 건, 김 추기경이 남긴 ‘서로 사랑하세요’란 말 때문이었다.

증오의 터널 빠져나온 작가 한수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말하다


때는 1981년이었다. 작가 한수산(64·세종대 국문과 교수)은 당시 한 일간지에 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하고 있었다. 아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과 함께 제주도에 살고 있던 그에게 낯모르는 두 사내가 나타나 “조사를 받으러 가자”며 서울로 데려간 것은 5월 어느 날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무작정 잡혀간 곳은 서울 서빙고동의 국군보안사령부. 그는 그곳에서 무지막지한 매질과 말로 표현하기 힘든 끔찍한 고문을 당하며 그들이 강요하는 대답을 ‘진술’해야 했다. 그의 소설이 국가 원수를 모독하고 군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같은 명목으로 끌려가 폭력과 고문을 당한 신문사 및 출판사 관계자가 6명 더 있었다.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이다.
이 사건은 거의 10년 가까이 아무 기록도 흔적도 없이 묻혀 있었다. 80년대 말부터 풍문으로 떠돌기 시작하다 90년대 이후 ‘신군부에 의해 표현의 자유가 억압된 사건’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2007년 10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한수산 필화사건’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잊을 수도, 잊힐 수도 없는 고통의 과거”를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글로 써내려가는 동안 작가는 몸과 마음이 다 아팠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몽 같은 시간을 굳이 소설로 쓴 것은 단지 과거를 복기(復棋)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치유하기 힘든 것을 극복한다는 것,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답을 구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책에 쓴 건 실제 당한 고통의 절반도 안 돼
그가 교수로 재직 중인 세종대 캠퍼스를 찾았다. 작가가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갑자기 끌려갔던 30년 전 그날처럼 새로 태어나는 초록으로 가득한 5월이었다. 대학 캠퍼스는 사방을 물들인 신록만큼이나 싱그러운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했다.
“참 재미있는 게 말이죠. 몇 년 전만 해도 갓 입학한 1학년들은 화장이나 옷맵시가 어딘가 어색해서 신입생 티가 났거든요. 그런데 요즘 신입생들은 그런 게 없이 아주 자연스러워요.”
그는 한 달째 감기를 달고 사는 중이라고 했다. 신작 관련 인터뷰가 계속된데다 한국 천주교 순교사 집필과 관련해서도 TV 프로그램 촬영을 하고, 연재물 원고에 학교 강의까지 소화하느라 쉴 틈이 없어 체력이 바닥난 상태라고 했다.

증오의 터널 빠져나온 작가 한수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말하다


작가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대부분이 태어나기 훨씬 전인 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사월의 끝’이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부초’ ‘바다로 간 목마’ ‘이별 없는 아침’ 등을 발표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는 문제의 필화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제주도에 살고 있었다. 수년간 쉼 없이 이어진 집필로 지친 삶을 재정비하고 ‘인기 작가’라는 수식어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한 선택이었다.
이번에 발표한 ‘용서를 위하여’에는 그가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고 공항에 도착해 차를 갈아타자마자 구타가 시작돼 조사실에 갇혀 발길질에 몽둥이질,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하며 공포와 모멸감 속에서 보낸 시간이 50여 쪽에 걸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조사실에서 한 회사가 반체제적인 글을 쓰도록 돈을 주고 사주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 인간이 인간에게 하는 짓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온갖 종류의 고문과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모욕 속에서 그는 그들이 강요하는 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존재하지도 않는 ‘조직’의 주범이 돼줘야 했다.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가 묘사해놓은 장면을 읽는 것조차 힘들고 괴로운데, 그 일을 겪고 또 기록한 작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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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기 시작하니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풀려나오는 걸 보고 그 경험은 어느 순간 머릿속에 화석처럼 굳어졌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 중에 피곤하고 아픈 상태를 가리켜 ‘이가 솟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소설을 쓸 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했어요. 담담하게 쓰겠노라 감정을 억제했는데도 잇몸이 아플 정도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지요. 그럼에도 보안사령부에서 고문당한 경험을 묘사한 부분은 제가 실제로 당한 것의 절반도 안 될 겁니다. 그 이야기를 쓴 이유가 그 당시 일을 폭로하거나 되짚어 밝히겠다는 게 아니라 치유하기 힘들고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만 해뒀어요. 출판사에서 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충격적이니 순화하면 좋겠다고 해서 약하게 고친 대목도 있어요.”
‘한수산 필화사건’엔 작가 한수산 말고도 신문사와 출판사 관계자 여러 명이 연루돼 끔찍한 폭력과 고문에 시달렸다.
“연재중이던 일간지의 문화부장·출판부장·문화부 담당기자·출판부 기자, 출판사 관계자 두 명과 저, 그렇게 7명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찍혀’온 과정 자체가 황당한 것이, 어느 날부터 어느 날까지 제가 서울에 왔을 때 만난 사람을 다 쓰라고 하더니, 마흔 명 정도 되는 명단 중에 임의로 추려낸 거예요. 끌려온 사람 중에는 그날 부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야 해서 지갑에 목돈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왜 많은 돈을 갖고 다니느냐, 무슨 사기를 쳐서 이 많은 돈이 생긴 건지 대라면서 때렸어요.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근육질이던 사람에겐 무슨 이유로 몸을 단련한 거냐고 추궁하고, 미남형인 또 다른 사람에겐 여자관계를 다 불라고 때렸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산산조각 내고,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나락까지 떨어지게 만드는 경험이에요.”

함께 고초 겪은 사람들 만나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당시 그와 함께 고초를 겪은 한 시인은 사건이 있고 나서 7년 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작가는 그 시인의 죽음에 대해 “소설에도 밝혔지만 반드시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술 때문에 많이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 그 사건이 불에 기름 붓는 꼴이 되어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든 측면이 있을 겁니다만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면서 사건의 본질은 사라지고 전설만 남는 것 같아서 짚고 넘어가려는 거예요.”
그는 자신을 고문한 보안사령부 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자 ‘한국 땅에서 살 수가 없어’ 일본으로 갔다가 92년에 다시 돌아왔다. 그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던 사건은 그가 한국을 떠나자 그 이유를 추측하는 기사들을 통해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사건 관련 문건을 찾아내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사건 당사자로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위원회는 사법권도 수사권도 없고 그 사건을 제대로 밝혀낼 능력이 없었어요. 전체적인 인과관계와 내부 사정을 전혀 밝혀내지 못하고, 단순히 소설의 일부 내용이 신군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식으로 발표가 났기에 이것도 조사라고 했나, 무시할 수밖에요.”
당시 사건에 연루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철저한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요구할 생각은 없는지 묻자 작가는 그러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우선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어찌됐든 국가기관이 트집을 잡을 만큼 생경한 표현을 소설에 썼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고문받은 게 무슨 민주화투쟁도 아닌데 그걸 깃발 삼아 흔들어대기 싫었어요. 또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재판을 받거나 기소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풀려났기 때문에 근거로 제시할 아무 기록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물론 다시 들춰내기도 싫겠지만 그래도 당사자들이 동의하신다면, 제가 나머지 여섯 분을 만나 어떻게 그 사건을 겪고 회복되었는지 인터뷰를 하고 책으로 남기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궁극적 용서는 신의 몫, 이제는 다 잊을 것”

증오의 터널 빠져나온 작가 한수산 진정한 용서의 의미를 말하다


소설은 필화사건을 겪은 후 일본에 건너가 있는 동안, 천주교 신자로 세례를 받고 한국 천주교 순교사를 연구하게 된 작가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더불어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30년 전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추기경의 삶이 만나는 지점은 김 추기경이 생전에 강조한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이다. 작가는 김 추기경의 강론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처음 읽었을 때, 무슨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가해를 당한 자신에게 죄의식도 없고 사과하지도 않는 ‘그들’을 용서하고, 나아가 사랑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따져 묻고 싶었다고 한다. “추기경님이 잊히지도 않고 용서할 수도 없는 것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며 노여워하고 괴로워했다.
흔히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고 하는데, 작가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잊겠다”고 말한다.
“어떤 프랑스 신부님이 궁극적인 용서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몫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용서는 신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나는 지금도 힘없는 개인을 짓밟은 권력의 추악함을 용서할 수 없어요. 한번은 어떤 사람을 만나 친해졌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군부 고위 인사의 사돈이라기에 더는 만나지 않았어요. 누군지 모를 때야 괜찮았지만 알고 나서는 불편하고 싫어서 만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그 일로 인해 더는 괴롭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상태가 돼 있었어요. 추상적이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네요.”
김수환 추기경 선종 후 작가는 자신을 그렇게도 아프게 했던 그분의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1년 동안 김 추기경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추기경이 젊은 신부일 때 첫 부임지에서 한센병 환자와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던 모습을 들었고, 젊은 교장 선생님으로 ‘양심’을 가르치면서 감독 없는 시험을 실천했던 학교, 식민지에서 온 유학생 신분이었던 도쿄의 조치 대학 등을 찾아갔다. 작가는 추기경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그분의 말씀을 되새기는 동안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 깊숙이 굳어버린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까스로 만난 것은 “증오와 분노는 인간성을 파괴할 뿐 그 무엇도 소생시키지 못한다는 것, 살기 위해서는 증오와 분노 저편으로 뛰어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수없이 입에 담게 되는 주기도문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말이 있어요.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단순한 문장의 뜻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이렇게 긴 세월이 걸렸던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촬영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캠퍼스에는 졸업 사진을 찍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껏 멋을 부린 청춘들이 카메라 렌즈를 향해 5월의 태양보다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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