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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 이애란 남다른 인생

글 이설 기자 | 사진 조영철 기자

2009. 03. 23

태어날 때부터 자유 없는 삶을 선고받았다. 꿈꾸고 노력해도 ‘월남자 가족’에겐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부당한 차별을 피해 내려온 남한의 바람은 더 혹독했다. 빈손으로 또 다른 차별과 맞서야 했다.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 이애란 남다른 인생

“불행에 익숙했던 삶, 이제는 희망의 등불 되고 싶습니다”
“남한에 온 지 햇수로 13년째인데, 이곳 사람 다 됐죠(웃음).”
세련된 커트머리와 나비모양 뿔테안경이 멋스럽다. 유창한 언변은 아나운서급이고 카메라 앞에 선 포즈는 모델 뺨친다. 호쾌한 목소리 어디에도 북한 사투리는 묻어나지 않는다.
국내에 체류하는 새터민 1만5천여 명 가운데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단 3명. 그중 여성으로는 이애란씨(45)가 유일하다. 올해 2월 이화여대 일반대학원 식품영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울전문학교 호텔조리학과에서 북한 요리와 식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이씨가 걸어온 지난 45년은 질곡의 연속이었다. 출신 성분으로 박해받던 북한 생활 33년, 백일 된 아들을 업고 죽을 고비를 넘겨 도망 다니던 중국에서의 보름, 쉼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 남한에서의 12년. 과거를 돌아보면 절박한 기억만 아득히 펼쳐진다. 이제는 여유가 생긴 걸까. “고통만 가득한 각박한 삶이었지만 죽지 않고 살다 보니 좋은 날도 오더라”는 그의 얼굴에 원숙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산골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전 가족이 양강도 삼수군 관동리로 쫓겨났다. 조선시대 삼수갑산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임광지역. 온 가족이 벌목하며 감자 3개로 하루를 버텼다. 혹독한 시절은 8년간 계속됐다.
“출신 성분은 말 그대로 타고난 환경이에요. 저는 악조건을 두루 갖추고 태어났어요. 광복 이전 평양 대지주이자 크리스천인 조부모가 월남을 하셨거든요. 월남자 가족은 추방을 당하고 모든 일상에서 차별을 받아요. 대학진학과 취업은 물론 식량배급조차 받을 수 없죠. 심지어 수학여행을 갈 때도 제약을 받아요. 열한 살 무렵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다가 잡혀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죠.”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 이애란 남다른 인생

신문과 TV는 물론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외딴곳. 하지만 욕심 많고 야무진 그는 꿈을 잃지 않았다. 궁금한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그 꿈은 절망으로 변했다. 유배생활이 끝나도 ‘월남자 가족’ 꼬리표는 벗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박탈당한 자유와 부당한 현실에 대한 고민으로 힘든 사춘기를 보내던 어느 날, 이씨는 죽을 결심을 한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았어요. 살던 지역 대표로 김일성대학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할 정도였죠. 그래서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접을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담임교사가 수업시간에 그러더군요. ‘네가 공부를 잘한다고 대학에 갈 줄 아느냐. 너 같은 건 대학에 못 간다’라고요. 그 뒤로 학교는 물론 바깥에도 못 나갔어요. 감수성이 가뜩이나 예민한 시절,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한 충격이 컸던 거죠. 상태가 나빠지자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살 방법으로는 농약을 택했다. 자살을 하면 민족반역자 딱지가 붙어 가족들이 고생할 게 걱정됐다. 빈대를 잡기 위해 집집마다 하나씩 있던 농약이라면 사고사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란 기름이 둥둥 뜬 액체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약을 마시고도 한참 동안 반응이 없어 ‘죽지 못하고 병신 되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어요. 어머니가 쓰러진 저를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가셨죠. 몇 년 뒤에는 그토록 바라던 대학에도 입학했어요. 출신 성분이 나빠도 능력이 되면 일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법이 바뀌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살아서 천만다행이에요(웃음). 신의주대학 식품발효학과를 졸업하고 북한과학기술위원회에 들어가 품질감독원으로 일했어요. 그리고 33세에 의사인 남편과 결혼했죠.”
97년 남편 두고 친정식구·아들과 함께 탈북
이씨는 지금도 그때의 떨림을 잊지 못한다. 97년 누군가가 카세트테이프를 보내왔다. 찰칵, 카세트의 버튼을 누르자 낯선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중국에 너희들을 데리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월남한 뒤 미국으로 이민 간 조부모가 핍박받으며 살고 있을 가족의 탈북을 위해 연락을 취한 것이었다. 듣는 순간 가족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 간이 콩알만 해져 수시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처음에는 탈북 제안에 회의적이었다.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 이애란 남다른 인생

“북한에 살면서 제 가장 큰 소원은 집안의 출신 성분을 바꾸는 것이었어요. 출신만 바꿀 수 있으면 모든 걸 내다 팔아도 아깝지 않았죠. 당원이 하나라도 있으면 좀 나아질까 싶어 뇌물을 주고 남동생을 입당시키기도 했어요. 그만큼 차별받고 눈치 보는 생활에 넌더리가 났던 거죠. 시간을 두고 고민하니 무조건 탈북에 반대할 게 아니더군요. 이곳에서 발버둥 치며 사느니 차라리 남한으로 가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남한으로 갈 것인가 북한에 남을 것인가. 결정은 간단치 않았다. 남으로 가자니 남겨질 가족이 걱정이었고 북에 남자니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장고 끝에 이씨를 비롯한 가족 대부분은 탈북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가족 간 합의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완강하게 북에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혈연과 결혼으로 얽힌 모든 가족이 함께 갈 수는 없어요. 계획이 탄로 날 수도 있고 발각되기도 쉬우니까요. 저는 남편은 두고 아이만 데려왔어요. 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죠. 탈북은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면 가족 누군가는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가슴 찢어지는 선택이에요. 어머니는 형제가 다 북한에 계셨어요. 그래서 탈북을 반대하셨죠. 월남한 뒤에 얘기를 전해 듣기론,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외삼촌이 그곳에서 얼어 죽었다고 하더군요. 어머니는 이곳에 살아도 늘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씀하세요.”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 이애란 남다른 인생

결국 “시간이 촉박하다”는 연락책의 재촉으로 8월 새벽 이씨와 아들, 남동생, 아버지 등 가족의 절반이 먼저 떠났다. 나머지 가족들은 3주 뒤 압록강을 건넜다. 백일이 채 안 된 아들을 업고 국경을 넘으면서 그는 조부모를 원망했다. 왜 하필 아이가 있을 때 건너오라고 했을까. 혹 내가 감옥에라도 잡혀가면 아이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해질까. 쥐약 네 봉지를 품고 아슬아슬하게 강행군을 이어가던 어느 날 새벽, 이씨는 보위부에 발각되고 만다.
“지금 생각해도 천운이에요. 발각돼서 집결소(감옥)로 끌려갔는데, 마침 아는 사람이 새벽 당직을 서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기록부에 참고표시를 하더니 ‘석 달 된 아기가 있음’이라고 기록하더군요. 북한도 산모나 임신한 여성에게는 관대한 부분이 있어요. 그 사람이 돌아가도록 편의를 봐 줘서 빠져나올 수 있었죠.”
97년 10월, 중국과 베트남을 거쳐 드디어 남한 땅을 밟았다. 친정식구 9명과 함께였다. 위험한 모험 끝에 발을 내디딘 남한의 첫인상은 ‘생소함’이었다.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호텔에서 잡역을 시작한 이씨. 하지만 월급 50만원으로는 아이 분유값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저 아들을 밥 굶지 않게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조차 힘들더군요. 하지만 호텔 일을 그만두고 보험회사에 다니면서 ‘노력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조금 붙었어요. 일이 적성에 맞아 실적이 괜찮았거든요. 그러다가 북에서 하던 계통의 일을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식품관리 쪽 일을 해왔는데, 고민을 하다가 웰빙 식당을 열게 됐죠.”
특허출원을 하고 작은 규모의 건강음식점을 열었다. 온 가족이 식당에 매달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중, 우연히 탈북여성에 대한 논문을 쓰는 이화여대 학생을 만났다. 이씨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명민함을 알아본 그 학생은 이화여대 식품영양학과 이종미 교수에게 그를 소개했다. 이 교수는 장학금 2천만원을 확보했다며 석사과정 등록을 권했다.
“정말로 학교를 다니게 될 줄은 몰랐어요. 장학금 이야기를 하셨을 때도 저는 받을 자격이 안 된다고 고사했어요. 그런데 막상 장학금을 받게 되자 등록을 안 할 수가 없었죠. 공부에 대한 갈망은 있었지만 치열한 현실 속에 무시하고 살았어요.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데 공부는 사치였죠. 학교 분들의 적극적인 권유와 도움으로 결국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어요.”
덜컥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영어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던 이씨는 ABC도 몰랐다. 영어수업과 영어원서의 무차별 폭격에 정신이 몽롱했다. 학교를 마친 지 10년이 지나 공부에 대한 감도 잃었고 식당일을 병행하느라 시간도 부족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아이가 데굴거리며 울고 있었다. 혼자 상한 음식을 집어먹고 체한 것이다.
“내가 억만 보화를 얻는다 한들 내 새끼를 제대로 못 키우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더군요. 식당과 수업, 영어공부로 정신없는 생활을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식당을 접을지 학교를 접을지 계산을 해보니, 일단 장학금을 받으며 학위를 딴 뒤 다시 식당을 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남한의 온정으로 공부한 나는 빚진 자, 이제 베풀 일만 남았어요”

이씨는 스스로를 ‘빚진 자’라고 말한다. 지도교수와 학우 등 남한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자신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초 ‘1990년 전후 북한주민의 식생활 변화’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7년간 악바리처럼 공부에 매달린 결과다. 그는 “박사학위는 남한생활의 아픔이 담긴 학위 이상의 의미”라고 말했다.
“제 능력보다는 주변의 도움으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죠. 그건 행운인 동시에 빚이기도 하죠. 어떤 형태로든 제가 받은 것들을 갚을 거예요.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전수해 후배들이 실수를 피하도록 돕고 싶어요. 제가 남한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깨달은 것은, 막 남한에 오면 한심한 처지이지만 노력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거예요.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전하다 보면 도움의 손길이 있고, 길이 열리는 것이지요. 어렵더라도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에겐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북한 요리와 식생활에 대한 연구로 북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아들이 사회에 필요한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젖먹이 때 남한으로 건너온 아들은 최근 사춘기를 앓고 있다. 이씨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탈북자 가족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아이가 정체성 갈등을 겪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들은 새터민이라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요. 어른 사회도 새터민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어린아이들은 어떻겠어요. 남한에 와서 사실 특별히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오히려 북한에서보다 심적·육체적으로 피곤했죠. 목이 쉬고 잠을 못 자 눈이 벌건 채 12년을 살았으니까요. 유일하게 행복한 건 아이가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는 거예요. 피아노, 바이올린, 태권도…. 아들이 나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게 기뻐요. 엄마의 선택으로 아빠 없이 자라게 해서 아이에게 늘 미안해요. 탈북자라는 차별을 딛고 남한에서 밝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랐으면 합니다.”

이씨는 바꿀 수 없는 출신 성분의 굴레를 벗기 위해 97년 탈북을 결심한다.
12년간 치열하게 자신을 담금질한 결과 새터민 여성 최초 박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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