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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깊은 슬픔

동생 잃은 슬픔 안고 콘서트 무대 오르는 김창완

글·김명희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8. 05. 23

지난 1월 산울림 멤버로 함께 활동하던 동생 창익씨를 사고로 잃은 가수 김창완. 슬픔을 안고 다시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그를 만나 지난날에 대한 추억과 동생을 떠나보낸 애틋한 심경을 들었다.

동생 잃은 슬픔 안고 콘서트 무대 오르는 김창완

김창완(54)을 만난 날은 개나리가 화사하게 핀, 눈부신 봄날이었다. 그는 바람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잎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산울림의 맏형’으로 불리게 했던 음악적 동반자이자 아끼던 막내 동생 창익씨를 사고로 잃은 그는 몇 달 사이 부쩍 늙어 있었다. “세월 저편에 다녀온 기분”이라는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충혈된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통증이란 게 금방 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오더라고요.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웬 드러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볼 때, 팬들이 보내준 사진을 볼 때, 제수씨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가구를 보다가도 문득 문득 막내 얼굴이 떠올라요. 밥을 먹다가, 횡단보도를 지나다가… 시도 때도 없이 눈앞에 아른거리기도 하고. 얘기를 들어보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한 10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캐나다 밴쿠버에서 한 식품 도매업체 이사로 근무했던 창익씨는 지난 1월 폭설이 내린 상태에서 지게차로 작업을 하다가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그는 비보를 접하고 곧바로 캐나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동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고.
“막내를 보내고 나서 삼형제가 같이 찍은 어린 시절의 사진을 보니 몸은 셋으로 나뉘어 있어도 한 몸으로 보이더라고요. 한 이불 속에서 장난치던 추억, 같이 노래를 만들던 시절이 떠오르고, 술 마시고 ‘형’ 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고…. 전에는 어린 시절 같이 뛰놀고 음악하고 했던 것들이 굉장히 긴 세월처럼 느껴졌는데 동생을 보내고 나니 시간이 확 쪼그라든 느낌이에요. 무엇인가로 내리누른 것처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이건 뭐, 극복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있었던 모든 일은 이제 ‘추억’으로 하라는 일방적인 통보더라고요.”
아버지의 오랜 투병으로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그의 형제들은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 않았지만 청소년기부터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 기타를 치고 드럼을 두드리며 자신들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갔다. 이들의 악기와 앰프에서 터져나온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동네사람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았고 그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이웃 사람들에게 사정하며 살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 둘째 동생 창훈씨가 작곡한 ‘나 어떡해’가 77년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이들 형제는 ‘아니 벌써’라는 데뷔 앨범을 냈고 이 음반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자 본격적인 그룹 활동을 시작했다. 김창완은 기타와 보컬을, 둘째 창훈씨는 베이스와 보컬을, 셋째 창익씨는 드럼을 맡았다. 하지만 음악만으로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창익씨는 10년 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창익씨는 이민 생활 중에도 지하실에 드럼을 놓고 연습을 계속했다고 한다. 세 아들의 분신 같은 산울림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평소 “막내가 제 일을 하면서도 음악을 놓지 않고 열심히 한 것이 놀랍고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창완은 “막내가 한국에서 음악을 계속했더라면 좋았겠지만 90년대 이전 곡들은 거의 저작권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늙어가는 것,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우리 자식들이 나이 드는 건 너무나 안타깝다”던 그의 어머니는 막내의 사고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망연자실했으나 지금은 의연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세월 저편에 다녀온 기분, 시도 때도 없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동생 얼굴…
김창완은 지금껏 ‘완벽한 자유’를 꿈꾸었다. 매 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 인생이라는 천을 촘촘하게 엮어내는 것이 그가 꿈꾸던 세계. 하지만 동생을 떠나보낸 후 그는 좀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깃털처럼 가벼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는 것.
“모든 게 꽉 차 있으면 그게 더 멋있는 인생일까요. 얼마 전 자전거를 메고 육교를 오르면서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가벼운 자전거는 없을까, 육교는 육중한 돌로만 만들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많은 사람이 산울림의 향후 행보를 궁금해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창완은 “이미 산울림의 음악적인 영향은 가요사에 많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팬들을 위로하는 앨범을 기획할 수도 있고 각자 혹은 듀엣으로 활동할 수도 있겠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산울림과는 독자적으로 매년 5월 ‘김창완입니다’라는 브랜드 콘서트를 진행해온 김창완은 올해도 변함없이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이번 공연은 전자음을 최대한 배제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공연을 이끌어가되,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곡들은 최대한 배제할 생각이라고 한다.
“동생 생각을 하면서 공연을 끝까지 이어갈 자신이 없어요.‘너의 의미’‘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어머니와 고등어’ 이런 곡들은 막내의 손길이 닿지 않은 노래인데, 이런 노래들 위주로 콘서트를 할까 해요.”
김창완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눈시울이 붉어질 때마다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수록 감정은 더욱 격해져 눈물이 흘렀지만 이 역시 그가 슬픔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음악은 사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저 스스로의 질문이자 답이에요. 뜻하지 않게 이루어진 소통 덕분에 산울림이 재발견됐으니 감사할 뿐이죠. 언제까지 제 이기적이고 자유로운 것들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지켜봐주실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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