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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도전

지난해 히말라야 3개 봉 연속 오른 산악인 고미영

글·김수정 기자 / 사진·지호영 기자, 코오롱스포츠 제공

2008. 01. 23

국내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한 해 동안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3개 봉에 올라 화제를 모은 고미영씨.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그가 산악인으로 변신한 사연과 히말라야 3개 봉 정복 뒷얘기를 들려줬다.

지난해 히말라야 3개 봉 연속 오른 산악인 고미영

지난 10월 초 여자 산악인 고미영씨(40·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는 해발 8027m의 히말라야 시샤팡마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티베트에 위치한 시샤팡마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80도가 넘는 고도경사에 낙빙·낙석·눈사태 등이 심해 세계 정상급 전문 산악인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하는 난봉. 거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도 등정을 포기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그는 만년설이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의 또다른 봉우리를 보며 “조만간 다시 만나자”며 손을 흔들었다고 한다. 영하의 날씨와 산소 부족 현상, 고산병 등은 그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정상에 올라섰을 때의 기쁨은 사실 잠시뿐이에요. 언제 눈사태가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더 긴장해야 하고 대원들과 무사히 베이스 캠프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요. 정상에 오를 때 힘을 다 쏟아붓기 때문에 내려갈 때 사고가 더 많이 나죠. 이번에도 전 대원이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짐을 풀고 나서야 ‘또 해냈구나’라고 실감했어요.”
고씨가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등정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2006년 9월 초오유(8201m)를 등정한 데 이어 2007년 3월 에베레스트(8848m)와 7월 브로드피크(8047m), 10월 시샤팡마 등에 차례로 오른 것. 그는 산악인 엄홍길·박영석·고 오희준씨에 이어 한 해 동안 8000m 이상의 봉우리를 3개 연속 등정하는 기록도 세웠다. 이는 국내 여성으로는 최초다.
“10여 년간 암벽등반가로 활동했지만 고산등반 경력은 2년밖에 안 돼요. 그래서 처음엔 제가 히말라야 봉우리를 오르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지만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이기고 싶다’는 의지로 이 일을 해냈죠.”

우연히 접한 산의 매력에 빠져 암벽등반가로 나서
고씨는 원래 운동하는 걸 싫어해 몸무게가 70kg 이상 나갔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림수산부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가 등산을 시작한 건 22세 때. 우연히 동료들과 뒷산으로 야유회를 갔다가 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그날 이후 매주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홀로 산에 올랐다고. 어려운 산을 등반할수록 더 재미있다는 걸 안 뒤부터는 지도책을 사 전국의 등산코스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산을 중턱쯤 오르면 보통 두 갈래 길이 나와요. 초보자가 택해도 좋을 만큼 쉬운 코스와 중급자 이상이 돼야 오를 수 있는 어려운 코스로 나뉘는데 저는 초보자 때부터 꼭 어려운 코스를 택했어요. 일부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골라 다니면서 짜릿함을 느꼈죠.”
평범한 공무원이던 그를 전문산악인으로 바꿔놓은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89년에 일어났다. 공휴일에 북한산 등반에 나섰다가 본래 목표였던 백운대 코스 대신 암벽이 많아 험준한 만경대 코스를 택한 것이 시작이었다.
“뚱뚱한 여자가 부들부들 떨면서 암벽을 타는 게 안돼 보였는지 전문 산악인들이 도와줬어요. 그분들과 함께 정상에 올랐는데 ‘나도 이들처럼 암벽을 잘 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곧바로 코오롱 등산학교 암벽반에 입교했죠.”

지난해 히말라야 3개 봉 연속 오른 산악인 고미영

티베트에 위치한 해발 8027m의 히말라야 시샤팡마에 오르고 있는 고미영씨.


직장이 있는 경기도 수원에서 등산학교가 있는 서울 노량진까지 1주일에 세 번씩 오가며 클라이밍(암벽등반) 훈련을 한 그는 주말마다 자연암벽을 타면서 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1년쯤 트레이닝을 받자 체중이 20kg 정도 줄어들어 몸매도 탄탄한 근육질로 변했다고.
“등반이 직업이 된 건 지난 93년 한 대회에 연습 삼아 나갔다가 순위권 안에 들고부터예요. 그날 이후 ‘우리나라에서 1등을 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고 그해 가을 열린 대회에서 정말 우승을 차지했죠.”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한 그는 94년부터 클라이밍 국가대표로 활동하며 아시안챔피언십클라이밍대회를 6연패하고, 2001년 세계랭킹 2위에 오르는 등 화려한 경력을 이어갔다.
“클라이밍에 미쳐 안정적인 직업인 공무원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과감하게 그만둔 뒤 97년 프랑스로 클라이밍 유학을 떠났죠. 자연암벽이 발달한 유럽에서 훈련하면서 세계랭킹 5위 안에 들었을 때는 상금으로만 한 해 2만 달러 이상 벌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는 지난 2004년 클라이밍을 그만뒀다. 또래 암벽등반가들이 나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은퇴하면서 재미를 못 느낀데다 성적이 부진해 더 이상 선수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웠던 것. 잠시 쉬고 있던 그가 고산등반을 시작한 건 등산학교 창립 2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가 만난 등산학교 산악반 강사들과 파키스탄에 위치한 드리피카봉(6447m)에 오르자고 약속하면서부터.
“고산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드리피카봉이 그렇게 험한지 몰랐죠. 6000m 정도면 오를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같이 오르자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모래밭을 지나고 빙하를 건너는 등 접근 자체가 어려운 산이더라고요. 그때까지 세계에서 단 네 팀밖에 성공하지 못한 산을 무작정 오르려고 했으니…(웃음). 그런데 신기한 건 산소가 부족한 지역에 가면 나타날 수 있는 고산증세가 제게는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오히려 물 맑고 공기 좋은 데 있으면서 잘 자고 잘 먹어서 살이 쪘어요. 결국 첫 원정이었는데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정상까지 올라가게 됐죠.”
그러나 정상에 거의 다다를 무렵 로프가 끊어지면서 그는 60m 아래로 추락했고, 척추를 크게 다쳤다. 동료의 도움을 받아 끌어올려진 뒤 아픔을 참고 등정에 성공했지만 한국에 돌아와 한동안 코르셋을 착용하고 누워 지냈을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날의 상처는 아직도 몸 곳곳에 남아 있다고.
“병원에 입원해서도 ‘이제 본격적으로 고산에 오르자’는 생각만 들었어요. 몸이 낫자마자 청계산·북한산·지리산 등을 오르며 훈련을 했고 히말라야에 있는 8000m급 봉우리 14개를 언제 어떻게 오를 것인지 계획을 짰죠. 클라이밍과 달리 고산등반은 나이 제약이 없어요.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클라이밍으로 체력이 다져졌고 고소증세도 없으니 도전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난 2006년 처음 도전한 에베레스트 등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사고당하진 않을까, 동상에 걸리면 발가락을 잘라야한다던데’ 같은 두려움을 안고 출발한데다 사전 정보가 부족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고 간 것이 원인이었다. 해발 6500m 지점에 이르자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발이 퉁퉁 부었고 장비까지 허술하게 챙겨간 탓에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열흘간 베이스캠프에 머물다 등정을 포기하고 귀국한 그는 사람들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면서 준비 없이 고산에 오른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했다고.

지난해 히말라야 3개 봉 연속 오른 산악인 고미영

고미영씨는 여성 산악인으로서 힘든 점도 많지만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인 것처럼 살자”는 마음으로 고산등반에 도전한다고 말했다.


“6개월 정도 고산등반을 연구한 뒤 다시 도전한 산이 초오유예요. 원정을 앞두고 매일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산길을 달렸고 지리산 종주도 여러 번 했죠. 몸 안에 지방량을 늘리기 위해 술·돼지고기를 많이 먹었고 핫팩과 산소마스크도 준비해갔어요. 산을 오르면서 파란 하늘, 산 사이로 또 다른 고산인 시샤팡마·에베레스트·로체 등이 보이는데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에 1%도 안 되는 사람들이 도전하는 이곳에 내가 왔다’는 자부심이 들더라고요. 제 생애 가장 특별한 날이었어요.”
산악인들 사이에서 고씨는 ‘철인’ ‘멘탈스트롱’으로 불린다. 좀처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가진데다 정신력이 워낙 강해 포기할 줄 모른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고씨는 체력적으로도 탁월해 맥박수가 1분에 약 49회(정상인 약 70회)인 마라톤 선수 수준이며 폐활량도 일반인의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신체조건은 타고난 것 같아요. 고산증세를 앓지 않는 것도 큰 행운이고요. 지금까지 고산등정에 단 한 번만 실패하고 다 성공한 건 운이 좋은데다 그동안 몸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전남 부안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중학교를 매일 30~40분씩 걸어다니고 암벽등반가로 활동하며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게 기초체력을 만들어준 것 같다”고 말한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점도 등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등반을 할 때 그는 코미디 장르의 DVD와 책을 꼭 가지고 가는데 웃음은 긴장감을 완화시켜주고 조급함을 달래준다고 한다.
“좋은 글을 노트에 적어놓고 가끔씩 들여다보기도 해요. ‘오늘이 내 생애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자’가 제 좌우명이죠. 산이 좋아서 산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배우는데 지난 2006년 겨울엔 산악스키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하기도 했어요. 올해도 시간 나면 또 도전해보려고요.”

강한 체력과 정신력 지녀 동료 산악인들 사이에서 ‘철인’으로 불려
여성 산악인으로서 겪는 힘든 점은 없냐고 묻자 “등반을 떠나면 20여 명 대원 중에 여자는 나 하나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원들은 나를 남자로 생각한다”며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장실에 갈 때나 등반 도중 월경주기가 걸릴 때면 힘든 게 사실이라고.
“고산등반 때 대소변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많이 궁금해하더라고요. 고산에 가면 혈액순환을 위해서 물을 많이 마시기 때문에 눈구덩이를 판 임시화장실에 자주 가게 돼요. 생리적인 현상이니까 그리 수치스러운 일은 아닌데, 밤에는 캠프 밖으로 나가기 힘들 만큼 추워서 움직이기가 귀찮은 게 문제죠. 마침 언니가 얼마 전 실내용 변기를 구입해줘서 저는 캠프 안에서 해결해요(웃음). 월경은 여자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잖아요. 보통 등반을 떠나면 한 달 이상 걸리니까 월경주기가 꼭 걸려요. 불편하긴 하지만 약이나 주사로 주기를 변경하지 않아요. 월경을 하면 하는 대로, 배가 아프면 아픈 대로 올라가는 거죠.”
누구보다도 안전을 중요시하는 그이지만 가족들은 늘 그를 걱정한다고 한다. 특히 부모님은 산악인으로서 촉망받고 있는 딸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조난당하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매일 기도를 해주신다고. 또 아직 미혼인 그가 하루빨리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다.
“좋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하고 싶은데 제 생활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외국에 오래 나가 있어야 하고, 언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 무책임한 결혼생활을 할까봐 걱정스럽죠. 하지만 남자 대신 제게는 산이 있잖아요. 가끔 사람들이 ‘도대체 산이 왜 좋냐’고 묻는데 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해서 좋아요. 눈보라에 떠밀릴 때는 ‘정말 힘들다. 다시는 산에 안 오를 거다’라고 결심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또 배낭을 짊어지고 나서는 저를 발견해요(웃음). 나이가 들면 강단에 서서 학생이나 산악인을 지도하고 싶어 지난 2003년에 늦깎이 대학생도 됐어요.”
12월 말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과(6959m)에 오른 뒤 새해에는 봄·여름에 로체(8516m)와 K2(8611m), 가을에 마나슬루(8163m)를 등반할 예정이라는 고미영씨. 그의 최종 목표는 2011년까지 세계 여성 최초로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봉우리 14개를 모두 오르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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