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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아름다운 가족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서 만난 빙그레 김호연 회장 가족

글·김명희 기자 / 사진·홍중식 기자

2007. 09. 22

지난 7년간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 ‘벽돌 나르는 회장’으로 불리는 빙그레 김호연 회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인 부인 김미 여사, 자녀들과 함께 푸드뱅크, 저소득층 자녀 지원, 장학사업 등 꾸준히 선행을 실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 회장 가족을 만나 봉사 활동의 기쁨과 보람, 남다른 자녀 교육법에 대해 들었다.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서 만난 빙그레 김호연 회장 가족

강원도 춘천 해비타트 현장에서 만난 김호연 회장 가족. 왼쪽부터 장남 동환군, 김호연 회장, 부인 김미 여사, 딸 정화양, 막내 동만군. 김회장 부부는 봉사를 직접 실천하며 자녀들에게 ‘나’보다 ‘우리’를 먼저 생각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지난 7월31일 강원도 춘천시 신북면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 현장. 자원 봉사자들의 구슬땀에 힘입어 무주택 서민들에게 희망의 보금자리가 될 건물 두 채가 조금씩 모양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휴가와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30℃를 웃도는 불볕더위 속에 쉼 없이 일손을 놀리는 이들 가운데 빙그레 김호연 회장(52)과 부인 김미 여사(50), 그리고 세 자녀 동환군(24), 정화양(23), 동만군(19)을 만날 수 있었다. 머리에 안전모를 쓰고 허리에 연장주머니를 찬 채 부지런히 공사판을 누비는 이들 가족은 영락없는 건설현장 노동자의 모습이었다.
“헬멧 색깔마다 각기 다른 의미가 있어요. 빨간색은 건축에 관한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흰색은 철근을 묶고 짐을 나르는 등 단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거고요, 초록색은 빨간색 헬멧을 쓴 사람들로부터 지시사항을 전달받아 흰색 헬멧을 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거죠.”
가족 중 유일하게 초록색 헬멧을 쓰고 있는 김호연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한국에 해비타트 운동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던 2001년 ‘지미카터 특별 건축사업’(강원도 태백)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7년째 이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현재는 기업 차원에서 해비타트를 후원하고 있다. 그가 해비타트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장남 동환군 덕분이라고 한다.
“동환이가 아내의 권유로 99년 강원도 태백에서 집 짓기를 하고 돌아와서는 굉장히 뿌듯해하기에 ‘다음엔 아빠도 함께 가자’고 약속했죠.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는 의욕이 앞서 폭염 속에서 무리를 하다가 탈진을 하기도 했지만 보람도 컸어요. 그 이후론 온 가족이 참여하게 됐죠.”
올해 김 회장 가족은 자가용 대신 기차를 이용해 가족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했으며 개인 참가비 27만원은 각자 용돈으로 부담했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매력 때문에 김 회장 가족이 해비타트에 푹 빠졌을까. 구리빛으로 얼굴을 그을린 장남 동환군이 말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서 일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집이 조금씩 완성되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해요. 육체노동을 하면서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라는 자신감도 생기고요(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집 없는 설움으로 고통받았던 분들이 입주식 때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져요.”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서 만난 빙그레 김호연 회장 가족

장남 동환군의 권유로 온 가족이 사랑의 집짓기 운동에 동참
“사치 안 하고 겸손하고, 아이들 교육에 관심 많은 평범한 주부입니다. 수줍음을 많이 타지만 독립운동가 후손답게 사회봉사 활동에는 적극적입니다.”
“남편은 굉장히 따뜻하고 사고가 건전해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저는 그걸 ‘좋은 고집’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난 82년 결혼한 김 회장 부부는 서로를 이렇게 평했다. 한화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종희 회장의 2남 1녀중 차남인 김 회장은 김미 여사와 재벌가에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으며 이 부부는 “세월이 지날수록 새록새록 서로의 좋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할 만큼 금실이 좋다. 김 회장 부부의 인연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끼리의 인연으로 서로 알고 지내던 이들은 김 회장이 공군 장교로 군에 입대한 후 러브레터를 주고받으며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고 김 회장의 제대와 함께 자연스럽게 결혼에 이르렀다.
“아마 저희 부대에서 제가 편지를 가장 많이 받았을 겁니다. 당시 군 복무를 함께하던 동료들이 그 비결을 몹시 궁금해했는데, 사실은 제가 그만큼 아내에게 편지를 많이 썼어요(웃음).”
무엇보다 사랑을 우선시했던 소박한 연애과정처럼 이 부부는 자녀교육에 있어서도 사랑과 대화를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서로 각자 일에 바쁘더라도 저희는 1년에 최소한 한번은 가족이 함께 여행을 떠나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그 동안 밀렸던 일 또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함께 상의하고 걱정도 하고, 기뻐하기도 합니다.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죠. 마음 같아선 함께 하는 시간을 더욱 늘리고 싶어요.”
세 자녀는 모두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는 “넓은 세계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 사회에서 좀 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본인들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맏아들 동환군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군 입대를 준비하고 있으며, 둘째 정화양은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막내 동만군은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집안 배경이 든든한 만큼 유학생활도 풍족할 것 같다고 묻자 동환군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용돈이 적기도 하지만 공부 이외의 다른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크게 돈을 쓸 일이 없어요. 자취를 하면서 살림도 제가 직접 하는걸요. 정화도 대학에 다니면서 유엔이나 변호사 사무실 등에서 인턴을 하며 용돈을 직접 벌어서 쓰고 있고요.”
조금이나마 용돈을 받고 있는 지금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한다. 김 회장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일찌감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지원을 해주겠지만 그 이후엔 그동안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각자 ‘개인기’로 살아야 할 것”이라고 ‘선언’을 해 둔 터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 않겠습니까. 좋은 것을 주고 싶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싶고…. 하지만 저희는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줘야 할 가장 큰 자산은 균형 잡힌 가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들이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기보다 평범하지만 주위를 둘러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 회장 부부가 그간 펼쳐온 봉사활동의 면면을 보면 그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김 회장 부부는 대한성공회 주관 ‘푸드뱅크’, 국제어린이보호재단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등 다양한 사회단체와 인연을 맺고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자녀들 역시 각자 자신에게 맞는 봉사활동을 찾아서 하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돕고 있다.
“능력이 되면 다른 사람을 돕는 게 사람의 도리라고 배워왔죠. 아마 아이들도 봉사 활동을 특별한 게 아니라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김미 여사)

‘사랑의 집짓기’ 현장에서 만난 빙그레 김호연 회장 가족

김 회장 부부는 김미 여사의 친정아버지인 김신씨를 모시고 살고 있다.


동환군은 초등학교 때부터 6년 동안 매년 여름 맹인교회에서 봉사활동을 했으며 98년 외환위기 때는 서울역 광장에서 석 달간 무료 급식을 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 익힌 요리 솜씨로 몇 년 전 김미 여사가 앓아누웠을 때 일주일 동안 밥상을 차려내 가족들을 감동시켰다고 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겸손이 몸에 밴 동환군은 이 역시 봉사를 통해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사람의 관점에선 대수롭지 않은 일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경우가 있어요. 맹인학교에서는 바닥에 물이 떨어지면 재빨리 닦는 게 중요한데 앞이 보이는 사람들은 물을 보고 피해 가면 그만이지만 앞을 못 보는 분들은 미끄러져 넘어지기 쉽거든요.”
동환군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중 하나로 생선 손질하는 것을 꼽았다. 음식을 만들다 보면 생선 내장을 손질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전까지 한 번도 생선을 다뤄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상당히 고역이었다고. 하지만 당시의 경험 덕분에 지금은 징그럽거나 무섭다고 피하는 게 없으며 어떤 음식이든 감사하게 잘 먹는다는 그가 봉사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한 가지 더 들려주었다.
“지난해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중년 신사 한 분이 반갑게 알은척을 하시더라고요. 제가 서울역 광장에서 무료 급식을 할 때 노숙을 했던 분인데 지금은 재기에 성공해서 그때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보육원이나 양로원을 찾는다고 하셨죠. 사실 그분이 지금까지 힘들게 살고 있다면 제가 했던 봉사활동이 단순한 자기 만족에서 그쳤을 텐데, 그분의 성공한 모습을 보면서 봉사가 진정으로 보람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월드비전에서 가정형편상 학원을 다니지 못하거나 과외를 못하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정화양은 봉사를 통해 긍정의 에너지를 얻는다고 한다.
“아이들이 제가 가르치는 걸 스펀지처럼 쏙쏙 빨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뿌듯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 찾아서 봉사를 하게 됐고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인 막내 동만군은 해비타트에 특히 열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 2002년 몽골에서의 해비타트(빙그레는 기업 차원에서 2002년부터 몽골 해비타트를 지원하고 있다) 참여 경험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던 동만군은 춘천 해비타트(3박4일)가 끝난 직후 김 회장과 함께 몽골로 달려갔다.

백범 김구 선생 손녀인 김미 여사, 친정아버지 모시고 살며 자녀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교육
김 회장 부부는 김 여사의 친정아버지인 김신씨(85·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를 모시고 살고 있다. 더불어 김 회장은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직을 맡아 각종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 같은 김 회장 부부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살아 있는 역사교육이 되고 있다. 정화양은 이에 대해 자부심과 더불어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께서 종종 ‘국가가 없는 국민의 마음을 아느냐, 너희에게는 나라가 있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것이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세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분들 덕분에 저희가 지금의 편안함을 누리고 있는거라 생각하고 아울러 그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얼마 전에는 외할아버지를 인터뷰하러 오셨던 하버드 대학의 한 교수님이 ‘당신 가족은 역사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굉장히 뿌듯했고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인터뷰 내내 김 회장 가족은 자신들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기업인으로서, 또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부여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진지한 자세와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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