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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그 사람 그 후

장애 딛고 수도권 전철 역장으로 승진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기획·송화선 기자 / 글·이동주‘자유기고가’ / 사진·조세일‘프리랜서’

2007. 08. 22

지난 2003년 선로에 떨어진 어린이를 구하다 두 다리를 잃은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씨가 최근 수도권 전철 가산디지털단지역장으로 승진해 화제다. 갑자기 닥친 장애의 시련을 딛고, 밝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장애 딛고 수도권 전철 역장으로 승진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김행균씨(46)는 ‘아름다운 철도원’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3년, 선로에 떨어져 위험에 처한 어린이를 구하다 역으로 들어오던 새마을호 열차에 치여 두 다리를 잃었기 때문. 이 사고 이후 대수술을 7회나 받고 1년여 동안 재활치료를 한 그는 이듬해 8월 두 다리에 의족을 한 채 철도원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어느새 3년이 흐른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6월 말 김씨가 수도권 전철 가산디지털단지역장으로 승진했다는 내용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역사에서 여전히 친절하고 밝은 모습의 김씨를 만날 수 있었다. 역장실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 전화를 걸자 환한 미소를 띤 채 개찰구 앞까지 마중을 나왔는데, 앞장서 걷는 그의 불편한 걸음걸이만 아니라면 4년 전 ‘아름다운 철도원’ 시절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보였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만 해도 다리를 잃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수술을 받으면 다시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여러 차례 수술을 해도 접합이 잘 되지 않더라고요.”
김씨는 끝내 두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아야 했다. 선천적 장애도 힘들지만, 불의의 사고로 얻는 후천적 장애는 정신적 고통까지 더해져 더 힘들게 마련. 밝고 긍정적인 성격의 김씨 역시 사고 뒤 한동안은 몸과 마음의 상처로 아픔을 겪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가족들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집안의 가장인 제가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당했으니 다들 마음이 어땠겠어요. 아내와 두 아들, 제 걱정에 잠 못 이루시는 어머니…. 식구들 생각을 하면 지금도 늘 미안한 마음뿐이죠.”

“사고 전과 똑같이 대해주는 가족 덕분에 마음의 상처 극복할 수 있었어요”
사고 후 가장 걱정된 것도 아이들이 달라진 아빠의 몸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아들 준성이(17)와 효성이(12)는 고맙게도 그를 변함없이 편하고 ‘만만하게’ 대해줬다고. 한동안 각종 매스컴에 김씨에 대한 기사가 실렸을 때도 그와 관련된 질문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저 철도원이 우리 아빠’라고 자랑도 한 모양이더라고요. 하지만 제 앞에선 그런 기색조차 비치지 않았죠. 오히려 ‘아빠 뭐 좀 해줘’ 하면서 곧잘 심부름도 시키고…(웃음). 그런 모습이 참 고마워요. 만약 제게 장애가 생긴 뒤로 아이들 태도가 달라졌다면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겁니다.”
그를 변함없이 대하는 건 부인 배해순씨(44)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남편에게 장애를 가져다준 사고의 충격이 누구보다 컸을 텐데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그런 상황에 뛰어들어 몸을 다친 김씨를 원망하지도 않는다고. 배씨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학교 공부로 바쁠 때는 남편에게 집안일을 시키는 등 전과 다름없이 대한다고 한다. 김씨는 “이런 가족들의 배려 덕분에 장애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고 전처럼 밝고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장애 딛고 수도권 전철 역장으로 승진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느라 두 다리를 잃었지만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씨.


김씨는 숱한 수술과 재활기간을 거쳐 사회에 복귀한 뒤 아테네올림픽대회 성화 봉송, 5km마라톤 완주, 킬리만자로 등정 등 일반인도 하기 어려운 일에 도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특히 그는 지난 2005년 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끄는 ‘희망원정대’ 대원으로 킬리만자로 등반에 나서서 4800m 지점까지 올랐던 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만 해도 몸이 의족에 익숙하지 않아서 중심 잡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산소 부족과 고갈된 체력 때문에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게 힘겹기만 했죠. 하지만 저만 그랬던 게 아니었어요. 비장애인들도 똑같이 힘들었거든요. 극한 상황에 도달하자 오히려 저와 같은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을 배려하고 격려하기까지 했죠. 그 등반을 통해 전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경계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달았어요. 육체적으로 약간 불편하기는 하지만, 비장애인과 비교해 못할 일은 전혀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덕분에 후천적 장애를 당한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일상에 적응한 김씨는 직장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복직 3년 만에 가산디지털단지역 역장으로 승진했다고 한다. 지난 79년 철도청에 입사한 지 28년 만의 일이다. 도시철도 7호선 환승역으로 하루 유동인구가 8만 명에 이르는 이 역의 책임자를 맡은 뒤 그가 가장 관심을 쏟는 분야는 승객들의 안전과 역 환경 개선. 특히 하루 평균 8명 정도 이용하는 것으로 확인된 휠체어 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역을 찾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기울일 계획이라고 한다.
“철도원은 제 천직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는데, 학교 추천으로 전액 장학금이 지급되는 철도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죠. 그때부터 ‘나라 덕분에 공부했으니 어떻게든 꼭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철도원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고요.”
앞으로 우리 철도가 중국과 시베리아까지 뻗어나가면 조그만 역할이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올해 서울사이버대 중국통상학과에 입학한 김씨는 요즘 짬짬이 중국어 공부에도 매달리고 있다고 한다.
“사고 후 제 도움을 받았던 아이의 가족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적은 없지만 입원해 있는 동안 걸려왔던 여러 통의 격려 전화 가운데 한 통은 아마도 그분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운함이나 원망은 없어요. 그 자리에 있던 철도원이라면 누구나 저처럼 행동했을 겁니다. 만약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저 또한 같은 행동을 할 거고요.”
“철도원으로 근무하며 목격한 갖가지 참혹한 사고와 비교하면 내 경우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고 말하며 활짝 웃는 김씨는 “앞으로도 부족하지만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의족에 의지해 걷는 그의 걸음걸이는 여전히 힘겨워 보였지만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일터와 가정과 인생에서 주위 사람에게 늘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그의 삶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완벽한 중심을 잡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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