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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독점 인터뷰

영화배우 최은희 감회 & 남편에 대한 그리움

신상옥 감독 세상 뜬 후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받은~

기획·송화선 기자 / 글·김순희‘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동아일보 출판사진팀

2007. 01. 24

지난 11월 열린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은 최은희씨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던 삶에 대해 털어놓았다. 지난해 봄 남편 신상옥 감독을 떠나보낸 그가 눈물로 들려준 망부가를 정리했다.

영화배우 최은희 감회 & 남편에 대한 그리움

신 감독의 사진을 보고 있는 최은희씨(오른쪽).


영화배우 최은희씨(76)를 인터뷰하러 가는 길, 안개꽃에 푹 파묻힌 장미꽃 한 다발을 준비했다. 꽃을 건네자 그가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최씨는 유난히 장미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화병에 담은 꽃을 소파 앞 탁자에 올려놓았다. 거실 정중앙 벽에 걸린 ‘사진 속’ 신상옥 감독이 꽃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젊고 우수에 찬 눈빛이 인상적인 사진. 최씨는 지난 54년 신 감독과 결혼해 부부이자 동료 영화인으로 52년간 함께 살았다.
“저거, 남편이 30대 초반일 때 찍은 거예요. 한복을 입은 유일한 사진이죠. 저걸 찍을 때 신 감독이 안 찍겠다고 하는 걸 내가 막 찍자고 우겼어요. 어때요. 사진 잘 나왔죠? 한복을 입어서 그런지 온화하고 부드럽게 보여서 좋아요. 내가 아끼는 사진 중 하나죠.”
장미꽃과 신 감독 사진을 번갈아 보던 그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 50여 년 전 행복하던 신혼 시절,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것일까. 최씨의 눈자위가 이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가 마음을 가다듬고 눈에 맺힌 이슬을 손등으로 훔치는 동안, 기자는 그만 숙연해지고 말았다.
“힘들어요, 몹시. 나만 겪는 일이 아닌데, 남편을 먼저 보낸 게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요. 남들은 ‘살 만큼 살다 갔으니 이제 그만 마음을 추스르라’고 하는데도 그게 잘 안돼요. 마음이 아리고 아파. 지금도 내 곁에 있는 것만 같고요.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나와 환히 웃으며 ‘여보’ 하고 부를 것만 같거든요.”
한국 영화계의 거목 신 감독은 지난 4월11일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와 영화를 이승에 남겨둔 채 눈을 감았다. 향년 80세. 최씨는 “2004년 C형 간염으로 간이식 수술을 받은 게 악화돼 입원치료 중이긴 했지만 그렇게 황망히 떠날 줄은 몰랐다”며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고 아픈 속내를 드러냈다.
“저는 아침과 낮에만 병실을 지키고, 밤엔 간병인이 있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집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는데 그날따라 저를 부릅디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오랫동안 꽉 쥐더니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하더라고요. 그분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사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죠. 그게 남편과 이승에서 나눈 마지막 인사였어요.”

영화배우 최은희 감회 & 남편에 대한 그리움

최은희씨가 가장 아끼는 한복을 입은 신상옥 감독 사진과 두 사람의 단란한 한때(위), ‘여보’하며 신감독 목소리를 낸다는 앵무새 ‘꼬꼬’(아래).


최씨가 다시 사진 속 신 감독에게 눈길을 돌렸다. 또다시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춘 그는 “아직도 그분 이야기를 하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저녁에 잠들 때가 가장 힘들어요. 쉬 잠들지 못하고 그 양반을 떠올리곤 하죠. 2주일에 한 번씩 성묘를 가는데 그러면 뭐해요. 나 왔다고 인사를 하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는걸요. 참, 무심도 하지. 김소월의 시 ‘초혼’ 알죠? 내 마음이 꼭 ‘초혼’과 같아요. 오래 전부터 좋아하던 시였는데 어쩜 그렇게 지금 내 마음과 똑같은지 몰라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기자의 머릿속에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중략) /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로 이어지는 시 ‘초혼(招魂)’이 떠올랐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가진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남편을 사랑했다는 최씨. 그러나 이들 부부는 서로 애틋하게 감싸고 사랑하면서도 정작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다고 한다.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고 마음으로만 확인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신 감독 역시 살아생전 사랑한다는 말을 두세 번 밖에 하지 않았다고.
“남편 가는 마지막 길에 ‘사랑한다’는 말, ‘죽도록 사랑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못한 게 가슴에 맺혔나봐요. 그래서 ‘초혼’이라는 시가 가슴을 더 후벼 파는 것 같아요. 내 심중에 남아있는 그 한마디를 꼭 했어야 하는데…. 그 짧은 말을 할 겨를도 없이 무심히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그를 더 잊지 못하고 마음이 아픈 것이겠지요. 그리움도 깊어만 가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쩌면 최씨는 신 감독으로부터 “나도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소”라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물어보지는 못했다. 애써 울음을 참느라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그가 다시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아서였다.

신 감독의 외도 오래 전에 다 용서해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등에 출연하며 50~60년대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끈 공로로 최씨는 지난 11월 제5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이날도 수상 소감을 통해 “(먼저 간 남편이) 하늘에서 박수를 치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평생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 공로상을 받으니까 쑥스러웠어요. 안 울려고 그랬죠. 눈물을 꾹꾹 참으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지 뭐예요. 2003년 남편이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공로상을 받았을 때 난 그 사람 곁에 있었는데, 내가 상 받을 때는 그가 가고 없으니 어찌 마음이 안 아프겠어요. 남편이 살아 있었으면 그날처럼 함께 기뻐했을 텐데…. 상을 받고 집에 들어와 남편에게 ‘여보, 나 상 받았어’ 하고 속삭였죠. 의미 있는 상을 받았지만 마음이 허전했어요.”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결혼과 이혼, 그리고 북한에서의 재결합 등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최씨는 신 감독과 결혼 22년 만인 76년 이혼했는데, 신 감독이 결혼생활 중 한 여배우와 1남 1녀를 뒀다는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배신감, 어~유. 그 당시에 느꼈던 배신감을 어떻게 말로 형용할 수 있겠어요. 몹시 자존심이 상했죠. 나는 아이를 안 낳았는데 그쪽은 아이를 낳았으니까 여자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들었고요. 정말 상처가 컸어요. 평소 남편이 ‘아이는 낳지 않아도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영화계 선배 중에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노부부가 있는데 우리도 그렇게 살자고 했죠. 그래서 두 아이를 입양해서 키웠던 거고요. 그러던 중에 그 사람이 밖에서 아이를 낳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영화배우 최은희 감회 & 남편에 대한 그리움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다정하던 한때.


최씨는 남편이자 영화계 동료인 신 감독과 하루 스물네 시간을 거의 붙어 지내다시피 해 남편이 바람을 피우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최씨는 이혼 후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안양예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일에만 몰두하다, 78년 1월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됐다. 그가 납북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던 건 당연한 일. 그리고 그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돼 유포됐던 이야기는 다름 아닌 ‘김정일이 그를 좋아해서 납북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문을 전하자 최씨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나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나이 차이가 얼만데.(최은희는 김 위원장보다 16살이 많다) 누가 그런 가당찮은 소문을 냈는지 모르겠어요. 김 위원장은 저와 신 감독의 열렬한 팬이었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세상 사람들은 온갖 억측으로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납북은 그에게 신 감독과 끊어졌던 부부의 연을 다시 맺게 해준 계기가 됐다. 최씨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 감독이 만사를 제쳐둔 채 그를 찾아나섰고, 그와 비슷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정보만 들으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 감독 또한 78년 말 북한에 납치됐고,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는 바람에 4년 넘게 감옥에 갇혀 있다가 83년에야 최씨와 만나게 됐다.
“김정일 위원장이 주선한 파티에 초대받아 갔는데 신 감독이 거기 있는 거예요. 일단 깜짝 놀랐고, ‘북한을 탈출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겼어요. 북한에서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마침 그날이 30년 전 처음 결혼한 날이라 더 감개무량했죠. 그가 왜 나를 그토록 찾아 나섰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았어요. 외도한 남편에 대한 배신감도 눈 녹듯 사라졌죠.”

남편 기리는 기념관 짓는 게 마지막 소원
신 감독과 살았던 여배우는 그가 납북된 뒤 다른 이와 재혼해 7년 동안 살다가 지난 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최씨는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장례식을 치러주었고, 신 감독과 그 배우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를 미국으로 불러들여 공부도 가르쳤다고 한다.
“같은 여자로서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과 그런 일이 있기는 했지만 힘든 삶을 살다 갔잖아요. 그것도 젊은 나이에. 신 감독과 다시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동안 남편은 그 일에 대해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나도 묻지 않았고요. 남자들이 외도를 하면 흔히들 ‘바람을 피웠다’고 하는데 그 표현이 남자들의 심리를 적절히 대변해주는 것 같아요.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불어온 ‘바람’에 휩싸여 잠시 한눈을 파는 거죠.”
신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둘이 함께 살던 경기도 분당의 빌라를 처분하고 서울 방배동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의 식구는 사촌여동생과 10년 넘게 함께 살아온 앵무새 ‘꼬꼬’라고 한다. 그는 거실 창쪽에 놓인 커다란 새장을 가리켰다.
“저 앵무새 말예요. 미국(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최씨가 납북된 지 8년 만인 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을 통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미국에서 생활하다 지난 2000년 귀국했다)에서 살 때 구입해 10년 넘게 같이 살았어요. 그런데 저게 가끔 ‘여보’ 하고 부르거든요. 목소리도 어쩜 그렇게 신 감독과 똑같은지 몰라요. 외출했다가 집에 들어오면 ‘다녀오셨어요? 마미’ 하고 얘기하고 집에 전화벨이 울리면 ‘꼬꼬’가 먼저 ‘여보세요’ 하고 전화 받는 시늉을 해요.”
가슴으로 낳은 자식만 있을 뿐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없는 그에게 ‘꼬꼬’는 좋은 친구이자 가족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적적하기 그지없는 삶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집에 손님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면 꼬꼬가 ‘시끄러워’ 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러면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죠. 강아지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꼬꼬’는 말을 하니까.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아이와 대화하는 것 같아요. 신 감독도 살아생전에 꼬꼬를 굉장히 예뻐했죠. 밥 먹을 때 어깨에 얹고 먹을 정도로요.”
“영화배우를 하지 않았다면 현모양처로 살았을 것”이라는 최씨는 “영화를 위해 한평생 살다간 남편을 기릴 수 있는 기념관을 만들고 싶은 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말했다. 3시간에 걸친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가 남편의 손때가 묻은 유품과 작품을 기념관에 손수 진열할 수 있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그의 꿈이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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