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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거침없는 예술혼

소중한 삶과 인연에 대한 책 펴낸 화가 김점선

글·송화선 기자 / 사진ㆍ김성남 기자

2006. 06. 16

밝고 경쾌한 그림과 거침없는 글 솜씨로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인기 화가 김점선이 60회 생일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에세이 ‘김점선 스타일’을 펴냈다. 김씨를 만나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그의 인생 스타일과 소중한 인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소중한 삶과 인연에 대한 책 펴낸 화가 김점선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화가 김점선(60)에 대해 “하나쯤 없을 수 없지만, 둘이면 곤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김점선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사람. 그게 바로 김점선이다.
지난 5월 서울 광장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다소 으스스한 날씨인데도 ‘여름 분위기가 나게 옷을 입어달라’는 기자의 주문에 따르느라 반바지와 반팔 셔츠를 챙겨 입은 상태였다.
“원래는 비키니를 입고 있으려고 했는데 몸매가 영 안되더라고. 으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 속으로 첫 만남의 어색함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독특한 개성 탓에 얼핏 괴팍해 보이지만, 사실 김점선은 이런 사람이다.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웃음 짓는. 그 때문에 그의 곁에는 늘 친구가 많다.
이해인 수녀, 서강대 영문과 장영희 교수, 서울대 음대 신수정 학장, 사진작가 김중만, 시인 김용택, 가수 조영남까지, 도무지 하나로 묶일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 그의 막역한 친구. 이들이 김점선의 60회 생일을 맞아 기꺼이 글을 쓰고, 김점선이 그들에게 선물한 그림을 모아 펴낸 책이 바로 ‘김점선 스타일’이다. 이 책의 기획은 김점선에 대해 “돌아서면 이내 보고픈 그리움의 여운을 주는 좋은 친구”라고 말하는 이해인 수녀가 맡았다.
“이렇게 저렇게 만났어요. 김중만은 친구들이랑 몰려다니던 어린 시절 알게 된 사람이고, 이해인 수녀님이랑 장영희 교수는 신수정네 집 식탁에서 만났죠. 김용택 시인은 대학로에서 길을 물어보다 우연히 마주쳤고요. 다 그런 식이에요.”
그렇게 오가다 만난 이들이 김점선 곁에 머무르며 ‘친구’가 된 이유는 “그녀의 순발력과 기발함, 그녀의 활기가 지리멸렬한 삶에서 날 해방시켜주기 때문”(서강대 장영희 교수)이다. 최근 김점선과 함께 그림이 있는 영시집 ‘선물’을 펴내기도 한 장영희 교수는 ‘김점선 스타일’에 실린 글을 통해 “김점선씨는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은 터프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고 여리다. 겉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순하고 착하다. … 김, 점, 선. 한마디로 그녀는 그녀가 그려내는 그림처럼 내 눈앞에 실체로 존재하는 아름다운 환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3초 만에 선택한 결혼, 아픔 속에서 단련된 예술
사실 김점선은 우리 화단에서 특이한 존재다. 이화여대 교육공학과를 졸업한 그가 1972년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홍익대 미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주위의 시선은 ‘미대 출신도 아닌 여자가 뭘 알겠냐’는 게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대학 근처에 하숙집을 정해놓고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실기실에 박혀 그림만 그려댄 김점선은 그해 열린 제1회 ‘앙데팡당전’에 입상하며 ‘천재’로 다시 태어났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과 일본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우환 등이 심사위원으로 나서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할 작품을 뽑은 이 대회에서 입상하자 김점선에 대한 주위의 평가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그는 편하고 쉬운 길로 가지 않았다. 흑색과 백색이 지배하던 당시 화단의 트렌드에서 벗어나 과감한 원색으로 거침없는 그림을 그려댄 것. 그가 그룹전에 아이가 그린 것 같은 도룡뇽 그림과 글씨로 가득 채운 캔버스를 내자 다시 “천재는 무슨….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구만”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듬해부터 국내파 화가들이 ‘앙데팡당전’의 심사위원을 맡으면서 그의 그림은 더 이상 주목받지 못했고, 그 역시 더 이상 공모전에 그림을 내지 않았다. 대신 개인전을 열어 대중과 직접 소통했다.
지금 그가 ‘그림만으로 먹고사는’ 몇 안되는 화가 가운데 한 명으로 건재하게 된 건 어쩌면 이때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 목숨 걸고 그림만 그렸다”고 말하는 그는 지금도 ‘유화를 그리다 팔이 아프면 컴퓨터로 그리고, 그러다 눈이 아파지면 다시 유화를 그리기 시작하는’, 한 해에 2~3번씩 꾸준히 개인전을 여는 성실한 화가다.

소중한 삶과 인연에 대한 책 펴낸 화가 김점선

김점선의 개성 넘치는 화풍이 느껴지는 말 그림 연작.


“사실 결혼을 한 것도 좋은 화가가 되기 위해서였어요. 서른이 넘어서까지 결혼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77년에 화가 김상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결혼도 안 해보고 어떻게 예술을 안다고 잘난 척하느냐’고요. 시장 가서 콩나물 값 백원 때문에 울고 웃어보고, 찬물에 손 담그고 기저귀 빨아보기 전에는 인생이나 예술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말씀을 듣다 보니 맞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술을 위해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내 마음을 단 1초라도 움직이는 이가 있으면 그와 결혼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남자를 찾아다니다 한 선배의 전시회장에서 남편 고 김창남씨를 만났다. 전시회를 축하하겠다며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그만 마음이 흔들려버린 것이다.
“그렇게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정말 처음 봤어요. 그 사람 이름이 뭔지, 직업이 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죠. 노래를 한 3초쯤 듣고 ‘아, 저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간주가 나오는 동안 대뜸 ‘너, 나랑 결혼하자’고 소리를 질렀죠. 그쪽에서도 ‘그러자’ 하고 맞장구치데요. 그날 공연이 끝나자마자 같이 여인숙에 갔어요.”
알고 보니 그는 두 살 어린 ‘백수’ 이혼남이었다. 하지만 김점선에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고. 그들은 결혼했고, 2년 뒤 아들이 태어났다. 김점선은 그와의 결혼생활을 통해 그토록 원하던 ‘혹독한’ 삶을 체험하게 됐다.
“그림만 팔아서 먹고살자고 독하게 마음먹었는데, 그림이 도저히 팔리지 않는 거예요. 어쩌다 돈이 생기면 쌀만 샀어요. 그러고는 옆집에서 된장을 얻어다 들에서 뜯어온 풀 넣고 국을 끓여 먹었죠. 그때는 콩나물 값 백원 깎는 것도 꿈같은 얘기였어요. 콩나물은 살 엄두조차 낼 수 없었으니까요.”
다행히 굶어죽기 전이면 한 점씩 그림이 팔려주었고,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견뎌온 남편은 지난 98년 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고. 남편의 죽음 이후 스트레스와 오십견으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이런 삶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지금의 ‘김점선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소중한 삶과 인연에 대한 책 펴낸 화가 김점선

생텍쥐페리는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유는 그런 것과는 달리 가장 자기다운 일을 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각가가 조각을 하고 있을 때나 어부가 고기를 낚고 있을 때처럼”이라고 말했다.
김점선의 자유는 자신의 생 앞에 최선을 다한 자만이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많은 이들이 그의 자유를 사랑하고,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
“하늘에서 햇빛이 쏟아져 내리듯이, 비가 퍼붓듯이, 번갯불이 번쩍이듯이, 예술현상도 그렇게 무차별적으로 모든 생명체에게 골고루 퍼부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화가 김점선. 그가 계속 지금처럼 정력적으로 활동해 그의 작품을 좀 더 많은 이들 앞에 ‘부드럽게, 황홀하게, 번쩍이면서, 무차별적으로 평등하게’ 쏟아놓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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