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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대를 잇는 예술혼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2세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숨어 지냈지만 이젠 아버지와 당당히 겨뤄보고 싶습니다”

글·이남희 기자 / 사진ㆍ김형우 기자

2006. 05. 04

기법과 시대상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그림은 쌍둥이처럼 닮았다. 순박하게 살아가는 서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 모노크롬 색조,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겠다’는 작가 정신…. 한국 근대미술의 아버지, 고 박수근 화백의 아들 박성남씨는 20년 만에 전시회를 열며 “2세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 숨어 지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당당히 겨뤄보고 싶다”고 말한다.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찜질방에서 책을 읽는 소녀를 그리고 있는 박성남 화백.


‘대가(大家)의 2세’는 남모르는 고통을 겪는다. ‘아버지의 후광’은 2세의 활약에 득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는 경우도 적잖기 때문이다. 세간의 편견을 뛰어넘고,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2세는 남보다 더 뼈를 깎는 노력을 쏟아야 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아버지, 고 박수근 화백(1914~65)의 아들 박성남씨(59·서양화가)는 18년간 호주에서 청소부로 일하며 그림을 그려왔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은 1호(그림엽서 한 장 크기)당 가격이 2억원을 호가하지만, 그의 아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가난하게 살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명성을 벗어나 독립된 예술가로 홀로서기 위해 그는 이제껏 은둔자의 삶을 고집했는지 모른다.
갑작스런 추위로 서늘한 기운이 감돌던 4월 초, 박성남씨가 머물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의 한 컨테이너 건물을 찾았다. 그가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이 컨테이너 건물은 그를 아끼는 한 화랑 관계자가 마련해준 것이다. 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난 그는 한국의 한 미술 관계자가 아버지의 가짜 그림을 대거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지난해 급거 귀국했다.

유화물감 칠한 뒤 붓으로 덜어내는 독창적 기법 완성해
그는 박수근·이중섭의 작품을 대량 소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김모씨를 고소했고, 그 때문에 김씨로부터 다시 ‘무고 혐의’로 맞고소를 당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형사 7부는 지난해 말 “김씨가 소장한 박수근의 그림은 모두 위작(僞作)”이라고 발표했고, 박성남씨는 ‘무고’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후 박씨는 선친의 위작들이 어떤 경위로 유통됐는지 검찰 수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이번 위작 사건은 한국의 근대미술을 죽이는 테러”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한국 근대미술의 양대 산맥인 박수근·이중섭 두 화백의 가짜 작품이 판친다는 것이 무엇보다 가슴 아팠습니다. 근대의 근거를 살려야 현대가 살아나고, 우리 후대에 건강한 문화유산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작품을 구별해내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아버지의 기법을 곁에서 지켜보고, 연구해왔기 때문입니다. 위작을 가려내기 위해, 저는 그림에 아버지가 쓴 재료가 사용돼 있는지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어느 정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림의 마티에르(질감)와 연대감을 봅니다. 아버지의 50년대 작품에는 고심하면서 마티에르를 고쳐 그린 흔적이 남아 있는데, 60년대 작품은 그림의 형태, 재료의 조화가 보다 완벽하게 나타납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기법은 저만이 간직한 비밀이죠.”
그는 최근 특별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호주로 이주한 후 20년 동안 한 번도 갖지 않은 전시회를 열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그는 오는 5월25일부터 서울 강남구 코엑스 전시관에서 열리는 ‘국제 아트 페어’에 참가해 2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 초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에서 열린 ‘박수근가(家) 3대에 걸친 화업의 길’이 아버지의 명성에 기댄 전시회였다면, 이번 전시회는 ‘독립된 예술가 박성남’을 선언하는 자리다.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그의 작업실에는 수십여 점의 그림이 걸려 있다. 지하철에서 졸고 있는 청년, 찜질방에 누워 있는 소녀, 딸아이를 끌어안고 행복해하는 엄마…. 그림 속 주인공은 모두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의 그림은 50년대 순박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선친의 작품과 ‘닮은 듯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특히 박성남씨가 그린 ‘층-빈나무’는 선친의 작품 ‘나목’을 떠오르게 한다.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아버지는 벌거벗은 나무를 그릴 때 수없는 덧칠을 통해서 독특한 마티에르(질감)를 창출하셨습니다. 50년대는 6·25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결핍의 시대’였습니다. 아버지는 서양에서 들여온 유화 물감으로 덧칠의 미학을 창조하셨죠. 정성스런 덧칠을 통해 그 시대의 배고픔을 채워주신 겁니다.
그러나 ‘과잉의 시대’인 21세기에 살고 있는 저는 ‘깎아내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은 오톨도톨한 요철이 있어 촉각적인데, 제 그림은 매끈매끈합니다. 저는 그림을 통해 쌓여가는 시대의 아픔을 덜어내고자 한 거지요.
이렇듯 기법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겠다’는 생각은 아버지의 뜻과 일치합니다. 선함이란 청문회에 나와도 먼지 하나 안 나는 그런 경지를 말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그저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뜻하는 거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옮길 때 그림은 가장 큰 힘을 갖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생활고 때문에 그림 모두 팔아 소유한 작품 한 점 없어”
박수근 화백이 살아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순한 소처럼 선한 눈빛을 지닌 박성남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박수근 화백을 만난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핏줄은 생김새뿐 아니라 예술적 견해와 작품세계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양이다. 여러 면에서 아버지를 쏙 빼닮은 그는 아버지와 닮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고 한다.
“66년에 선친의 유작전이 열렸는데, 거기서 선친의 친구분들이 ‘박수근 아들 박성남이가 돈독이 올라서 아버지랑 똑같이 그림을 그린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저 좋아서 그대로 그렸을 뿐인데…. 그 말이 상처가 돼 ‘절대 아버지처럼 그리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는 만큼, 저도 아버지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존재는 제게 큰 자랑이지만, 제가 독립된 예술가로 인정받는 데는 방해가 됐습니다. 국전에 7회나 입선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지만, 아버지의 후광은 제게 역으로 작용했지요.”
그가 86년 호주로 이주한 것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아이들을 호주같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자유롭게 교육시키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하던 그가 호주에 도착해서 처음 시작한 일은 바로 청소였다. 그렇게 정직하게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는 조용히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대목은 한국 근현대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화가의 아들이 왜 가난하게 사느냐는 것. 선친의 작품 몇 점만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는 생계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성남씨는 “아버지의 작품을 소장하지 못한 건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몇 차례 ‘박수근 유작전’을 열어 그림을 모두 팔았습니다. 당시엔 1호당 5천원이었죠. 그 돈으로 쌀을 샀고, 학비를 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랬고요.
선친의 그림이 저희 가족에게 남아 있었다면, 형제간의 우애도 지금처럼 원만하지 않았을 것이고 게으르게 살았을 겁니다. 예술가는 적당히 가난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호주의 교회 뒤뜰에 모인 박성남씨 가족. 오른쪽부터 큰며느리, 박성남씨, 손자 에담, 화가의 길을 걷는 장남 진흥씨, 차남 진영씨, 작은 며느리.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호주를 방문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오른쪽)을 만난 박성남씨.



20년 만의 전시회 여는 고 박수근 화백 아들 박성남

작업실 근처에 살고 있는 진돗개를 모델로 그린 연작 ‘층-빈그릇.’


박성남 화백은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을 생각이다. 아버지와 당당히 실력으로 겨룰 것이기 때문. 이제 그는 51세에 작고한 아버지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유화 물감을 칠한 뒤 붓으로 쓸어내 질감을 매끄럽게 표현하는 독창적인 기법을 완성했다.
그의 ‘선 긋기’는 상상력으로 넘쳐나는데, 엉켜 있는 선과 선 사이의 ‘층’은 공간 속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든다. 그림의 배경을 엉켜 있는 실타래로 표현함으로써 다원화된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10년쯤 지나면 아버지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그의 모습에서 강한 자신감이 묻어난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 박성남씨의 장남, 박진흥씨(33) 역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진흥씨는 고등학교 때 인도로 유학을 떠나 델리미술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고 호주 웨스턴시드니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경쟁률이 높은 델리미술대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졸업할 때는 인도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고 한다. 2001년 ‘블랙타운 미술대전’에서는 9·11 테러를 소재로 그린 ‘회색도시 뉴욕’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닮았지만 다른’ 3대(代) 화가의 작품 경쟁이 앞으로 본격화될 전망이다.
박성남씨는 아버지 박수근 화백을 “소처럼 성실하고 흙처럼 소박하게 살았던 분”이라고 회상한다. 그 시대 다른 작가들은 방석 위에 앉아 파이프를 물고 폼 잡는 데 익숙했지만, 그의 부친은 소탈한 차림으로 서민의 순박한 모습을 담아내는 데 몰두했다는 것.



소처럼 성실하고 흙처럼 소박하게 산 아버지, 선친의 예술세계를 최고로 받든 어머니
“제가 그림을 그릴 때 아버지가 해주신 단 한 가지 충고는 바로 ‘봄을 그리면 봄 느낌이 나야 한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현 시대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 된다’는 교훈을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는 79년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선 더욱 애틋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예술세계를 최고로 인정하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가 없었다면, 지금의 박수근 화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부잣집 규수였던 그의 어머니는 “당신을 모델로 그리고 싶다”는 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여 가난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이웃집에서 식량을 꿔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그는 돈 벌어오지 않는 남편을 한 번도 타박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림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외무부·내무부 장관 역할을 동시에 하셨습니다. 아버지가 그림을 그리실 때, 어머니는 늘 저희에게 방안에서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걸어다니도록 당부하셨죠. 어머니는 집안에서 아버지를 항상 최고의 화가로 대접하셨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워낙 잘 생기고 인기가 좋다 보니 두 분 사이에 부부싸움이 가끔 있기는 했죠. 하루는 아버지의 셔츠에 립스틱이 묻어 있어 큰 다툼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 자국이 붉은 물감으로 밝혀지기도 했습니다(웃음).”
박수근 화백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는데 바로 소설가 박완서씨다. 박완서씨가 결혼 전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알게 된 미군 초상화가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쓴 ‘나목’은 박씨의 처녀작이며, 동시에 한 화가를 세상에 각인시킨 화제의 소설이 됐다. 문화계 두 거목의 인연을 아들 박성남씨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박완서 선생님과 아버지는 우리 예술계의 쌍두마차입니다. 50년대 초 막막한 서울을 한 분은 문학으로, 또 한분은 그림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나목의 이미지 말고 다른 무엇으로 아픈 시대를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두 분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향후 5년간 한국에 머물며 ‘2000년대 한국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다는 박성남씨. 그의 선한 눈빛에서 ‘인간의 선함과 정직함만 그리겠다’는 고집스런 예술 의지를 읽는다. ‘21세기 자화상’을 우직하게 보여줄 장인의 아름다운 선물에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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